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드라이버는 아니야 >
“보세요. 저렇게 코스 중간중간 물웅덩이가 있습니다. 특히 해밀턴과 서준하 두 선수가 주의해야 할 구간이 있군요. 다소 위험해 보이긴 합니다.”
레이스 시작 전 포메이션 랩을 도는 선수들. 슬릭 타이어를 끼고 출발한 두 선수를 두고, 해설진이 걱정스러움을 드러냈다. 특히나 고속 주행에서 수막현상이 발생할 경우 대부분 엄청난 사고로 이어졌기 때문인데,
“사실 해밀턴이 SS로 바꾼 건 폴포지션을 놓치면서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하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았어요. 선두가 인터미디어를 끼고 나올 게 분명하니까, 아마 초반 배틀에서 확실한 우위를 가져가려고 했던 거겠죠.”
게다가 현재 트랙 상황으로 봤을 때, 물웅덩이만 잘 피해간다면, SS 타이어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해밀턴에 이어 서준하의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히고,
“현재 타이어 상태로만 놓고 봤을 땐 서준하가 해밀턴보다 불리한 건 사실입니다. 퀄리파잉에서 플라잉 랩을 한 바퀴 더 달리면서 마모가 더 심해졌을 테니까요.”
“네, 맞아요. 서준하가 교체 없이 인터미디어를 끼고 달렸다면, 확실히 해밀턴에게 초반 선두를 내줄 가능성이 높았을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슬릭을 꼈다는 건 다소 위험한 주행을 감수하겠다는 것에 더해 해밀턴보다 불리한 컨디션을 선택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짧은 순간 여러모로 서준하도 고민이 많았을 거예요. 아무튼 그래도 페라리와 서준하는 SS를 선택했습니다.”
완전히 젖은 노면 컨디션이 아니라면, SS와 인터미디어 타이어의 속도 차이는 아주 크다. 어느 쪽으로든 쉽지 않은 상황에서 서준하가 결단을 내렸다. 이제 포메이션 랩을 마친 선수들이 스타팅 그리드에 멈춰서고,
“이렇게 되면, 오늘 레이스 관전 포인트는 스타트와 초반 몇 바퀴가 될 것 같습니다. 타이어 특성상 프론트 로우에서 스타트 미스가 나올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그렇죠. 하지만 스타트와 초반 한두 바퀴만 지나면 뒤따라오는 선수들과 확연히 다른 스피드를 보일 건 분명합니다. 자, 이제 하나둘 신호가 들어오기 시작하는데요...!”
고요히 경주차들의 엔진음이 울려 퍼지는 상하이 서킷의 홈스트레치. 출발 직전 엄청난 긴장감이 스타팅 그리드를 맴돌았다. 5개의 신호등으로 모두 불이 켜지고,
“라이트 아웃!!!”
고요했던 그곳이 경주차들이 내뿜는 굉음으로 가득 울려퍼졌다. 그리고,
“선수들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옵니다!”
“다행히 서준하와 해밀턴의 실수는 없는 것 같은데요. 아!!!”
순식간에 스모그와 물안개로 뒤덮여버린 홈스트레치. 선두의 출발을 중계하던 해설자가 소리를 지르고,
“페텔! 페텔이 앞으로 치고 나옵니다!”
“스타트 실수는 여기서 나오네요! 막누스가 출발 타이밍을 놓치고 맙니다...!”
실수는 슬릭 타이어를 낀 두 선수가 아닌 막누스에게서 나왔다. 타이어가 수막현상을 일으킨 것도, 엔진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가끔씩 불안한 스타트를 보여준 그는 힘들게 올라섰던 3위 그리드에서 빠르게 추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페라리의 페텔이 3위로 올라섭니다! 환호하는 페라리 피트!”
“오늘 레이스 첫 270도 코너에 진입하는 선두의 서준하! 그 뒤로 해밀턴과 페텔이 따라붙습니다!”
많은 언론이 루키 드라이버들을 저평가하는 건 그들의 주행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포디엄에 오를 정도로 강한 포텐셜을 가진 막누스였지만, 가끔씩 저렇게 어이없는 실수로 레이스를 말아먹는다.
하지만 서준하는 달랐다. 레이스 스타트만 수천 번했다. 전생부터 이어져 온 차분한 준비 과정 덕분에 이번 생 포뮬러 입문부터 스타트 미스 한 번 내지 않은 베테랑이다.
