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꼭 여기서 같이 달려봐요 >
“아직...!”
파이널 랩까지 한 바퀴 남은 백스트레치. 해밀턴이 서준하의 리어윙을 향해 돌진했다. 지금 서준하만 넘는다면, 남은 한 바퀴에서 선두까지 충분히 추월할 수 있는 상황. 해밀턴의 오늘 레이스 우승에 대한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끝난 게 아니야!!”
DRS 액티베이션으로 이미 차량의 속도는 그 한계를 넘어섰다. 앞차의 리어윙과 부딪히기 전, 해밀턴이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며 순식간에 튀어나가려는데,
“...!!!”
자신과 동시에 서준하 역시 우측으로 진로를 막아섰다. 확실한 추월 성공을 위해 좀처럼 파고들지 않는 우측 방향으로 조금 이른 타이밍에 튀어 나갔지만, 상대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단 한 번의 진로 변경으로 뒤차의 방향과 타이밍을 모두 잡아버렸다.
“...!!!”
앞차와 나란히 섰지만, 이어지는 14턴 진입 길목이 좁아지는 바람에 해밀턴은 더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끼이익.
14턴 우측 헤어핀 진입까지 해밀턴은 계속 안쪽으로 몰렸고, 결국 브레이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헤어핀 돌파와 동시에 앞차는 레코드 라인을 따라 먼저 코스를 돌파하기 시작하는데,
“상하이 서킷의 백스트레치에서 블로킹에 성공하는 서준하입니다...!”
“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웬만하면 저 구간에서의 추월은 실패하기 힘들거든요? 게다가 추격자가 차이나 GP의 최강자 해밀턴이었는데요!”
상하이 서킷의 백스트레치는 추월에 성공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구간으로, 1.2km의 장거리 구간의 DRS 존은 뒤차의 추월을 수월하게 만든다. 게다가 어태커는 이곳을 수차례 우승한 로이스 해밀턴.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에 중계진이 감탄을 내뱉었다.
“해밀턴이 머뭇거렸던 게 아닙니다! 우측을 택한 결정이 맞아떨어진 행운과 더불어, 나란히 달리는 것까지는 허용하더라도 결코 해밀턴을 앞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서준하의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예요...!”
뒤차의 반응을 보고 움직였다면, 그 속도가 아주 빨랐다고 하더라도 결코 추월을 막을 수 없다. 서준하는 방향과 타이밍 모두 도박을 걸었고, 그것이 기막히게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16턴을 먼저 빠져나오는 서준하! 이제 파이널 랩을 시작합니다!”
“아...! 이렇게 되면, 결과는 파이널 랩까지 봐야겠지만, 해밀턴의 우승 가능성은 굉장히 낮아졌습니다!”
추월 실패로 이어지는 코스에서 속도를 살려내지 못한 해밀턴. 다시 서준하와 격차가 벌어지고 말았다. 또 한 번 추월 기회를 잡는다고 해도 마지막 바퀴에서 페라리카 두 대를 모두 추월하는 건 불가능한 일. 게다가,
“스타트 라인을 통과하는 해밀턴! 그의 뒤로 포디엄 피니시를 노리는 막누스가 따라붙습니다...!”
순위권 차량들만 빨리 달리는 건 아니었다. 몇 바퀴 전 해밀턴에게 추월당했던 막누스가 기를 쓰고 다시 뒤에 붙었다. 앞차의 추월 실패는 뒤차에게 또 다른 기회를 제공했으니까.
“페라리와 티포시에겐 꿈만 같은 상황! 프론트 로우의 페라리 듀오가 파이널 랩을 돌고 있습니다!”
페라리 듀오가 지나갈 때마다 서킷 주변의 붉은 물결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막누스와의 배틀로 해밀턴과 서준하의 격차는 더 벌어졌고, 페라리 피트의 긴장감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체커드 플래그가 휘날립니다! 마지막 코너를 빠져나오는 페텔과 서준하! 페텔이 먼저 피니시 할 것 같은데요...!”
체커 기를 받는 페라리 카를 찍기 위해 홈스트레치 주변으로 엄청난 취재 인파가 모여들었다. 그리고,
“피니시!!! 2라운드 페텔의 우승을 차지하며 페라리가 2연승을 차지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앞으로 중국 GP에서 페라리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아지겠군요...!”
