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라리 팀으로선 보타스가 상당히 얄미울 것 같습니다 >
“비노토가 알리슨의 빈자릴 대신해주실 거네.”
페라리의 테크니컬 디렉터 알리슨이 팀을 떠났고, 팀의 새로운 CTO로 마티아 비노토가 자리했다. 아리바베네의 소개로 서준하가 비노토와 인사를 나누는데,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책임자님.”
“하하, 그래요, 우리 잘 해봐요.”
동그란 뿔테 너머로 서준하를 살피는 비노토. 첫 만남에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때도 지금쯤이었지, 아마...’
비노토는 신중하고 계산적인 인물로 속내를 잘 알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지금도 대화 도중 종종 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그 눈빛에서 전생과 다를 것 없는 그의 성격이 드러났다.
“오늘 레이스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같이 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군요.”
“오늘도 운이 좋았고, 팀 전략이 잘 맞아떨어진 것 같습니다.”
사실 레이스 직후 아직 쉬지 못한 상황. 간단히 인사만 나누고 나중에 또 얘길 나눌 수 있었지만, 서준하는 그 자릴 벗어나지 않았다. 비노토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서준하는 머뭇거리지 않고 그의 말에 동조했다.
“이제 들어가서 다른 스태프들과도 간단히 인사 나누도록 하시죠. 바레인으로 떠나기 전에 스태프들을 먼저 만나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팀 하우스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서준하는 비노토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봐주는 새로운 인사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앞으로 팀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될 인물이었으니까.
“마티아 비노토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팀의 직책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과 일관된 행동으로 인사를 나누는 비노토. 옆에선 서준하는 팀원들과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며 종종 인사를 기다리는 다른 스태프들을 비노토에게 소개해줬다.
“오늘 준하가 굉장히 적극적이구만. 이제 피곤할 텐데 먼저 들어가서 쉬게.”
“괜찮습니다. 새로운 식구도 오고, 레이스 결과도 좋고. 이 분위기를 좀 더 즐기고 싶네요.”
아리바베네의 제안에도 편안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선 서준하. 지금 비노토와 함께 자리한 이 시간을 그냥 보낼 순 없었다. 무엇보다 그에게 좋은 첫인상을 남기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티아 비노토... 1년 후, 팀의 프린시펄이 될 남자...’
인간관계와 비즈니스가 얽힌 F1 세계에서 실력만으로 F1 콕핏을 지켜내는 건 힘겨운 일이다. 특히나 페라리같이 새로운 드라이버에 관한 수요가 넘쳐나는 강팀에서 살아남으려면 관계 역시 전략적으로 다가서야 한다.
‘이번 생은 페라리의 슈퍼스타다.’
전생엔 실력만으로 승부하겠다는 고집으로 수차례 콕핏을 빼앗길 압박을 받았던 서준하. 이번 생은 그의 목표는 F1 슈퍼스타다. 챔피언과 동시에, 관계에 있어 능숙한 비즈니스맨이 되고자 마음먹은 그가 팀 내 입지를 다지기 위한 초석을 밟았다.
***
“솔직하게 말할게. 지난 두 라운드 성적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못 미쳐.”
바레인 인터네셜 서킷의 위치한 메르세데스의 팀 하우스. 공식 일정보다 일찍 3라운드 현장에 도착한 테오 감독이 팀 드라이버 보타스를 오피스로 불렀다.
“이번 시즌 역시 우리 팀 차량이 파워 트레인 측면에선 훨씬 안정적이야. 그렇다고 페라리나 레드불 차량이 특별한 것도 아니지. 몇몇 코칭 스태프들은 처음 팀에 들어온 네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보타스.”
앞선 두 라운드에서 모두 5위를 기록하며, 페라리와 레드불 선수들에게 뒤처졌던 발트 보타스. 무난하게 3, 4위를 가져갈 것으로 예측했던 팀의 생각과 다르게 시즌이 흘러가자, 테오가 보타스와 개인 면담을 시작했다.
“팀은 항상 더 많은 포인트를 원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지금 페라리와 30포인트 차이야. 이번 라운드는 무조건 포디엄 피니시해라, 보타스.”
