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끄럽다, 너희 >
[소치 오토드롬(Sochi Autodrom)]
4라운드 공식 일정 첫째 날 오전. 소치의 날씨는 따뜻했고, 이른 아침 서킷은 한적했다. 서준하가 서킷의 홈스트레치를 걷기 시작했다. 곁으로 한서윤과 롭이 트랙 탐사에 따라나서며 이번 라운드 이슈와 트랙의 주의 사항을 체크했다.
“역시 이번에도 이 시간에 서킷에 나온 건 우리밖에 없구나. 준하야, 넌 왜 이렇게 이른 아침을 좋아하는 거냐?”
갤러리들에게도 개방된 피트 레인 워크 시간임에도 트랙을 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매 GP 이른 아침의 트랙 탐사를 선호하는 서준하. 이번 시즌 내내 같은 방식을 고수하자 졸린 두 눈의 롭이 물었다.
“아침에는 트랙이 더 잘 보여.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까지.”
트랙은 항상 소음과 사람들로 붐비지만, 개장 직후 이른 아침은 다르다. 한적한 트랙을 고요히 걷다 보면, 집중력이 배가 되고,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요소들을 발견하기 쉽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 마치 여길 언제 와봤던 사람처럼 얘기하네. 아무튼 기온 변화만 크게 없다면, 마라넬로에서 분석했던 데이터랑 내일 FP 주행에서 비슷한 값이 나올 거야. 흐아아아암.”
호주, 바레인, 중국, 러시아 이번 시즌 모두 이번 생엔 처음이지만, 전생엔 모두 경험했던 서킷들. 하지만 롭이 아는 서준하는 흔히 접했던 곳들이 아니기에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준하 선수, 그리고 이따 오후 3시에 1시간 정도 프레스 컨퍼런스가 있을 거야. 그거 끝나고 팬미팅이랑 사인회에도 나가야 해.”
레이스 주간 공식 일정의 목요일은 다양한 행사로 바쁘다. 오전에는 대부분 이렇게 내일 FP 주행 준비를 하고, 오후 시간 대부분은 팀과 주최 측이 마련한 이벤트에 참여한다.
“서준하 선수...! 같이 사진 촬영 한 번 부탁드려요!”
한서윤이 스케쥴표를 꺼내며 서준하의 오늘 일정을 알리는 사이, 어느덧 서준하를 발견한 갤러리들이 주위로 모여들었다. 원래 숙소로 복귀하려고 했지만, 서준하는 자신을 부르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충분히 인사를 나누며 대화를 즐기는 여유 있는 드라이버였다.
“시차 적응도 안 되고, 아침부터 일찍 나와서 피곤할 텐데. 조금 쉬었으면 좋겠는데...”
“준하는 매번 저렇게 좋아하는데 저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 하하.”
레이싱 드라이버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은 단순히 서킷 위에서의 성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위해 서킷을 찾은 팬들과의 교류. 팬들과 소통할 때 서준하는 피로해 보이지 않았다.
“엄청 행복해 보여.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니까.”
그냥 자신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해왔을 뿐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자신들의 히어로라고 부르며 열광했다. 서준하의 웃음은 진짜였다. 지금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
“고려타이어의 조헌범 사장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어느 호텔의 접견실. 고려타이어의 해외사업 부문을 담당하고 있는 임원진이 PHsports와 미팅을 가졌다.
“서준하 선수를 후원하고자 만남을 요청드리게 됐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고려타이어의 스폰서십 참여에 서준하 선수도 많이 기뻐할 것 같습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조금 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 중인 고려타이어. 해외 마케팅 효과를 기대하며 서준하의 개인 스폰서를 자청했다. 사장의 말을 듣던 필립이 먼저 감사를 표했다.
“혹시 고려타이어에서는...”
후월 절차와 계약 내용을 검토하던 필립 황. 스폰서십 관련해 어느 정도 얘기가 오고 가자 조현범 사장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앞으로 F1 타이어 공급사로 진출해보실 계획이 없으신지요?”
국내 모터스포츠의 판을 크게 확대하고픈 야망을 가진 필립 황. 한국 기업의 F1 진출이 중요한 상황에서 그가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F1 대회에서 사용되는 타이어는 FIA가 규정한 동일한 회사의 제품이 쓰인다. 현재 F3와 DTM 대회의 독점 공급사로 활동하고 있는 고려타이어의 상황으로 볼 때, 충분히 F1 공급사에 대한 입찰을 노려볼 만했다.
“저희 쪽에서도 몇 년 전 입찰을 진행했었습니다만, 결국 피렐리 쪽에 밀리면서 물러났지요. 아무래도 F1은 이탈리아와 유럽 업체들이 꽉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식 타이어 업체로 선정된 기업의 경우, 기술력을 검증받는 동시에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2014년 고려타이어의 적극적인 투자에도 FIA는 피렐리의 손을 들어주며, 현재까지도 독점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당시엔 이탈리아 팀과 드라이버들이 F1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상황이라 더 힘들었겠지요. 하지만 지금부터는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음... 그렇죠. 한국인 드라이버가 등장했으니까요. 사실 저희 쪽에서도 이번 입찰을 또 한 번 고려하고 있기는 한데... 아직은 한국 업체들의 영향력이 좀 미미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사실 지난번 F1 공급사 입찰은 조헌범 사장이 본부장 재직 시절 직접 이끌었던 사안이었고, 그도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에게 F1은 쉽게 발을 들이기 힘든 곳이었고, 실무진들 사이에서도 반대하는 입장이 강했다. 사장도 안타깝다며 필립의 말에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요, 사장님. 고려타이어가 진출에 성공한다면, 더 많은 한국 기업들이 F1 시장에 들어올 거고, 그렇다면 FIA 측에서도 이후에도 고려타이어에 독점을 맡기는 판단을 내리기가 쉬워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그건 일단 입찰이 되고 난 후에 일이지요.”