12시즌부터 이어온 메르세데스의 중국 GP 우승. 페라리가 6년 만에 정상을 차지하면서 이번 시즌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
“페텔한테 물어볼 질문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같이 인터뷰를 한다니 다행이네요.”
포디엄 아래에서 시상식 진행을 지켜보고 있는 두 남자. 스카이스포츠 F1의 프레젠터 테드와 토니가 페라리 드라이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 GP 우승자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두 사람이 오늘 특별히 페텔과 함께 서준하와 동반 인터뷰를 하게 됐다.
“사실상 오늘 페텔의 우승은 루키가 만들어낸 거지. 레이스 하이라이트를 만들면 코리안 드라이버랑 해밀턴의 배틀밖에 안 나올걸?”
“그러니까요. 지금 딱 해밀턴이랑 서준하랑 인터뷰해도 그림 나올 거 같은데 그건 좀 아쉽네요.”
“아마 다음 GP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다루지 않을까? 오늘 해밀턴을 엮기엔 메르세데스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
오늘 페텔은 별다른 추월 시도 없이 크루징 우승을 일궜다. 물론 56바퀴 내내 실수 없이 페이스를 유지한 것만 해도 칭찬받을 일이지만, 서준하의 레이스 임팩트가 너무나 강했기에 전문 프레젠터들의 관심은 모두 루키에게 향해 있었다.
“솔직히 두 번째 피트 스탑이랑 파이널 랩이 좀 아쉬워. 타이어 상태로 봤을 때 분명 서준하가 선두로 치고 나갈 만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렇죠. 페라리 팀 전략만 아니었다면, 페텔도 쉽게 우승 못 했을 거예요. 팬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처럼 드라이버 실력만 놓고 봤을 땐 비등비등한 것 같기도 해요.”
충분히 선두를 노려볼 몇몇 상황에도 추월 시도를 하지 않던 서준하. 몇몇 팬들은 오늘 레이스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 특히나 오늘 같은 날에는 페라리의 세컨드라는 그의 직책이 더욱 아쉽게 다가왔다.
“확실히 재능 있는 선수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존재감을 드러낼 줄은 몰랐네.”
“그러니까요. 앞으로 뭐가 더 나올지 계속 기대돼요..”
“어, 이제 내려온다.”
세레모니를 마치고 준비된 스테이지로 등장한 페텔과 서준하. 스카이스포츠의 마이크를 쥐어 든 두 남자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섰다.
“와, 오늘 우승 축하드립니다. 차이나 GP에서 페라리가 정상을 차지한 게 몇 년 만인가요? 그래서 오늘 페라리의 승리가 더 값진 것 같습니다...!”
“시즌 출발이 좋은 것 같습니다. 이번 시즌 차량도 굉장히 안정적이고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퍼포먼스가 나올 것 같습니다.”
우승에 대한 얘기로 시작된 인터뷰. 연승에 대한 기쁨을 드러내는 페텔의 답변엔 이번 시즌 강한 자신감이 담겨있었다. 곁에선 서준하는 한발 물러나 지금 인터뷰에서 조명받아야 할 사람을 위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준하 선수 생애 첫 2위 포디엄 축하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오늘 GP 이후 팬들이 더 많이 늘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마지막 해밀턴을 블로킹하는 건 정말 최고였습니다...!”
평소 과한 액션과 목소리로 인터뷰 열기를 띄우는 토니지만, 지금 그의 태도는 레이스 때 느꼈던 짜릿함을 담고 있었다. 페텔의 인터뷰보다 더 흥분된 목소리로 서준하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아마 오늘 ‘드라이버 오브 더 데이’에 서준하 선수의 이름이 올라오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봅니다. 어제에 이어 차이나 GP에서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오늘 레이스에서 가장 활약한 드라이버를 뽑는 온라인 투표, 드라이버 오브 더 데이. 레이스 직후 벌써부터 서준하는 많은 표를 얻고 있었다. 짧게 끝날 줄 알았던 인터뷰가 서준하를 향한 칭찬으로 계속 이어졌다.
“...”
좀전의 기쁜 표정이 사라져가는 페텔. 처음 우승자 인터뷰를 팀 메이트와 같이 한다는 의아했던 감정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며 우승자 페텔의 표정은 굳어졌다.
“네, 그러면 오늘 스카이스포츠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선수.”