‘온다...!’
윙미러로 보이는 시작부터 바짝 붙은 메르세데스의 경주차. 평소보다 웨트한 노면이기에 적응이 필요해 보였지만, 시작부터 거세게 몰아붙일 생각인 것 같았다.
‘벌써?’
더불어 해밀턴 뒤로 또 다른 페라리카가 눈에 들어왔다. 막누스와 접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일찍 페텔이 해밀턴의 뒤를 쫓았다. 만족스러운 상황에 서준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앙.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최대한 해밀턴의 어택을 막아내는 일. 트랙의 상황을 파악한 서준하가 서서히 스피드를 높여나갔다.
***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F1 스폰서십에 대한 얘기입니다.”
한국에 위치한 RG 그룹의 부회장실. 경영전략팀 사장 홍범용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번에는 포뮬러원 팀 스폰서십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부회장님.”
“F1은 투자한 만큼 효과를 못 봤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던데, 자네가 조사한 내용은 다른가?”
“말씀하신 대로 수동적인 로고 노출만으로 어마어마한 효과는 없었지만, 해외에서만큼은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RG 그룹은 지난 2008년부터 5년간 F1 월드 챔피언십의 스폰서십으로 있었다. 홍범용 사장이 차분하게 얘길 꺼내는데,
“말씀드렸다시피, 이번에 제안 드릴 내용은 대회 전체가 아닌 F1 팀에 대한 스폰서십입니다. 과거 진한 그룹이 르노 팀과 맺었던 스폰서십과 유사한 형태입니다.”
“잘 알지. 그것도 결과적으론 능동적인 마케팅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네만.”
“맞습니다. 아무래도 팀의 타이틀 스폰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약이 컸을 겁니다. 하지만 타이틀 스폰서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차원이 다른 마케팅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F1팀은 대략 20개 이상의 스폰서를 갖고 있는데, 그중에서 한 기업이 팀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여지는 크지 않다. 하지만 타이틀 스폰서는 경주차 리버리는 물론, 팀 유니폼에 커다란 로고 노출과 팀의 공식적인 자리마다 해당 기업의 이름이 거론될 기회를 갖는다.
“과거 레드불 팀의 타이틀 스폰서 인피니티가 그랬지요. 레드불이 성공가도를 달릴 당시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인피니티를 떠올렸습니다. 이밖에도 많습니다.”
“흠... 계속해보게.”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메르세데스의 타이틀 스폰서)는 F1 팀을 필두로 자국에서 매년 엄청난 이벤트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들로 봤을 때, 타이틀 스폰서가 된다는 건 F1 팀을 스폰서들의 입맛에 맞게 주무르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홍범용의 얘기를 끊지 않고 듣는 부회장. 들을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듯 귀 기울이는데,
“과거와는 다릅니다. 한국인 F1 드라이버가 나왔지 않겠습니까? 국내에서도 지금보다 더 큰 관심을 받을 게 분명한 상황이고요.”
최초의 한국인 F1 드라이버가 탄생한 우리나라의 모터스포츠 판은 급변하고 있었다. 현재 몇몇 기업들이 F1 팀 스폰서십에 관심을 보였고, 몇몇 기업의 실무선에선 검토가 이뤄졌다는 소문이 있었으니까.
“흠... 이전과 다르긴 하지. 회장님과 한 번 말씀드려보겠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부회장님. 한 번 검토해주셨으면 합니다.”
부회장에게 인사를 마치고 물러서는 홍범용. 이제 더는 한국 기업의 F1 팀 타이틀 스폰서십은 꿈같은 이야기만은 아니다. 남은 문제는 이렇게 판이 바뀐 상황에서 그룹의 총수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의지가 있는가 하는 점뿐이었다.
***
-조금만 더 거릴 좁혀, 로이스!
스타트 이후 두 바퀴가 지나갔다. 이제 DRS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레이스 엔지니어 보노가 해밀턴에게 좀 더 타이트한 주행 오더를 내렸다.
부와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앙.
페라리의 루키는 스타트 미스 없이 초반 두 바퀴를 안정적으로 버텨냈다. 젖은 노면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충분히 실수가 나올 만도 했지만, 해밀턴의 예상과 달랐다. 결국 두 바퀴 안에 추월하려고 했던 계획이 틀어졌고, DRS를 이용한 추월을 노려야 했다.
