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마 지금 여기서 가장 머리가 복잡한 건 자네겠지 >
-1턴 탈출로 부근에 차량 두 대!
스타트 라인을 통과함과 동시에 롭이 현재 트랙의 상황을 알렸다. 아웃 랩을 마치고, Q3 플라잉 랩에 들어간 서준하. 그의 앞으로 인 랩을 돌며 서행하는 포스 인디아 듀오가 보였다.
-어쩔 수 없어! 코너 안쪽으로 그대로 돌파할 것!
레코드 라인인 1턴의 아웃 코스가 트래픽으로 막히면서 서준하가 인라인을 파고들었다. 자칫하면 급히 진로를 변경하려는 앞차들 때문에 사고가 날 수 있지만, 서준하의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포스 인디아 선수들은 방향을 바꿀 생각도 못 했다.
-섹터 1 돌파 완료. 잠정 폴과 0.224초 차이. 남은 코스 무조건 단축시켜!”
“Copy that.”
과거 1~2초까지도 랩타임이 벌어졌던 F1 퀄리파잉. 하지만 2010년대는 들어 경주차의 성능과 드라이버들의 실력이 비슷해지면서 이제는 0.01초 싸움이 돼버렸다. 불운하게도 조금 전 서준하의 상황처럼 트래픽에 막혀 레코드 라인을 타지 못한다면, 경쟁자보다 좋은 기록을 기대하긴 힘들다. 하지만,
‘퀄리파잉은 원래 이런 거야.’
초장부터 트래픽에 막혀 기록이 뒤진다고 좌절할 필요 없다. 모터레이싱에선 운도 실력이고, 피니시 라인을 통과할 때까지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게다가 아직 피니시까지 13개 이상의 턴이 남았고, 잠정 폴을 못 따낸다고 해서 GP에서 지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흔들릴 필요 없어.’
소치 동계 올림픽 경기장의 도로를 서킷으로 만든 이곳 소치 오토드롬. 이제 서준하가 섹터1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를 지나 섹터 2의 볼쇼이 아이스 돔을 끼고 우측으로 선회했다.
전생은 물론, 데뷔전에서도 겪었던 아부다비 서킷의 레이아웃과 비슷한 소치의 섹터2. 익숙한 코스 돌파에 자신감을 얻은 서준하가 백스트레치를 최고속으로 빠져나오며 섹터2를 마쳤다.
-예쓰! 섹터 2 페스티스트 섹터 타임(Fastest Sector Time)! 11턴까지 잠정 폴!
오늘 퀄리파잉 섹터 2 돌파 기록만 놓고 봤을 때, 놀랍게도 서준하는 가장 빠른 랩타임을 달성했다. 이제 소치 오토드롬에서 가장 까다롭고 나이도 있다고 평가되는 섹터 3 공략을 시작하는데,
“12턴을 빠져나오는 서준하! 이 구간에서 보타스와 거의 동일한 랩타임입니다!”
“아 근데 속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13턴 진입 전에 지금 어느 정도 속도를 떨어뜨려야 할 것 같은데요!!!”
13턴은 소치에서 가장 느린 코너로 강한 브레이킹이 불가피한 곳. 백스트레치의 최고속도로 왼쪽으로 선회하면서 달리다가 만나는 오른쪽 저속 코너이기에 극한의 테크닉을 요구한다. 특히 턴 인과 함께 브레이킹을 시도할 경우, 조금만 실수를 범하거나 운이 따르지 않으면 곧바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데,
끼이이이이이익.
연석 바깥으로 밀려날 듯 말 듯, 어려운 브레이킹을 소화하며 13턴을 빠져나오는 서준하. 마리나 베이 서킷(Marina Bay Street Circuit)의 섹터 3를 연상케 하는 중저속 테크니컬 구간으로 돌파를 시작했다.
“페텔은 이제 섹터 3에 들어오고요.”
“우려와 달리 섹터 3 시작이 완벽했던 서준하! 이제 피니시까지 얼마 안 남았어요...!”
