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달리는 걸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지 >
“포뮬러 원 투나잇, 오늘도 힘차게 달려보겠습니다!”
방속국 MBD의 스튜디오. 17시즌 F1의 2라운드 예선이 끝난 저녁, 인기 스포츠 아나운서 김민아와 최별이 포뮬러원의 리뷰 프로그램 녹화를 위해 카메라 앞에 앉았다.
“오늘 많은 분들이 놀라셨을 텐데요. 시즌 시작 2라운드 만에 정말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맞아요, 현재 국내 분위기가 굉장히 뜨거운데요. 우리의 서준하 선수가 포뮬러원 생애 첫 폴포지션 달성했습니다! 와아!!”
F1 중계방송 편성은 물론, 전문적인 포뮬러원 리뷰 방송까지 등장한 상황. 서준하의 데뷔전 이후 MBD에선 본격적으로 포뮬러 원에 대한 프로그램을 늘리기 시작했다.
“최별 아나운서, 오늘 퀄리파잉 시청률이 얼마나 나왔는지 아세요?”
“SNS에도 방송 보셨다는 분들이 많으셨는데, 어땠나요?”
“놀라지 마세요. 평균 시청률이 무려 0.89 퍼센트를 기록했습니다! 정말 엄청나지 않습니까?”
“0.89 퍼센트요?!”
“게다가 서준하 선수의 Q3 두 번째 어택의 순간 시청률은 1.5프로가 넘었구요!”
정규 시즌 메이저리그 시청률보다 더 높은 기록. 서준하가 Q1, Q2 빠른 기록을 보이며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Q3 어택에선 절정을 이뤘다. 모터스포츠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챔피언의 기록을 저지하려는 한국인 레이서의 질주는 좀처럼 눈을 떼기 힘든 것이었다.
“생애 첫 폴포지션! 못 보셨던 분들을 위해, 다시 봐도 감동적인 그 순간을 위해 저희가 준비했습니다! 자, 화면으로 만나보시죠!”
스펙터클한 영상과 함께 등장한 상하이 서킷. 첫 번째 어택을 마치고 그대로 스피드를 살려 두 번째 어택에 들어가는 서준하의 질주가 등장했다. 동시에 놀란 표정의 메르세데스 피트와 인 랩을 도는 해밀턴이 등장했고, 열광하는 한국팬들이 화면 중간중간 모습을 비췄다.
“시즌 시작 전 가장 준비를 많이 했던 곳이 차이나 GP였고, 연습 주행부터 Q2까지 컨디션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첫 어택에서 잠정 폴 기록에 미치지 못할 걸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멈추지 않고 두 번째 어택을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등장한 서준하의 인터뷰 장면. 수많은 취재진에 둘러싸인 그가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폴포지션 소감을 비췄다. 갑작스럽게 커다란 관심을 받게 된 상황에서도 그는 자만하지 않고, 겸손한 태도로 인터뷰에 응했다.
“관심 폭발이군요. 오늘은 정말 같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운 날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말, 서준하 선수는 말도 잘하세요. 어쩌면 생애 첫 기록 덕분에 들뜬 마음일 텐데도 그게 잘 드러나지 않네요..!”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 중 하나인 만큼 취재진의 규모는 엄청났다. 여러 국내 언론은 물론, 해외 각 지역을 대표하는 채널들의 마이크 수십 대가 서준하 주변을 둘러싼 모습은 장관이었다.
“자, 그러면... 이번에는 김세창 선수와 함께 오늘 퀄리파잉 짚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할까요?”
어느 정도 녹화를 마치고 방송은 휴식에 접어들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메인 PD 곁으로 최별이 다가서는데,
“잘 나오고 있죠, PD님?”
“응, 아주 좋아. 오늘 진행 진짜 술술 넘어간다.”
“진짜 오늘 예선전 보면서 엄청 감동 받았어요. 제가 받은 느낌 그대로 카메라 앞에 표현하고 싶었는데... 다행이네요.”
사실 모터스포츠를 잘 모르기에 프로그램 시작부터 걱정이 많았던 최별. 하지만 연이은 한국 선수의 선전으로 점점 포뮬러원에 빠지게 됐고, 오늘 처음으로 굉장히 짜릿한 순간을 맛보게 됐다.