“네, 맞습니다. 지금 당장의 상황만 놓고 볼 땐, 사장님 말씀처럼 미미합니다. 하지만 지금 시즌 초반과 같은 추세로 서준하 선수가 종반까지 계속 활약해준다면, 다음 시즌쯤에는 도전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입찰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장의 말을 듣고 상황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보도록 환기시키는 필립. 데뷔 이후 네 그랑프리 연속 포디엄에 오른 서준하의 활약으로 볼 때, 필립의 말은 뜬구름 잡는 얘기는 아니었다.
“음... 다음 시즌이요...?”
필립의 말에 조헌범 사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준하라는 말을 듣고 어딘가 달라진 표정을 필립이 포착했다.
“어차피 입찰을 고려하고 계시다면, 고려타이어도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F1 참가로 전 세계적으로 누릴 수 있는 마케팅 효과를 잘 아는 고려타이어. 불리한 조건 탓에 섣불리 입찰 시기를 결단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몇몇 해외 언론에선 서준하를 이번 시즌 월드 챔피언 후보로 꼽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F1에서 한국의 입지가 서는 때가 그리 늦을 것 같진 않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시기 바랍니다.”
F1에 참여하기 위해 고려타이어가 지난 몇 년간 들인 노력을 잘 아는 필립. 서준하의 성공에 대한 확신에 찬 눈으로 사장을 바라봤다.
***
“이번에도 러시아는 확실히 메르세데스 팀이 우승할 거라는 예측이 많았습니다. 단연 이번 시즌 프리프렉티스에서도 해밀턴과 보타스의 기록이 우수했고요.”
“그렇죠. 2014년 러시아 그랑프리가 열린 후로 3년 동안 폴포지션과 우승을 차지한 팀이 바로 메르세데스니까요.”
4차전 러시아 그랑프리가 열리고 있는 금요일 오후. 본격적인 퀄리파잉 1 스타트를 앞두고 메르세데스 팀 피트가 중계 화면에 잡혔다. 페라리와 윌리엄스, 포스인디아의 포디엄 피니시 횟수를 모두 더해도, 메르세데스 한 팀의 기록에 미치지 못할 정도. 종합적으로 러시아는 메르세데스가 압도하는 서킷이다.
“이번 시즌 또 하나 눈여겨볼 포인트가 있다면 바로, 지금까지 진행된 레이스 모두 페스티스트 랩이 갱신됐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시즌 확실히 빨라진 경주차. 날씨 변수만 없다면, 4라운드 역시 새로운 기록이 탄생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오늘도 역시나 두 선수의 인기가 대단하군요. 크비얏과 시로츠킨이 동시에 서킷을 나섭니다!”
“두 선수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서킷을 나서는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Q1 스타트와 함께 토로 로쏘의 크비얏과 이번 시즌 루키인 르노의 시로츠킨이 서킷에 등장하자, 중계 카메라가 오토드롬에 걸린 두 선수의 대형 사진을 클로즈업했다.
Q1 단골 탈락자들이 타이어가 적당한 온도에 달하자, 빠른 플라잉랩을 시작했다.
“러시아의 크비얏! 시작 3분여 만에 1분 35초 984라는 빠른 기록을 세웁니다!”
“아 지금 플라잉 랩을 달리는 선수들과 상당히 차이 나는 기록인데요! 역시 홈 서킷에 오면 드라이버들의 실력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연습 주행 내내 고전했던 크비얏이 일찌감치 베스트 기록을 세우며 경쟁자들의 기록을 압도했다. 홈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홈스트레치를 스쳐 지나던 그때,
“아, 언제 나왔나요, 서준하! 갤러리의 관심이 크비얏에게로 향한 사이 서준하가 플라잉 랩을 시작했습니다!”
슈퍼 스크린에 서준하의 페라리 카가 등장하자, 조금 전 크비얏의 피니시에서 나왔던 함성보다 몇 배나 큰 환호가 스탠드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번 시즌 세 라운드만에 가장 많은 팬덤을 늘려간 선수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곳이 러시아 무대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서준하에게 엄청난 환호가 쏟아지는군요!”
조금 전 함성에 중계진은 물론, 참가 팀들도 많이 놀란 상황. 지난 그랑프리 이후 SNS에서 끌었던 서준하의 엄청난 인기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피니시! 플라잉 랩 첫 바퀴 서준하의 기록은 1분 34초 495! 크비얏과 무려 1.5초라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FP 통틀어 본인 최고 기록이네요. 이제는 서준하의 기록이 당연스럽게 느껴집니다. 확실히 클래스 차이가 있어요!”
이제 사람들은 서준하의 기록에 더는 의문을 품지 않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오늘 서준하의 컨디션이라면, 이번 라운드 메르세데스가 쉽게 가져갈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요...!”
매 라운드 F1 전문가들의 예측을 빗겨나가는 서준하의 행보. 4라운드 퀄리파잉의 모습만으로 또 다른 이변이 시작될 조짐을 보였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훼에에에에에엥.
홈스트레치에 홀로 남겨진 크비얏. 자신의 옆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페라리 카를 바라봤다. 동시에 서준하의 등장 이후 한순간에 러시아인들의 함성이 묻혀버리는 것이 느껴졌는데,
‘페라리... 시끄럽다, 너희.’
지난 시즌 ’어뢰‘라는 별명을 얻으며 페라리 팀 드라이버들과 충돌이 잦았던 크비얏. 서준하를 연호하는 티포시들의 모습에 불쾌함을 드러내며 인 랩을 시작했다.
< 시끄럽다, 너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