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뻔해? >
“그래! 거기! 거기! 거기로 빠져나와!!”
크러쉬로 혼란이 가득한 레이스 상황. 레드불 레이싱 팀의 피트 월에선 모두가 하나된 마음으로 13턴의 런오프를 바라봤다.
“예쓰!!!”
“됐어!!!”
“타이어 공기압 체크! 프론트, 리어 바디 체크해!”
트랙에 놓인 데브리들을 피해 잔디밭으로 빠져나온 막누스의 경주차. 뒤따르던 선수 가운데, 가장 먼저 사고 현장을 벗어나는 모습이 중계 화면에 등장했다. 환호하는 팀 스태프들과 다르게 호너 감독은 탈출과 동시에 곧바로 막누스 차량에 대한 점검을 지시했다.
“펑쳐, 바디, 모두 이상 없습니다...!”
“레드 플래그 발동! 경기 중단됐습니다!”
“후...”
레이스가 멈추기 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호너. 팀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기회 앞에서 팀의 프린시펄은 누구보다 침착했다. SC가 등장하고, 문제없이 움직이는 막누스를 확인하자 그제야 움켜쥐었던 손에서 힘을 풀 수 있었다.
“시작 전부터 분위기가 이상했지. 내 이럴 줄 알았네.”
“리카도까지 선전해준다면, 다시 3강 구도를 만들 수 있겠습니다. 이거 정말 대박인데요...!”
어제 퀄리파잉까지의 결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이번 시즌 챔피언을 페라리와 메르세데스의 양강 구도로 점쳤다. 아직 드라이버들이 단 한 차례도 포디엄에 오르지 못하며 부진한 스타트를 했던 레드불 팀. 큰 사고에 걱정스러운 마음과 동시에 반전을 꾀할 수 있는 기회 앞에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막누스의 두 번째 우승을 기대해도 좋겠습니다.”
“전력을 다해야 할 거야. 이런 경기에서 우승 욕심이 나는 건 뒤에서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2016년 생애 첫 그랑프리 우승 이후 GP 우승에 목말라 있는 막누스. 팀 라디오를 향해 연신 우승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호너는 만족스러우면서도, 남은 40여 바퀴가 수월하리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챔피언 후보 두 명이 모두 탈락한 상황이야말로 지금 레이스를 달리는 모두에게 엄청난 기회였으니까.
“페텔이 해밀턴의 옆구리를 친 건 맞습니다. 근데 그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타이어끼리 부딪치면서 차체가 틀어졌기 때문이에요. 아, 이거 무슨 일 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참...”
“정확한 건 레이스 컨트롤(Race Control, 그랑프리의 모든 이벤트를 관리, 감독하는 장소)이 내리는 판단을 봐야겠지. 포메이션 랩 때부터 지금까지 스튜어드들 머리가 복잡하겠구만...”
한편 페라리 팀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시작부터 치열했던 두 선수의 배틀에 팀은 굉장히 초조했고, 결국 팀이 맞은 절망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좌절에 빠졌다.
“그나마 준하가 살아남아서 다행이야. 최악은 면했구만.”
해밀턴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는 전략팀원들 사이로 다행스러운 표정을 짓는 안토니아치. 서준하의 브레이킹 타이밍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튕겨 나온 앞차들의 잔해에 그도 당했을 터. SC 상황에서 여전히 막누스의 뒤를 달리는 페라리 카가 눈에 들어왔다.
“저 약삭빠른 자식. 언제 저 구멍으로 들어갈 생각을 다 한 거지...”
눈앞에서 돌발 상황이 일어났던 서준하와 달리,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던 막누스는 좀 더 수월하게 대처했고, 발 빠르게 돌파구를 찾아 선두로 나왔다. 많은 팀원들이 지금 상황을 아쉬워했지만, 리플레이를 보는 안토니아치는 오히려 사고에 휩쓸리지 않은 서준하의 순발력에 놀라고 말았다.
“다행히 페텔은 문제없답니다. ”
“휴...”
“준하의 차량 상태는 어떤가?”
“아직까지 문제없는 걸로 봐서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오케이, 지금 일은 어서 잊고, 다시 집중하자고.”
메르세데스 팀에 대한 분노와 레드불 팀에게서 느끼는 압박감 등으로 혼란스러웠지만, 왠지 모르게 안토니아치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드디어 왔구나. 준하에겐 지금이야말로 신이 주신 기회야.’