그와 거리를 두고 플라잉 랩을 시작했던 페텔도 이제 섹터 3에 들어섰다. 드라이버의 높은 집중력과 차량의 우수한 밸런스를 요하는 구간 14~16턴. 오늘 랩타임의 가장 많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이는 곳에 서준하가 들어왔다.
Driver: [BOT] - [SEO]
Rap Time: 1:23.512 – 1:23.526
Sector 3 Time: 35.754 – 34.905
“서준하 16턴 돌파 완료! 이제 마지막 두 코너만 넘으면 피니시예요!”
“전체 랩타임에서 0.14초 차이! 섹터3 예상 기록은 서준하가 보타스보다 더 빠른데요...!”
Q2까지 불안정했던 리어 그립이 살아나며 경주차의 퍼포먼스는 더욱 향상된 상황. 난코스 돌파에서도 오늘 가장 빠른 랩타임을 보이며 스타트 라인으로 들어섰다.
띠링.
페라리 카의 배기음이 가득한 소치의 홈스트레치. 통과와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슈퍼 스크린으로 향하고,
“1분 33초 253!!! 서준하가 보타스를 누르고 잠정 폴 기록을 갈아 치웁니다! 오늘만 세 번째 트랙 레코드 갱신이군요...!”
“섹터 1에서 주춤했던 서준하였는데요! 트래픽 따윈 문제가 되지 않는군요. 정말 놀라운 집중력입니다!”
서준하의 이름과 함성이 쏟아져나오는 소치 오토드롬. 하지만 그것도 잠시, 멀리서 또 다른 페라리 카의 배기음이 다시 한번 홈스트레치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늘 퀄리파잉 마지막 주자가 들어올 때까지 결과를 모르겠는데요, 페텔의 기록도 빨라요!”
“섹터 1는 페텔이, 섹터2는 서준하가 빨랐거든요. 섹터3 기록에서 승부가 갈리겠는데요...!”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페텔의 옆으로 맞은편 홈스트레치로 서행하는 서준하가 보였다. 코스 돌파 시작부터 섹터2 중반까지 보타스의 폴기록과 비교한 시간을 무전으로 전달받았지만, 어느 순간 비교 대상은 서준하로 바뀌었다.
-잠정 폴 체인지! 준하가 보타스보다 0.04초 앞당겼다! 남은 세 턴 무조건 만들어내라, 페텔!
덕분에 페텔은 더욱 필사적으로 달렸다. 또 한 번 팀 메이트 루키와의 배틀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이런 기횔 놓칠 순 없지...!”
현재까지 결과로 봤을 때 라이벌 해밀턴이 3위에 랭크한 상황. 폴포지션을 차지한다면, 그보다 세 단계 나 앞서 레이스를 시작하며 압박에서 벗어나 레이스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게다가 레이스에서 서준하라는 방패막이를 뒤에 두고 달린다면, 우승은 더욱 쉬워진다.
“디펜스나 해라, 서준하!!!”
자신이 마지막 어태커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 페텔. 서준하가 세운 폴 기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빠르게 마지막 코너를 돌파했다. 그리고,
훼에에에에에에엥.
띠링.
“...!!!”
스타트 라인을 통과함과 동시에 팀 라디오로 전해 들은 자신의 기록. 플라잉 랩을 마친 페텔이 악셀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4R. Qualifying 3 Result]
[Pole. 서준하 – 1:33.253]
[베텔 + 0.01s]
[보타스 + 0.046s]
[해밀턴 + 0.478s]
[리카도 + 1.652s]
단 한 번의 트라이로 1분 33초 263을 기록한 페텔이 폴 기록과 0.01초 차이로 두 번째 그리드를 차지했다.
“이게 무슨...”
14시즌 이후 메르세데스 팀 이외 다른 팀이 예선 1, 2위를 차지한 상황. 게다가 2008 프랑스 GP 이후 9년 만에 처음 페라리 드라이버 두 명이 프론트 로우를 독점한 상황이었지만, 페텔은 도무지 기뻐할 수 없었다. 아쉬움으로 가득한 페라리 카를 이끌고 인 랩을 시작했다.
***
“와아아아!!!”
“수고했어!!!”