“아무래도 반응이 좋으니까, 위에선 편성 시간을 더 늘리라고 하시네? 하이라이트 말고도 따로 포뮬러원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대.”
포뮬러원이 인기를 얻어가면서, 연예인 프로레이서들도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보다 더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방송국은 이들과 함께 또 다른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를 계획했다.
“메이저 리그의 플레이백 같은 방송 시스템을 도입하는 건 어때요? 확실히 모터스포츠는 다뤄볼 것들이 많잖아요.”
“응, 그건 나도 고민 중이야. 서준하 선수가 이렇게만 계속 타준다면, 윗선에서도 더 과감한 투자가 들어올 테니까, 그때까지 좀 기다려봐야지.”
현장에서 벌어지는 순간순간의 플레이를 3D 화면을 통해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플레이백 시스템. 연간 2억 원이 넘는 임대료와 유지보수비 덕분에 PD 혼자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국내 분위기로 봐서는 조만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은데,
“뭔가 시청자분들한테 F1을 제대로 보여드리고, 알려드려야겠다는 사명감이 커진 것 같아요.”
“그래 맞아, 나도 PD 생활하면서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처음이니까.”
한 어린 선수의 성공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 한국 모터스포츠의 판이 서서히 뒤바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
상하이 서킷에 위치한 프레스 룸. 준비된 스테이지로 세 명의 선수가 취재진 앞에 앉았다.
“이번 차이나 GP에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계시는 것 중 하나가, 내일 레이스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추월이 나올 수 있을지 다들 궁금해하시거든요?”
지난 호주 GP에서 추월이 거의 나오지 않았고, 상하이 서킷의 백스트레이트는 유명한 추월 포인트이기에 많은 팬들이 추격전에 관심을 보였다.
“13턴 이후 DRS 포인트에서 레이스 초중반 많은 추월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레드불의 경주차는 롱런 페이스가 좋습니다. 최대한 경쟁 구도를 끌고 가 레이스 후반 선두권으로 올라설 겁니다.”
질문에 가장 먼저 답하는 포스 인디아의 루키 드라이버 오콘. 그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뒤이어 곁에 앉은 또 다른 루키, 막누스도 답변을 내놨다.
“...사실 상하이의 추월 포인트는 많습니다만, 프론트 타이어 손상이 가장 심한 서킷입니다.”
잠자코 지켜보던 서준하에게 시선이 향하자, 그도 마이크를 드는데,
“잦은 언더스티어가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앞차에 바짝 붙기가 상당히 어렵죠. 아마 드라이버의 타이어 관리 능력에 따라 추월 성공 가능성이 좌우될 것 같습니다.”
추월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앞선 두 선수가 막연한 자신감만을 드러낸 반면, 마치 F1 전문 해설가와 같은 분석적인 답변을 꺼내놓는 서준하. 많은 취재진들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리포트를 써내려갔다.
“서준하 선수에게 질문드리겠습니다. 차이나 GP 폴포지션을 따내셨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중국 최강자 해밀턴의 우승을 점치고 있는데요.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통계적으로 해밀턴의 중국 GP 포디엄 피니시 확률은 70%가 넘는다. 그와 챔피언 경쟁 구도에 오른 어느 누구도 차이나 레이스에서 그를 꺾지 못했기에, 루키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메르세데스의 숏런 퍼포먼스는 상하이에서 많은 장점이 있죠. 특히나 현재 정점에 오른 선수가 해밀턴 선수고요...”
서준하 역시 예상했던 질문. 다소 거슬리는 질문에도 덤덤한 표정으로 차분히 얘길 꺼내는데,
“하지만 장기전인 레이스에선 얘기가 다릅니다. 호주 GP에서 페라리카는 엄청난 롱런 페이스를 보여주며 우승했고, 이번 퀄리파잉에서도 폴포지션을 따내며 숏런 페이스 역시 향상됐음을 증명했습니다...”
