< 이젠 그것도 어느 정도 보여 >
“다시 한번 갤러리의 관심이 두 선수에게로 향합니다!”
맬버른 서킷의 관중은 대다수가 호주인들이다. 지난 11시즌부터 자국 선수를 응원해온 갤러리들이 이번에도 리카르도의 좋은 성적을 염원하며 그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마지막 코너를 빠져나온 서준하와 리카르도! 이번에는 리카르도가 서준하의 슬립스트림에 들어갑니다!”
자신의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앞차를 향해 따라붙는 리카르도. 디펜스보단 추월에 훨씬 더 강한 선수기에 지금 그는 훨씬 저돌적이었다.
“와하하! 다시 추월 성공하는 리카르도! 레이스 막판 서준하와 치열한 배틀을 벌입니다...!”
리카르도는 끝까지 집중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맬버른, 이곳은 자신의 고향이자, F1 GP 첫 데뷔전을 치른 곳. 지금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팬들 역시 6년 전부터 함께 해온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기대에 보답하고,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 오늘 리카르도가 포디엄에 올라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곧바로 이어지는 또 다른 고속 스트레이트! 서준하가 리카르도의 뒤에 바짝 붙습니다!”
“두 선수 체력 소모가 굉장할 것 같군요. 드라이빙 포지션을 여러 번 바꾸면 정신적인 피로감이 엄청날 텐데요. 이렇게 되면, 끝까지 버텨내는 선수가 승리할 것 같습니다!”
수차례 추월과 재추월이 반복되는 상황. 체력에서만큼은 자신 있는 리카르도였지만, 다시 한번 그와 가까이 붙은 루키를 보고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끝까지 따라와 봐!’
레이스가 후반에 들면서 1, 2위와의 격차는 많이 벌어진 상황. 두 사람의 뒤를 쫓는 선수들과도 격차가 컸기에 지금 서준하와의 배틀이야말로 서로의 실력을 겨뤄볼 수 있는 기회였다.
끈질기게 따라오는 루키가 성가셨지만, 한편으론 오랜만에 진지한 레이스를 해볼 수 있다는 사실이 리카르도를 흥분케 만들었다.
‘노즈를 밀고 들어오는 패턴이 다양하고 훌륭하지만, 이젠 그것도 어느 정도 보여...!’
지난 퀄리파잉부터 서준하의 드라이빙을 눈여겨봤던 리카르도. 오늘 레이스에서도 루키의 어택은 날카롭고 다채로웠고, 소문 그대로 베테랑 드라이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분명 읽어낼 수 있는 패턴이 존재했다. 추월에는 자신 있었기에 앞으로 남은 열 바퀴 동안 재추월 시도만 차단한다면 충분히 승리를 가져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준하! 최대한 레이트 브레이킹하면서 6턴을 빠져나옵니다!”
“오, 지금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지금 저 속도를 내는 건 DRS 없이 다음 시케인에서 노려보겠다는 건데요!”
두 선수의 배틀은 고속 직선 구간에서 슬립스트림을 타며 일어났지만, 파이널 랩까지 얼마 남지 않자, 서준하가 좀 더 색다른 구간에서 추월 시도를 노리기 시작했다.
“고속 코너 8턴에서 서준하의 스피드는 275km/h! 9, 10턴 시케인에서 리카르도와 굉장히 가까워질 것으로 보이는데요!”
빠른 속도로 리카르도의 뒤에 붙은 서준하. 이전과는 색다른 구간에서 리카르도의 슬립스트림에 들어가고,
“시케인을 앞두고 서준하가 슬립스트림에 들어갑니다! 자! 자! 서준하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시케인 진입 전 리카르도가 수시로 윙미러를 흘겨봤다. 빨간색 페라리카의 이동 방향을 떠올리며 미리 블로킹에 들어가는데,
‘바깥쪽이겠지...!!!’
코너 진입 직전 좌측으로 튀어나오려는 서준하의 움직임을 예측한 리카르도. 바깥쪽 라인으로 진로를 변경하며 서준하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아! 서준하! 잠시 주춤! 리카르도의 환상적인 블로킹이었습니다!”