“네, 알겠어요, 테오...”
“다른 거 다 필요 없어. 퀄리파잉에서 어떻게든 프론트 로우를 먹어. 그게 네가 할 일이야.”
계속해서 최고의 자릴 지켜왔던 메르세데스 팀에겐 지금의 상황이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새 팀의 적응 시간이 충분히 필요하다는 걸 잘 알지만, 테오 역시 윗선으로부터 성적 부담을 느꼈기에 보타스를 부추기게 됐다.
철컥.
이후 이런저런 얘길 나눈 보타스가 퇴장하고, 팀의 전략 감독인 제임스 보울즈가 조심스럽게 오피스로 들어왔다.
“후... 제가 이런 말을 꺼내게 될 줄은 몰랐네요.”
2013년 처음 메르세데스 팀의 수장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던 테오. 2라운드 연속으로 페라리에게 시즌 초반 주도권을 빼앗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팀은 항상 최고의 경주차를 만들고 서포트 했기에 부진의 원인을 드라이버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준비한 전략을 하나도 못 써먹고 있어. 확실히 보타스가 포디엄 경쟁을 해줘야 해요.”
퍼스트 드라이버 해밀턴의 우승 확률을 높이는 전략을 쓰려면, 보타스의 서포트가 필요하다. 하지만 보타스의 순위권 부재로 오히려 그런 전략을 경쟁팀에게 당하고 말았다. 답답한 상황에 보울즈가 조심스럽게 얘길 꺼내는데,
“이번 시즌만큼 초반에 이렇게 페라리가 잘 풀렸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땐 충분히 보타스도 폼이 좋았거든요.”
사실 보타스 자체의 문제가 아니었다. 불안정할 것으로 보였던 페라리와 레드불의 루키가 연달아 의외의 성적을 내버린 상황. 새로운 팀과 차량의 적응하며 5위 성적을 내는 것도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경쟁 팀이 잘했다고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에요. 걔네들보다 더 잘했어야죠. 아무튼 3라운드에서도 격차 못 좁히면, 이번 시즌 진짜 골치 아파요.”
“레이스 당일 기온이 낮을 거라는 예상이 많습니다. 숏런 페이스가 좋은 우리 팀에게 훨씬 유리할 테고, 게다가 해밀턴도 지난 레이스로 각성한 듯 보이니 분명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팽팽한 균형이 맞춰진 상황에서 갑자기 한쪽으로 무게추가 기운다면, 시즌 초반 기세 싸움에서 앞선 팀과 드라이버가 이후 몇 차례 그랑프리에서 더 유리한 상황을 가져갈 수 있다.
게다가 혹시나 모를 불의의 리타이어나 좋지 않은 결과를 남긴다면, 이후 경쟁에서 심리적인 부담은 극대화될 터. 메르세데스 팀에게 이번 라운드 결과는 페라리와의 경쟁 구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음... 진짜 이런 시즌은 처음이네.”
“...”
여전히 시즌 초반 팀 부진의 가장 큰 원인을 보타스라고 여기는 테오 감독. 하지만 보울즈에겐 혜성처럼 등장한 경쟁팀의 루키가 가장 거슬렸다. 테오의 한숨으로 더욱 가라앉은 분위기. 말없이 생각에 잠긴 보울즈의 맘속으로 페라리 루키에 대한 걱정이 점점 더 커져갔다.
***
[Round 3. FP2]
[PIT LANE OPEN]
“현재 시간 18시. 오늘 두 번째 연습주행이 시작됐습니다.”
“현재 기온은 30도 정도 됩니다. 아까 FP1보다 6도가량 떨어졌어요. 역시나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바레인 서킷답게 기온 변화가 급격하군요.”
3라운드 바레인 GP는 사히라의 사막 한가운데서 진행된다. 싱가폴 GP와 같이 나이트 레이스로 진행되는데, 일요일 레이스 환경과 동일한 시간대에 시작하는 오후 FP2는 세 개의 FP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오늘 FP1에서 가장 빨랐던 건 메르세데스의 보타스였습니다. 이번에도 자신감을 보이며 일찍이 서킷에 나오는 보타스군요.”