SC를 따라 천천히 사키르를 돌며 대기 중인 서준하. 그 주변으로 경쟁자들의 레이싱카가 안토니아치의 눈에 들어왔다.
‘충분히 해볼 만한 상대들이다. 기회를 잡아라, 준하야.’
서준하가 오늘 레이스의 주인공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SC 상황이 끝나갈수록 곧바로 다시 페라리 피트의 분위기가 긴장감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
“이제 조금 있으면, SC 상황이 끝날 것 같습니다. 13턴 주변의 데브리는 모두 치워졌고요.”
길었던 레이스 중단 상황이 끝을 보일 때쯤, 마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녹색기가 다시 휘날립니다! 다행히도 다친 선수들 없이 레이스가 재개됩니다!”
“지금 대부분이 타이어 교체 시기보다 한두 바퀴 더 돌았거든요. 아마 이번 랩에서 많은 선수들이 피트 스탑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초반 모든 선수가 SS 타이어를 낀 상황. SS의 경우 바레인 서킷에서 평균적으로 12바퀴면 타이어를 교체한다. 이미 14랩을 시작한 상황에 중계진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데,
“역시나 지금 모든 피트가 분주하죠? 선두의 막누스가 곧바로 피트레인으로 들어갈 것 같습니다!”
“뒤따르던 서준하와 그리고 페레즈 선수도 들어갈 것 같죠?”
“이렇게 되면, 피트 레인에서 다시 한번 대혼란이 일어날 것 같은데요...!”
SC가 끝나자마자 분주해진 피트 레인의 박스들. SC 상황에선 피트 스탑이 불가능하기에 본격적인 레이스를 두고 모두가 재정비에 들어갔다.
부와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앙.
-준하, 이번 랩 바로 들어와, 타이어 체인지 오더가 떨어졌어.
포메이션 랩을 도는 동안 이미 그립감이 많이 떨어졌다. 적절한 오더에 서준하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타이어는 기존 전략대로 갈 거야. 지금 바꿀 S로 최대한 오래 버텨줘. 두 번째 S는...
“아니, SS로 시작한다. 그걸로 준비해달라고 전해.”
레이스 피니시까지 40바퀴 이상 남았고, SS나 S타이어를 이용한 투 스탑 전략이 보편적인 상황. 팀은 서준하에게 레이스 처음의 선택과 같은 안정적인 타이어 전략을 오더 내렸다. 하지만 서준하는 비장한 목소리와 함께 좀 더 공격적인 전략을 원한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감독님, 준하입니다.”
롭의 답변이 길어지자, 직접 팀 컨트롤 타워로 무전을 날린 서준하. 사키르의 직선 주로를 빠른 속도 달리고 있었음에도 목소리는 차분했는데,
“마지막 피트 스탑 전에 선두와 승부를 보겠습니다. 타이어 전략 변경이 필요합니다.”
서준하의 예상으론 막누스가 S-S를 끼고 보수적으로 레이스를 운용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 팀이 신인의 타이어 관리 능력에 불안을 느낀다는 건 잘 알지만, 서준하는 자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레이스 우승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오늘은 생애 첫 우승이 가능한 절호의 기회.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확실한 승부수를 띄워야 하는 상황에 서준하가 직접 감독을 설득했다. 그리고,
-...오케이, 곧바로 들어오게
지금 만약 페텔이 서준하의 위치에서 달렸더라면, 감독은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처음 타이어 전략과 크게 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던 아리바베네가 잠시 말을 아끼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오늘 레이스를 우승으로 끝낸다면... 퍼스트 드라이버는...’
신인과 세컨드 드라이버라는 위치가 아니었다면, 이런 요청이 필요하지 않았을 터. 우승에 대한 열망과 승리에 대한 자신감으로 불타오르는 서준하가 본격적인 레이스 준비에 앞서 피트에 들어섰다.
***
“막누스와 서준하! 피트 레인을 나왔습니다!”
“좋아, 타이어는?”
오늘 레이스 드라이버 한 명이 리타이어한 또 하나의 팀. 메르세데스의 피트 월에선 퍼포먼스 엔지니어들이 경쟁 팀 선수들의 교체 타이어를 살피고 있었다.
“막누스는 예상대로 소프트 타이어. 서준하는 슈퍼 소프트입니다!”