“좀 전과 다른 패턴으로 추월 시도를 했던 서준하였는데요. 역시 리카르도는 쉬운 상대가 아니군요...!”
공격보다는 디펜스에 취약한 리카르도지만, 지금 서준하와의 배틀에서 만큼은 최고의 블로킹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공격과 방어의 연속에 갤러리와 중계진이 연신 감탄을 내뱉고,
“이렇게 되면, 오늘 레이스 결과는 파이널 랩까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서준하 선수가...”
“어...!”
“서준하! 16턴을 빠져나오면서 리카르도를 다시 추월합니다!!”
계속되는 압박 이후 DRS존에서 곧바로 추월에 성공한 서준하. 하지만 DRS 없이 너무나 수월한 추월에 잠시 중계진이 혼란스러워하는데,
“아니, 방금 전 엄청난 블로킹을 보여줬던 리카르도는 어디간 거죠? 지금 진로 변경도 없이 너무 쉽게 자릴 내준 느낌이었는데요?!”
“이게 무슨? 지금 리카르도의 스피드가 300km/h로 급격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
추월을 당하고도 고속 스트레이트에서 스피드가 오르지 않는 리카르도. 스크린에 등장한 그의 경주차를 보고 대다수의 호주팬들이 머릴 감싸 쥐었다.
‘...이런 미친!!!’
스티어링 휠 근처 계기판을 살펴본 리카르도. 치솟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분노의 한숨을 내쉬었다.
***
“뭐야 왜 그래! 갑자기 왜...!”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서준하와 리카르도의 배틀을 지켜보던 레드불 레이싱 팀. 피트에선 호너 감독과 기술 개발 총감독 뉴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출력이 떨어진 리카르도의 경주차를 바라봤다.
훼에에에에엥.
리카르도는 페라리에게 추월당하고 난 후로도 계속 서킷을 달리고 있었지만, 이미 경주차는 정상이 아니었다. 뒤따라오던 다른 선수들에게도 연신 추월당하며 마치 서행하는 백마커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데,
“냉각 계통에 문제가 생겼답니다! 지금 온도가 124도까지...!”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그의 레이스 엔지니어로부터 상황을 전달받은 레드불 팀은 결국 더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머, 멈춰 빨리...”
오더가 끝나자 런오프로 빠지는 리카르도의 경주차. 차량 주변으로 종잡을 수 없는 연기가 새어 나오는 장면이 중계 화면에 등장했다. 시즌 첫 레이스에서 레드불 팀 퍼스트 레이서가 리타이어하는 순간인데,
“뉴이, 설명을 좀 해주시죠. 지난 시즌에 단 한 번도 냉각 계열에는 문제가 없었잖습니까. 지금 레이스 운용도 충분히 오버 히트할 상황이 아니었는데...”
레드불 창단 멤버이자, 경주차 개발에 관련해선 모든 일을 책임지고 있는 뉴이. 기계적 결함으로 보이는 상황에 그 역시 당황을 금치 못했다.
잠시 후, 피트로 복귀한 차량 앞으로 뉴이가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먼저 덕트 쪽을 검사해 보게.”
리카르도의 경주차에 달라붙은 엔지니어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뉴이. 고속 서킷이나 여름 날씨도 아닌 상황에 냉각 계열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드물다. 문제를 살피던 뉴이의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한 가지가 있었는데,
“허... 아, 낙엽이...”
“하필 이게 왜 여기로 들어간 거야, 아나!”
엔진에 공기가 드나드는 통로 주변으로 부서진 낙엽들이 뭉치로 쏟아져 내렸다. 3월 가을의 맬버른에는 서킷 주변 가로수에서 떨어진 낙엽이 원인이었다. 예상했던 원인과 맞아 떨어지자, 뉴이가 크게 한숨을 내쉬는데,
“어떻게 우리 차에만 이런 게 빨려 들어갈 수 있는 건지...”
차량의 구조적인 결함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호너 감독. 주변 엔지니어들의 말처럼 분명 불운한 상황이지만, 묘하게 누군가에게 당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 시즌 시작부터 이거 진짜...”
