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차 속도가 떨어진 거야 >
“34랩, 페텔이 피트 인 합니다!”
“오래도 버텼네...”
경쟁 팀의 상황을 보고받은 메르세데스의 수장 테오. 두 바퀴를 마치고 곧바로 인터미디어에서 소프트로 변경했던 페텔이 평균보다 일곱 바퀴가량 더 많은 랩을 마치고 피트로 들어가는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남은 스물두 바퀴도 타이어 한 세트로 소화할 것 같네. 우리한텐 레이스 후반 몇 바퀴 그리고, 지금이 기회야.”
곁에선 라우다 역시 페텔의 타이어 관리 능력에 놀라움을 표시하며 해밀턴에게 기회가 왔음을 포착했다.
“보노, 40랩에서 타이어 체인지 예정이다. 남은 여섯 바퀴 최대한 앞으로 나가도록 만들어.”
팀 컨트롤타워의 오더를 주시하던 해밀턴의 엔지니어 보노가 드라이버에게 기회를 잡으라는 오더를 내렸다. 멀찍이 선두를 달리던 페텔이 서킷에서 사라지고, 이제 해밀턴 앞에 남은 건 또 다른 페라리 드라이버 서준하. 피트 스탑을 뒤늦게 했을 뿐 실력 차가 지금의 순위를 만든 건 아니기에 금방 선두에 올라설 해밀턴의 모습을 기대됐다.
“서준하와 배틀 스타트! 섹터 2 해밀턴의 페이스가 좋습니다!”
“어서 치고 나와, 로이스!!!”
지난 퀄리파잉에 이어 레이스 중반이 넘도록 페라리에게 밀렸던 메르세데스 팀. 심기가 불편했던 스태프들이 서준하를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고 덩달아 흥분했다. 오더를 받은 해밀턴도 조금씩 서준하를 따라잡는데,
“DRS! DRS! DRS!!!”
13턴을 빠져나오며 페라리카의 리어윙으로 돌진하는 해밀턴. DRS 작동시키며 서준하의 슬립스트림에 들어갔다. 그리고,
“예쓰!!!”
“계속 치고 나가!!!”
상하이 서킷의 백스트레치는 상당히 길기 때문에 DRS를 작동 시 대부분 앞차를 추월할 수 있다. 앞차와 닿을 듯했던 해밀턴이 순식간에 우측으로 튀어나오며 서준하를 앞질렀다.
이어지는 14턴부터 마지막 턴까지 우위를 가져가는 해밀턴. 스타트 라인을 통과하며 페텔이 빠진 지금 오늘 레이스 처음으로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격차를 더 벌려야 해. 안 그러면 피트 스탑 이후에 무조건 막힐 거야.”
“보노, 타겟 플러스 4. 그때까지 타이어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달리라고.”
지금 선두를 잡았다고 승리한 건 아니다. 해밀턴은 한 번의 타이어 체인지를 더 남겨둔 상황이고, 페텔은 앞으로 교체 없이 계속 달릴 테니까. 따라서 지금 해밀턴은 최대한 격차를 벌려야 했다. 그런데,
“또?!”
“...!!!”
전속력으로 홈스트레치를 달리는 해밀턴의 뒤로 따라붙는 그림자. 백스트레치에서 밀렸던 서준하가 어느새 또 한 번 해밀턴의 뒤에 붙었다. 그렇게 홈스트레치 DRS 존에 들어가는데,
“무조건 막아! 로이스!!”
“...!!!!”
선두는 백마커가 없는 이상 DRS를 사용할 수 없다. 이번에는 DRS를 작동한 서준하가 해밀턴의 리어윙으로 돌진했다.
“왼쪽!!!”
서준하가 뒤에 붙은 순간 디펜스를 위해 왼쪽 진로 변경을 택한 해밀턴. 절체절명의 순간 메르세데스 피트에 엄청난 적막이 흐르는데,
“...”
쏜살같이 우측으로 튀어나오는 서준하. 1턴 진입에서 유리한 위치인 왼쪽이 아닌 오른쪽을 택하며 해밀턴의 허를 찔렀다.
“다시 해! 다시!!”
또 한 번의 재추월에 적막이 흘렀던 메르세데스 피트. 흥분한 테오의 목소리만이 팀 피트월에 울려 퍼졌다.