다시 한번 분석적이고, 사실에 근거한 말들. 폴포지션이라는 기록에 더해 오늘 여러 번 취재진들을 놀라게 하는 서준하인데,
“차이나 GP, 페라리의 더 강력해진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17시즌 대대적인 차량 업데이트로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는 페라리 팀. 어딘가 힘이 들어간 서준하의 마지막 답변과 함께 회견장이 고요에 잠겼다.
***
“이제 각 팀 경주차들은 스타팅 그리드에 위치해주시기 바랍니다.”
차이나 GP 레이스 시작 30분 전, 오전부터 내리던 비가 점점 그치기 시작했다. 여전히 구름은 낮았고, 안개는 가득했다.
“노면이 생각보다 많이 말라 있다.”
페라리 팀 피트를 빠져나와 스타팅 그리드에 맨 앞에 올라선 서준하. 피트레인부터 홈스트레치까지 이동하는 잠깐 사이 노면의 컨디션을 체크했다. 완전히 젖었을 것으로 예상했던 트랙은 생각보다 드라이했다.
“마지막으로 기상 체크 좀 해봐, 롭.”
-변함없어. 이제 비는 완전히 그쳤다.
그리드 위로 다른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자신의 타이어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인터미디어트 타이어를 장착한 모습을 포착했다.
“흠...”
그리드 주변으로 페라리 팀 미캐닉들이 최종 점검을 하는 동안 서준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옆으로 등장한 해밀턴의 실버 애로우. 그가 장착한 타이어가 가장 먼저 서준하의 눈에 들어왔다.
“다행입니다. 이제 비가 완전히 그친 것 같고요. 현재 기온은 12.5도 트랙의 온도는 24도 가까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선 타이어 온도가 쉽게 오를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속도감 있는 레이스가 나올 것 같진 않군요.”
우천이나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타이어 룰은 변경되는데, Q3 진출자도 웨트나 인터미디어트 타이어로 변경 가능하다.
이어서 등장하는 경주차들의 타이어. 오늘 레이스에서도 모든 선수가 인터미디어트를 장착한 모습이었는데,
“와, 빨간색입니다. 해밀턴 선수는 슈퍼 소프트를 끼고 나왔군요.”
나 홀로 퀄리파잉에서 쓰던 슬릭 타이어를 끼고 나온 로이스 해밀턴. 가장 뒤늦게 그리드로 올라온 걸로 봤을 때, 출발 전 갑작스럽게 타이어를 바꾼 게 분명했다. 그의 타이어가 중계 스크린에 등장하자, 메르세데스 팬들이 환호가 쏟아져나왔다.
“엄청난 자신감입니다, 해밀턴. 지금 노면 컨디션으론 스타팅 그리드에서 충분히 수막현상이 일어날 만한데요.”
“그렇죠, 후회만 남을 선택이 될... 엥?!”
열정적으로 슬릭 타이어의 위험성을 설명하던 해설자. 중계 화면을 보고는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하는데,
“...!!!”
“서준하가 피트로 복귀합니다...!!!”
레이스 출발 전. 갑작스럽게 페라리 피트로 돌아서는 서준하. 보기 드문 광경에 중계진이 할 말을 잃었다. 중계 카메라가 계속해서 서준하의 경주차를 따라가는데,
“와...!”
피트 박스에 서준하가 멈춰 서자, 십여 명의 미캐닉들이 재빠르게 타이어를 들고 나타났다.
“레이스 시작 직전! 서준하가 슈퍼 소프트 타이어로 교체합니다!”
몇몇 선수들도 서준하와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시작 전 경주차를 움직이는 일이 평정을 잃게 만들까 두려웠고, 현재 노면 컨디션에 대해 불확실했기 때문. 하지만,
‘분명 앞으로 열 바퀴면 노면은 분명히 말라버린다.’
서킷은 금방 드라이해질 거다. 스타트와 초반만 잘 버텨내면 되는 상황. 지금은 결단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달리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둘 순 없지.’
조금 전 해밀턴의 타이어가 떠올랐다. 교체를 마치고 복귀하는 서준하. 챔피언과의 배틀을 위해 다시 가장 첫 번째 그리드에 멈춰섰다.
< 네가 달리는 걸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