예선과 본선 환경과 확연히 다른 FP1. 많은 선수들이 뒤늦게 출발하며 데이터 수집에 도움이 안 되는 뜨거운 환경을 피했지만, 보타스만큼은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1위를 기록했다. FP2에도 가장 먼저 출발하며 이번 라운드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이는데,
“FP1과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죠. 보타스를 시작으로 선수들이 서킷에 등장합니다. 피트 레인 출구로 페라리의 서준하가 모습을 드러내는군요!”
내일 FP3 역시 FP1과 동일한 낮 시간대에 시작되므로 FP2에서 예선 전략과 서킷 데이터를 수집해야 한다. 나름의 전략을 들고나온 서준하가 곧바로 워밍업을 시작했다.
“FP1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보타스에 이어 서준하도 일찍이 플라잉랩을 달립니다!”
보타스의 뒤를 쫓는 서준하. 중계진의 관심이 두 선수에게로 향했다.
“13턴을 빠져나가는 보타스! 빠른 속도로 백스트레치에 들어갑니다!”
“어! 잠깐만요! 방금 뭐가 떨어져 나갔거든요?!”
보타스의 경주차를 유심히 살피는 중계진. 레이스도 아닌 연습주행에서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는데,
“...!!!”
곧이어 뒤따라오던 서준하의 경주차가 중계 화면에 들어왔다.
“아! 서준하가...!!!”
보타스 차량에서 떨어져 나간 티 윙(T-Wing) 하나가 트랙에 떨어지며 데브리로 변한 상황. 뒤따라오던 서준하가 이를 밟으며 경주차의 플로어 부분에 손상을 입었는데,
“아, 이거 서준하한테는 치명적입니다. 황금 같은 FP2를 이제 시작했는데요? 저대로 계속 못 달릴 거 같죠...!”
바닥으로 주저앉은 서준하의 플로어가 트랙과 마찰을 일으키며 연신 불꽃을 내뿜었다. 점점 속도가 줄며 백스트레치를 내려오는 서준하. 연습주행을 마칠 것으로 보이는 장면에 중계진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티 윙을 잃은 보타스는 곧바로 피트로 복귀합니다.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페라리 팀으로선 보타스가 상당히 얄미울 것 같습니다.”
곧이어 등장한 메르세데스 팀의 피트. 피트로 복귀하는 보타스의 모습이 중계 화면에 나타났다. 정비가 시작되자 다시 서준하에게로 화면이 넘어가는데,
“...!!!”
연습주행과 차량의 상태로 봤을 때, 모두가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던 서준하의 상황. 하지만 서준하는 불꽃을 내뿜으며 거북이처럼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아! 서준하! 느리지만 계속 달리고 있습니다! 이거 피트 레인으로 들어올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다 왔습니다! 피트 레인 출구에 멈춰선 서준하! 미캐닉들이 뛰어나오죠!”
피트에서 뛰쳐나온 미캐닉들과 주변 마샬들의 도움으로 페라리 피트로 옮겨지는 서준하의 페라리카. 주변 취재진과 갤러리들의 박수를 받으며 정비를 시작했다.
잠시 후, 이어지는 참가자들의 어택 장면. FP1과 달리 많은 선수들이 서킷을 돌며 기록 세우기에 들어갔다.
“자, 그리고 현재 1분 32초 031. 막누스의 기록이 가장 좋군요. 페텔과 메르세데스 듀오도 슬슬 어택을 시작하는 것 같고요.”
우승 후보들의 모습이 하나둘 카메라에 잡히며 이번에는 중계 화면으로 페라리 카 한 대가 잡혔는데,
“페텔인가요?”
메르세데스 듀오에 이어 4턴 헤어핀에 진입하는 페라리카. 차량 넘버 확인을 위해 카메라가 줌인하는데,
“넘버 50?”
“네? 벌써 나온 건가요?!”
발 빠른 플로어 교체로 다시 서킷에 오른 서준하. 어느덧 어택을 시작하는 선수들 틈에 들어와 서킷을 달리기 시작했다.
< 페라리 팀으로선 보타스가 상당히 얄미울 것 같습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