프론트 로우 소식에 열광하는 페라리 팀 스태프. 게러지로 들어서는 두 선수를 향해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특히나 서준하 주변으로 모여든 팀원들이 그의 헬멧을 두드리며 이번 시즌 두 번째 폴포지션 획득을 축하했다.
“고생했네, 준하! 섹터 2, 3 돌파는 내가 본 레이스 중 최고였네.”
먼저 콕핏에서 내린 서준하에게 다가가 축하 메시지를 던지는 아리바베네 감독. 섹터 1 트래픽으로 특별한 랩타임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나머지 구간 돌파는 더욱 드라마틱했다. 이어서 땀을 쏟으며 차에서 내린 페텔에게로 다가서는데,
“역시 빠르구만, 레이스에서도 오늘 세팅처럼 가면 문제 없겠네, 고생했어.”
아리바베네의 말에 가벼운 미소로 답하는 페텔. 평소와 조금은 다른 그의 표정이 감독의 눈에 들어왔다. 결과와 상관없이 늘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기에 오늘의 변화는 인상적이었다.
“오셨습니까, 마르치오네.”
메디컬 체크를 위해 두 선수가 빠져나간 페라리 팀 게러지로 페라리의 마르치오네 회장이 들어섰다.
“이번 시즌 아주 만족스러워. 내 믿음에 보답해줘서 고맙네, 아리바베네.”
페라리 회장 자리에 취임한 이후 줄곧 언론을 향해 자신의 꿈, 페라리 팀의 부활을 알려왔던 마르치오네 회장. 오늘 프론트 로우 차지로 팀의 4연승 가능성이 높아지자,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리바베네를 믿고 감독직을 맡겼던 회장으로선, 지금 상황이 더욱 기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앞으로 더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번 시즌 르클레르가 저 차에 탔다면, 비슷한 결과가 나왔으려나, 하하.”
페라리의 레이싱 카를 가리키며 웃는 마르치오네. 카 넘버 옆에 적힌 서준하의 이름을 보고는 또 한 번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늘이야말로 처음 마카오에서 봤을 때가 떠오르더구만. F3카로 F1카와 같은 느낌을 내며 달리는 선수가 서준하였지. 난 지난 시즌 우리가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회장님.”
평소 회장의 말에 농담도 섞어가며 밝은 분위기를 한층 더 띄웠던 아리바베네 감독. 하지만 퀄리파잉을 마치고 팀이 최고의 상황을 맞은 지금,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알아, 알아. 아마 지금 여기서 가장 머리가 복잡한 건 자네겠지...”
그런 감독을 살피던 회장이 눈치를 채고는 조금 전과는 달라진 목소리로 얘길 꺼냈다. 아리바베네 역시 태연하게 웃던 얼굴에서 무언가 고심하는 표정이 됐다.
“아, 네...”
“아리바베네, 내가 취임하자마자 자넬 데려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네.”
오늘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서준하가 다시 한번 팀의 퍼스트 드라이버보다 좋은 결과를 내버린 상황. 사실 지금 아리바베네는 내일 레이스에서 어떤 전략을 써야 할지 고민이 가득했다.
“자네만큼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감독은 내 본 적이 없네. 이번에도 보여줘, 난 그저 그 선택을 존중하겠네.”
다른 팀이 보기엔 페라리의 지금 상황이 행복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정작 레이스를 앞둔 감독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회장이 할 수 있는 건 그에게 변함없는 신뢰와 믿음을 보내는 일뿐이다.
그런 따뜻함을 보이는 마르치오네에게 감사를 표한 아리바베네 감독. 회장이 자리를 뜨자, 그는 곧장 생각에 잠겼다.
“감독님...”
잠시 후, 아리바베네 옆으로 다가선 전략 책임자 안토니오치. 그 역시 다른 스태프들과 달리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감독의 곁에 섰다.
“...”
책임자들의 선택이 늦어질수록 팀은 손해를 본다. 지금은 결단력을 발휘해야 할 상황.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아리바베네 감독을 향해 안토니오치가 조심스럽게 얘길 꺼내는데,
“...준하에게도 한 번 기회를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확신에 가득 찬 표정과 차분한 목소리. 안토니오치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 아마 지금 여기서 가장 머리가 복잡한 건 자네겠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