어제 폴포지션 퀄리파잉 이후부터 루키에게 쏟아지는 질문들. 오늘 자신의 우승에서 루키의 도움이 지대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만, 우승자보다 다른 선수를 조명하는 듯한 언론의 태도는 거슬렸다. 덕분에 피트로 복귀하는 페텔은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서준하의 어깨에 손을 올리지 못했다.
***
“정말 가도 괜찮은 거예요?”
“네, 미리 팀과 얘기 나눈 부분이에요. 가시죠, 얼른.”
차이나 GP를 마친 상하이의 오후. PHsports의 관계자의 말에 깜짝 놀란 한명호 코치가 아이들을 데리고 패독에서 게러지로 향하는 통로에 들어갔다.
“우와아아!”
통로를 빠져나와 피트 레인에 들어서자 F1 팀의 피트들이 눈앞에 보였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성찬이와 율이. 어린 레이서들의 꿈의 무대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스쿠데리아 페라리!!!”
페라리 팀의 피트 앞으로 멈춰선 아이들. 이미 정비가 마무리된 시점이라 피트는 휑했지만, 팀의 엠블럼과 패키징된 장비들은 그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흥분한 아이들 앞으로 모두가 기다렸던 선수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서준하 선수!”
“헐! 대박이다!”
레이스가 종료 후 곧바로 휴식에 들어가지 않고 다시 피트로 나타난 서준하. 원래 미팅 장소는 호텔 접견실이었지만, 서준하가 직접 이들을 피트로 초대했다. 한국의 유소년 레이서들에게 좀처럼 갖기 힘든 기회라는 걸 잘 아는 서준하가 미리 팀에게 양해를 구했다.
“와! 이게 F1 트로피예요?!”
“준하 형! 저희 사인 좀 해주세요!!”
가까이 다가선 서준하를 향해 셀카와 함께 사인을 요청하는 아이들. 저마다 하나씩 자신의 레이싱 장비들을 꺼내 들었다. 사인을 시작하며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서준하. 그 모습을 협회 관계자와 한국 언론들이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성찬이와 율이는 이번에 영국으로 포뮬러 대회를 치르러 떠난답니다. 서준하 선수를 많이 보고 싶어 했던 친구들이에요.”
“서준하 선수 같은 드라이버가 되고 싶어요...!”
자신의 오버롤을 들고 서준하에게 다가서는 양성찬과 최율. 눈앞에서 롤모델과 마주하자 부끄러움과 감동을 감추지 못했다. 관계자의 설명을 들은 서준하가 사인과 함께 두 사람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기대할게요. 꼭 여기서 같이 달려봐요.”
선배와 후배 그리고, 팬과 선수의 관계가 아닌, 같은 레이싱 드라이버로서 하고 싶은 말을 건네고 싶었던 서준하. 열심히 해라, 노력해라, 포기하지 마라 등등 너무나 자주 들었을 말을 내뱉지 않았다. 대신 유소년 선수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꼭 그렇게 될 거예요! 기다려주세요, 서준하 선수...!”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준하와의 만남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더욱 확고히 다진 한국의 꿈나무들. 멀어져가는 서준하를 두고 언젠가 그와 함께 달리게 될 F1 레이스를 떠올렸다.
“시간이 너무 빠듯하네. 준하 선수도 아쉽지?”
“그러게요. 기회 되면, 스토브 시즌에 마라넬로로 한 번 초대해야겠어요.”
피트를 빠져 나와 팀 하우스로 복귀하는 서준하와 한서윤. 일주일 뒤 곧바로 이어지는 바레인 GP 덕분에 바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터벅터벅.
패독에 들어서자 두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낯선 남자가 있었는데,
“감독님 옆에 누구지? 못 보던 사람인데.”
팀 하우스 근처 동그란 안경을 쓴 이탈리아 남자. 어색한 분위기 속 아리바베네와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서준하의 눈에 들어왔다.
“어, 마침 잘 왔네. 인사드려. 이번에 새로 팀에 합류한 비노토 씨.”
근처로 다가온 서준하를 발견한 아리바베네 감독. 반갑게 맞으며 곁에선 남자를 소개했다.
‘마티아 비노토... 맞아, 비노토가 이때 합류했었지.’
특유의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반가움을 표시하는 남자. 그 익숙한 표정에 서준하도 미소로 화답했다.
< 꼭 여기서 같이 달려봐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