다시 피트월로 걸음을 옮긴 호너. 서킷을 바라보자 순간, 리카르도와 서준하의 배틀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레이스 후반, 직선 구간에서의 추월을 제외하고 연신 리카르도를 바깥쪽으로 푸시했던 페라리의 루키. 덕분에 리카르도는 특정 구간에서 수차례 아웃라인을 돌아야 했다. 피트 월에 도착하기까지 호너는 트랙 바깥쪽에만 늘어선 가로수들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앙.
훼에에에에에엥.
페라리의 요청으로 시작된 경주차 검시로 시즌 초반 난항을 겪은 레드불 팀. 더불어 오늘 레이스에서도 페라리에게 당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순간이었다. 피트 레인 맞은편으로 선두를 달리는 페라리카의 굉음이 호너의 귓가를 때렸다.
***
“파이널 랩 직전! 페텔과 해밀턴의 차이는 이미 6초 이상! 페라리의 시즌 첫 우승이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서준하! 페라리의 슈퍼 루키가 포디엄 안정권을 달리며 피니시 라인을 향해 질주합니다!”
리카르도의 리타이어 이후 조용해진 맬버른 서킷. 브라밤 스탠드 주변 새빨간 티포시들만이 환호를 질러댔다.
“17시즌 화려한 부활을 예고했던 페라리가 개막전에서 첫 우승을 차지합니다!”
파이널 랩을 끝으로 선두로 체커드 플래그를 맞는 페텔. 지난 시즌 한 차례도 우승이 없었던 페라리 팀이 7년 만에 개막전 우승을 차지했다.
“해밀턴의 뒤로 또 다른 페라리카! 코리안 드라이버 서준하가 피니시합니다!”
경쟁 후보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3위에 피니시한 서준하. 홈 스트레치 주변을 서행하며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던 팀원들이 이제는 환호를 보내는 보습을 발견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레이스를 마치고 파크 퍼미에 도착한 선수들. 1위와 3위 주차 구역에 차량을 멈추고 등장한 페라리 드라이버들에게 팀원들이 달려들었다.
승리 세레머니를 보기 위해 검차대로 모여드는 사람들. 그 주변으로 수많은 취재진이 헬멧을 벗은 페텔과 서준하의 모습을 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늘은 페라리의 날입니다...!”
팀원들과 자축하는 드라이버들을 바라보며 인터뷰에 나선 아리바베네 감독. 그의 감격스러운 얼굴이 고스란히 전 세계에 방송됐다.
“개막전은 우리 팀의 확실한 패배입니다. 그냥 단순히... 오늘은 페라리가 가장 빨랐습니다.”
동시에 근처에선 메르세데스의 수장 테오 울프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경기 내내 심각했던 그의 표정은 레이스가 끝나고도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테스팅 주행부터 페라리의 시즌 초반 기세가 무섭습니다. 게다가 오늘 10점 차로 앞서며 앞으로도 페라리의 부활을 예측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 같은데요. 한 말씀 해주시죠, 테오!”
포뮬러 원을 포함한 모든 스포츠엔 기세라는 게 분명히 있다. 오늘 우승으로 페라리가 상승 분위기에 탄 것으로 보이는데,
“차이나 GP만큼은 메르세데스가 최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라운드 선두는 우리 팀 선수들이 가져갈 것으로 확신합니다.”
오늘의 패배 속에서도 엄청난 자신감을 드러내는 테오. 그런 자신감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데,
“해밀턴의 6년 연속 폴포지션을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20개의 서킷을 통틀어 차이나 GP에서만큼은 극강의 모습을 보여준 로이스 해밀턴. 덕분에 테오는 큰 걱정이 없었다. 마침 그의 주변으로 서준하가 지나가는데,
‘6년 연속 폴포지션?’
서준하의 기억으론 17시즌 해밀턴은 그 기록을 달성하며 F1 드라이버로선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을 거야, 메르세데스.’
이번 생은 다르다. 또 다른 차이나 GP의 최강자가 페라리로 돌아왔으니까.
< 이젠 그것도 어느 정도 보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