***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해밀턴의 앞으로 또다시 등장한 페라리카. 자신이 타이어를 최대한 쓴 만큼 페라리의 루키도 필사적이었다. 여태껏 추월 이후 또 한 번 자신을 재추월한 드라이버는 몇 명 없었기에 방심했던 것 같았다. 전방의 루키를 두고 해밀턴의 화가 다시 끓어올랐다.
‘이번에도 틀어막겠다는 건가.’
재추월 이후 앞차는 교묘하게 페이스를 낮추고 있었다. 분명 타이어 체인지를 마친 페텔이 뒤쫓고 있을 게 뻔해 보였는데,
-로이스 박스, 박스, 타이어 체인지
최대한 밀고 나갔어야 할 네 바퀴, 해밀턴은 서준하와 추월을 주고받다가, 결국 예정했던 피트 스탑에 먼저 들어가며 씁쓸히 앞차를 보내주게 됐다.
“Go! Go! Go!”
피트 스탑에 들어간 해밀턴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다. 아마 어제 퀄리파잉 이후 페라리를 신경 쓰느라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종료까지 열여섯 바퀴 남은 상황. 이보다 더 힘든 레이스도 여러 번 우승했던 경험을 되살리며 해밀턴이 피트를 나섰다.
-서준하 41랩 피트 레인 진입. 현재 선두는 페텔. 출구 근처로 막누스와 보타스가 접근 중이다
피트에 들어간 서준하와 다시 배틀을 벌이기까지 홀로 달릴 수 있는 지금 여기서 최대한 앞질러야 한다. 제한 속도로 피트 레인을 빠져나가는 해밀턴. 무전으로 현재 서킷의 상황을 전달받으며 온 신경을 스로틀에 집중하는데,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서킷에 다시 오르자마자 순식간에 스피드를 높였다. 전방으로 피트 스탑에 들어가지 않은 레드불의 경주차가 보이는데,
‘나와라, 꼬맹아.’
페텔에게 압박을 줘야 할 지금, 막누스는 시시한 장애물에 불과했다. 시작부터 과감하게 달려드는 해밀턴. 1턴 진입과 동시에 막누스의 옆으로 프론트 노즈를 밀어 넣는데,
쿵.
막누스와 해밀턴의 프론트 타이어가 접촉하며 경주차 두 대가 흔들렸다. 두 선수 모두 주춤했지만, 우측 코너의 안쪽을 물고 들어온 해밀턴이 다음 코스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그리고,
“비키랬잖아, 이 XX!!!”
다시 한번 앞으로 나오려는 막누스의 진로를 막아서자, 레드불 경주차가 주춤하며 물러났다. 피트 레인 출발과 동시에 홈스트레치에서 가속을 붙여나온 막누스를 기어코 제쳐버린 해밀턴. 그의 과감한 드라이빙에 상하이 서킷의 갤러리들이 열광했다.
“해밀턴이 막누스를 제치고 2위 자리에 올라섭니다!”
“이제 다시 페텔을 추격하는 해밀턴! 과연 선두에 다시 오를 수 있을지...!”
장애물을 벗어난 해밀턴의 앞으로 페텔의 리어윙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한 숏런이 장점인 그가 트래픽이 없는 상황에 앞차와 격차를 좁히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챔피언에 오르고부터 레이스 운용과 디펜싱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사실 영드라이버 시절부터 가장 자신 있는 건 이런 상황에서 격차를 좁히는 일이었다.
“13턴을 빠져나오는 페텔과 해밀턴. 두 선수의 격차는 2.4초 아래!”
“이렇게 되면 다음 바퀴나, 빠르면 곧바로 다음 DRS존에서 해밀턴이 선두를 노려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메르세데스 팀 선두 탈환에 서킷 모두의 시선이 페텔과 해밀턴에게로 향하고,
“스타트 라인을 통과하는 두 선수! 격차는 1.23초!!!”
“해밀턴 거의 다 따라왔어요...!”
“아!!!”
두 선수의 1턴에 진입 직전 갑작스럽게 해설자가 소릴 내지르고,
“서준하! 서준하가 나옵니다!!”
피트레인 출구와 이어진 1턴 진입 직전 코스. 해밀턴이 기회를 잡은 순간, 다시 한번 서준하가 등장했다.
“서준하가 해밀턴 옆으로 가까워집니다!!!”