“공격적인 선택이군, 당연히 우승 욕심이 나겠지... 우린 소프트로 준비하게.”
선두와 2위 차량의 타이어를 확인한 테오 감독. 이제야 다른 선수들보다 한 바퀴 늦게 일부러 인 랩을 시도하는 보타스의 타이어를 결정했다.
타이어 교체 타이밍을 조금 늦추더라도, 상대의 패를 보고 수를 던지는 전략을 취한 테오. 확실한 승리 전략을 위해서라면, 레이스 초반 잠깐의 시간 손해를 감수해도 괜찮다고 판단했는데,
“막누스가 쉽게 뚫려 버릴까 걱정이군요...”
“쉽게 뚫려도 상관 없어. 누가 앞서건 그냥 둘은 최대한 배틀을 해주면 되네.”
“흠... 마지막 피트 스탑까지 한 명이 치고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둘 다 비슷비슷해. 실력도 그렇고, 현재 상황도 그렇지. 우린 지켜보기만 하면 돼.”
두 번째 타이어로 S를 선택한 보타스. 그의 마지막 타이어는 SS로, 앞선 두 경쟁자가 최대한 힘이 빠졌을 때 후반을 노리는 전략을 택했다. 테오가 봤을 때, 이번 시즌 처음 주어진 선두 자리를 두고 펼쳐질 루키들의 배틀은 팀 스태프의 걱정처럼 쉽사리 끝날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른 팀 상황을 보고 전략을 짜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요... 후, 정말 최악이네요.”
“지금 이런 상황도 그나마 다행인 거지. 지금 저 페라리카에 탄 선수가 서준하가 아니고 페텔이었다고 생각해봐.”
“...여기서 더 꼬였겠군요.”
“게다가 해밀턴과 부딪힌 게 페라리가 아닌 다른 팀이었다고 생각하면... 최악은 아니지.”
매 레이스 주도권을 갖고 달렸던 메르세데스 팀. 언제나 자신들의 레이스 전략에 다른 경쟁 팀이 반응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상황에 엔지니어들이 씁쓸함을 표했다. 그리고 그때,
“15턴을 빠져나온 페라리카! 선두와 격차가 1.2초로 좁혀졌습니다!”
해밀턴의 침몰로 가라앉았던 메르세데스 피트. 리스타트 이후 기다렸던 소식에 코치진들의 눈이 중계 스크린으로 향하고,
“10턴 이후 배틀! 서준하가 막누스의 슬립스트림에 들어갑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배틀. 테오가 바라보는 중계 스크린으로 조금씩 레드불 차량에게 다가서는 페라리카가 등장했다.
***
-DRS ON!!!
바레인 서킷에는 세 개의 DRS 존이 있다. 먼저 홈스트레치의 첫 번째 DRS 존에 들어선 서준하가 막누스의 슬립스트림에 들어갔다. 새 타이어와 클린 에어의 영향으로 스피드 트랩 최고 속도를 찍으며 막누스의 앞으로 튀어나오는데,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지만 롭의 무전이 끝남과 동시에 두 번째 DRS 존에 들어온 막누스가 곧바로 선두 자릴 빼앗으며 서준하를 추월했다.
-추월 이후 격차를 벌리는 게 포인트야! 다시 격차는 0.912, 선두 다시 되찾아와!
추월에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추월 이후 다음 코스에 조금 더 격차를 벌려야 하는 바레인 서킷. 이어지는 DRS를 허용하지 않아야 상대를 완전히 따돌릴 수 있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해선 안 돼! 어택이 전부 뻔하잖아. 변화를 주란 말이야!!!
“Copy.”
경쟁 선수들의 두 번째 타이어 선택과 자신의 전략으론 반드시 리스타트 초반 선두로 나가 랩타임을 끌어올려야 한다. 10턴을 빠져나와 짧은 직선 주로에 오른 서준하. 빠르게 다가오는 전방을 바라보며 막누스의 뒤에 붙었다.
‘뻔해?’
롭의 피드백을 곧바로 적용하려는 서준하. 막누스의 뒤에 붙으며 11턴 끝까지 따라붙는데,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러면 이렇게 간다!!!’
11턴에 진입하기 시작한 두 선수. 서준하의 페라리카가 막누스의 바깥쪽으로 추월을 시도했다.
< 뻔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