‘평범한 드라이버는 아니야.’
사실 해밀턴은 페라리는 물론, 뒤따르는 모든 경쟁자의 허를 찌를 의도로 타이어를 바꿨다. 하지만 곧바로 대처하는 서준하의 모습에 오히려 자신이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앞차와의 간격 1.24초! 조금만 더 붙어봐!
선두는 DRS를 쓸 수 없기에 이제 해밀턴의 추월 가능성은 굉장히 높아졌다. 매턴 조금씩 초를 줄여나간 해밀턴이 점점 DRS 사정권에 들어왔다. 그리고,
“DRS ON!!!”
두 바퀴 동안 서준하의 뒤에서 전전긍긍하던 해밀턴이 DRS를 켜고, 서준하의 뒤를 빠른 속도로 달렸다.
-무조건 안쪽을 따내야 해...!
1턴 진입 직전 DRS 존에서 해밀턴이 서준하의 슬립스트림에 들어갔다. 두 바퀴 내내 서준하의 뒤를 달리는 상황에서 굴욕감을 느꼈던 해밀턴. 앞차와 부딪히기 직전까지 밀어붙이며 순식간에 옆으로 튀어나오는데,
-...!!!
“...!!!”
끼이이익.
우측으로 꺾이는 270도 1턴에 진입하는 도중 해밀턴이 예상보다 이른 타이밍에 빠르게 브레이크를 잡았다.
“하필...!”
해밀턴이 파고들 공간으로 물웅덩이가 있었다. 그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서준하가 먼저 1턴을 돌기 시작했다.
-괜찮아, 아무 생각 말고 다음 DRS 존까지 계속 좁혀라, 로이스
기다렸던 추월이 실패했다고 상심한 건 아니다. 다만 조금 전과는 다른 감정이 끓어오를 뿐이었다.
“이런 XX!!”
최대한 이른 타이밍에 선두로 치고 나가 SS 타이어의 효과를 보려고 했던 해밀턴. 본래 계획과 다르게 네 번째 랩을 시작했다.
선두 차의 디펜스 플레이는 영리했다. 곳곳에 놓인 물웅덩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며, 좀처럼 해밀턴이 치고 나올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런 어린 루키의 주행은 시간이 흐를수록 해밀턴의 분노를 더 크게 키웠다.
“또다시 해밀턴의 어택을 막는 서준하! 쉽게 선두 자릴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입니다!”
“두 선수의 배틀이 치열한데요. 아, 이렇게 되면 초반 SS 타이어를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두 선수가 어느 정도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현재 드라이해진 노면의 상황으로 볼 때, 트레드 폭이 좁은 인터미디어 타이어의 마모도도 높아질 수밖에 없지만, SS 타이어는 그보다 더하다.
“이젠 페텔이 해밀턴과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선두 자릴 두고 3강 구도가 만들어질 것 같은데요!”
초반 뒤차들과 격차를 벌리던 서준하와 해밀턴이 배틀 이후 급격히 떨어진 랩타임으로 경쟁자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부와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앙.
어느덧 10랩을 마친 서준하에게 피트인 오더가 떨어졌다. 타이어를 최대한 사용해도 되는 상황에도, 서준하는 여전히 해밀턴이 치고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 일에만 치중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이번 레이스 서준하가 치고 나가지 않은 건 자신의 타이어가 훨씬 불리한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부터 속도를 내고 달렸다면, 해밀턴도 뒤차들과 격차를 더 벌리게 됐을 거다.
그렇게 해밀턴이 자신을 추월하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자신보다 빠른 속도로 몇 바퀴 더 달릴 걸 알기에, 처음부터 서준하는 해밀턴을 막는 선택을 했다.
“분주한 페라리 팀 피트! 서준하가 피트 스탑할 것 같습니다!”
“아! 페텔이 어느새 해밀턴과 가까워졌습니다!”
서준하의 전방으로 피트 레인 입구가 보였다. 이전보다 속도를 더 줄이며 절묘하게 해밀턴의 진로를 막아섰다. 그리고,
“기가 막힌 타이밍! 서준하가 피트레인에 들어감과 동시에 페텔은 해밀턴의 슬립 스트림에 들어갑니다!”
속도를 내지 못한 채, 또 한 번의 랩을 시작하는 해밀턴. 팀이 원하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만든 서준하가 미캐닉들의 품으로 향했다.
< 평범한 드라이버는 아니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