등장과 동시에 해밀턴과 나란히 달리는 서준하. 1턴 진입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배틀에 들어갔다.
***
“와아아아아아!!!”
“타이밍 예술이야!!!”
서준하가 피트를 나서면서부터 엄청난 긴장감에 휩싸였던 페라리 피트. 피트레인 출구를 나섬과 동시에 페텔과 해밀턴 사이에 쏙 들어간 서준하의 모습에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피트 스탑이 조금 늦었던 건가...’
환호하는 팀원들 사이에서 무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는 안토니오치. 사실 서준하가 페텔의 앞을 달릴 것 같았다. 하지만 타이어 교체가 그리 빠르진 않았는지 그의 예측이 빗나가는 상황이 연출됐다. 이내 그런 곤란한 상황과 해밀턴의 뒤를 달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며 후반으로 치닫는 레이스를 지켜봤다.
‘레이스 시작에서 해밀턴과 타이어만 동일한 조건이었다면, 지금 선두는 분명 준하였겠지.’
오늘 레이스에서 서준하는 자신이 분명 해밀턴과 충분히 대적할 만한 아니, 어쩌면 퀄리파잉에서 보여준 실력대로 그보다 더 뛰어난 실력자일지도 모른다. 그저 현재 팀 내 서준하의 위치가 다소 안타까울 뿐이었는데,
‘이제 마지막만 잘 버텨서 오늘 레이스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또 한 번 기대에 찬 눈빛으로 서준하의 드라이빙을 바라보는 안토니아치. 그의 주변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한 엔지니어들의 모습이 보였다.
“파이널 랩까지 다섯 바퀴 남았습니다!”
“때가 왔구만. 이제 진짜 마지막이야!”
시간은 계속 흘러 이제 52번째 랩을 시작하는 선수들.
“페텔! 51랩 피니시!”
“이전 바퀴와 랩타임 격차는?”
“예상대로입니다. 0.24초가량 떨어졌습니다!”
“...”
계속되는 추격전에 긴장감이 돌던 페라리 피트. 팀이 예측하고 있던 마지막 위기 타임이 도래하자 분위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해밀턴! 이번 랩 준하와의 격차를 0.2초 앞당겼습니다. 이렇게 줄여진다면, 다음 DRS존에서 사정권에 들어올 것 같습니다!”
페텔의 뒤에 바짝 붙은 서준하를 추격하는 해밀턴. 기회가 온 걸 직감한 듯 마지막 대역전극을 위해 또다시 추격을 시작했다.
‘준하... 최대한 버텨주게. 분명 오늘 레이스는 역사에 남을 거야...!’
여지껏 상하이에서 이렇게까지 메르세데스와 치열했던 적은 없었다. 쫓기는 페라리로선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레이스. 이제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결과 앞에 안토니아치가 팀의 루키에게 희망을 걸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서준하의 윙미러로 이전 바퀴보다 더 가까워진 해밀턴의 경주차가 보였다. 그와 동시에 팀라디오로 날아든 롭의 무전.
-랩타임이 떨어졌다, 준하야. 마지막까지 집중해!
50바퀴 내내 달렸던 드라이버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 롭이 그 어느 때보다 힘찬 목소리로 서준하를 불러세우는데,
“아니, 내가 아니고 페텔이야. 앞차 속도가 떨어진 거야!”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다. 서준하가 느린 건 타이어가 먼저 한계에 달한 페텔 때문. 앞차의 페이스를 맞추며 달리고 있기에 그 영향은 서준하의 랩타임에도 반영됐다.
-...온다!!!
파이널 랩까지 한 바퀴 남은 상황. 조금씩 서준하와의 간격을 좁히며 DRS 사정권에 들어온 해밀턴이 백스트레이치 DRS 존에 들어갔다. 그리고 앞차를 향해 돌진을 시작하는데,
‘이것만 막으면...!’
오늘 레이스 수차례 디펜스에 성공했지만, 지금 막지 못한다면 모든 게 헛수고가 된다. 순식간에 튀어나올 해밀턴을 막을 딱 한 번의 진로 변경 기회. 서준하의 온 신경이 후방으로 향하고,
‘이 레이스는 내가 만들어낸다!!!’
자신과 최대한 가까워졌음을 느낀 서준하가 곧바로 스티어링을 틀며 경주차의 진로를 변경했다.
< 앞차 속도가 떨어진 거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