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연 오늘 그 장면이 나올 수 있을까요? >
“잠시 후 한 시간 뒤면, 본격적인 그랑프리가 시작될 텐데요!”
“와, 정말 많이들 와주셨네요. 지금 저희가 준비한 좌석이 거의 다 찬 것 같습니다.”
F1 4라운드 레이스가 있는 4월의 마지막 일요일, 한국 수원의 월드컵 경기장. 4만 3천여 명 수용 가능한 이곳의 좌석이 절반 이상 차버렸다.
“주최 측에서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정말 이런 응원전이 한국 모터스포츠 사상 처음 있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많은 팬분들이 계신 줄은 전혀 몰랐네요.”
“이 모든 게 서준하 선수 덕분입니다. 한국에서 F1 드라이버가 탄생할 줄, 아니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건 수십 년 전 F1에 뛰어든 일본에서도 못 한 것이거든요?”
서준하의 개인 스폰서 티엘 은행의 주최로 마련된 단체 응원. SNS 반응과 중계방송 시청률로 볼 때, F1과 서준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건 알고 있었지만, 첫 단체 응원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거라고는 쉽사리 예측하지 못했다. 오늘 행사 진행을 맡은 연예인 조진표와 김세창이 끊임없이 모여드는 팬들을 보고 감사와 놀라움을 표시했다.
“확실히 페라리 팀과 서준하를 응원하시는 팬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 경기장 좌석 대부분이 붉은색 물결을 이루고 있는데요.”
서준하의 카 넘버가 적힌 붉은색 티셔츠와 페라리 팀의 마크가 새겨진 유니폼들을 입은 사람들. 대부분 원래 모터스포츠와 에프 원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이들이었지만, 서준하의 활약 이후 페라리 팀의 팬을 자청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직 F1에 대해 많은 걸 알지 못하지만, 단순히 해외 최고 무대에서 상승세를 타고 있는 자국 선수를 응원하는 일에 의미를 두는 사람도 많았다.
“와아아아아아!!!”
경기장 대형 스크린으로 패덕 팀 하우스에서 대기 중인 서준하의 모습이 등장했다. 국내 방송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서준하. 그러자 시작 전 어수선했던 월드컵 경기장이 서준하의 이름과 함성으로 가득찼다.
“서준하 선수를 향해 환호와 함께 깃발과 손을 흔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모습이 곧바로 러시아에 있는 서준하 선수에게 전달될 거라고 하거든요?”
펄럭이는 대형 태극기와 함께 대기 중인 카메라로 응원을 보내는 팬들. 그 모습이 실시간으로 서준하에게 보여졌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서준하가 카메라 바로 앞에 웃는 얼굴과 함께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이제 서준하가 레드 카펫을 걸어나갑니다!!!”
레이스 시작 전 빠질 수 없는 드라이버 퍼레이드. 거대 카고 트럭으로 향하는 레드카펫 위로 서준하가 수십 명의 여성 러시아 그랑프리 공식 모델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
“웰컴! 웰컴! 웰컴! 오늘 드라이버 퍼레이드 행사 진행을 맡은 비탈리 페트로프입니다...!”
2010 시즌 르노에 데뷔한 러시아 최초의 F1 드라이버 비탈리 페트로프. F1 은퇴 이후 주최 측으로부터 매년 러시아 GP 행사의 사회자 요청받아 진행하고 있다.
“페트로프, 잠깐만.”
“오, 안녕하세요, 션.”
하나둘 퍼레이드 카로 올라타는 드라이버들의 뒤를 따르는 깔끔한 양복 차림의 페트로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카고 트럭에 오르기 전 FOM의 션 사장이 그를 불러세웠다.
“이번 시즌에도 시작 전 분위기 잘 띄울 테니 걱정 마세요, 하하.”
“아니, 그게 아니고. 오늘 인터뷰 누구 중심으로 해야 하는지 알지?”
“아, 그럼요. 크비얏과 시로츠킨한테 질문 많이 던지겠습니다.”
소치에서 열리는 GP인 만큼 갤러리 대다수가 러시아 사람들. 션의 말에 페트로프가 러시아 출신 선수들의 이름을 꺼내며 웃어 보이는데,
“내 이럴 줄 알았어. 그 둘만 너무 집중해서는 안 돼. 사람들 관심이 쏠린 쪽으로 해야 할 거 아냐.”
“아, 네, 네. 챔피언들도 좀 다뤄볼게요.”
션의 표정을 보고는 가장 먼저 카고 트럭에 올라타는 페텔과 해밀턴을 가리키는 페트로프. 그 모습에 답답해하던 션이 결국 한 선수를 콕 집어 말했다.
“서준하. 다른 선수들 다 못 해도 상관없어. 오늘은 서준하를 중심으로 다뤄주게.”
또 다른 F1 슈퍼스타 탄생을 위한 FOM의 지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꼭 어제 서준하가 폴포지션을 차지했기 때문에 FOM의 태도가 급변한 게 아니라, 지금 F1에서 가장 핫한 드라이버가 바로 그였다. 소치 서킷에 러시아 사람들이 많더라도, 지금 중계방송으로 인터뷰를 보는 사람들의 관심은 서준하에게 향해 있었으니까.
두두두두두두두두둥.
퍼레이드 카 위에서 드라이버들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 신인과 하위팀 선수들은 트럭 뒤편으로 한데 뭉쳐 있는 반면, 레귤러와 상위권 팀 선수들은 트럭의 앞쪽에서 편한 자세로 퍼레이드를 즐기고 있었다. 카메라맨과 페트로프가 카고 트럭에 오르자 퍼레이드 카가 요란한 엔진음을 내며 서킷을 돌기 시작했다.
“와우, 정말 어제 예선 언빌리버블 했습니다! 여태껏 소치에서 그렇게 빠른 퀄리파잉은 처음이었어요. 안녕하세요!”
러시아인 특유의 영어 발음으로 인터뷰를 시작하는 페트로프. 주변 챔피언 드라이버를 두고 자신에게 먼저 마이크를 들이대는 모습에 서준하가 살짝 당황했다. 이번 시즌은 물론, 거의 모든 GP에서 항상 첫 번째 인터뷰이는 페텔과 해밀턴이었기에 주변 선수들도 그 모습을 흘겨봤다.
“연습 주행 셋업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Q3 직전까지 피드백을 이어가며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소치는 처음이었는데, 운 좋게도 연습 주행과 퀄리파잉의 컨디션이 비슷하면서 좋은 기록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네요.”
인터뷰를 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잊지 않는 서준하. 발음 덕분에 다소 알아듣기 힘든 페트로프의 질문에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답변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서준하 선수의 연승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페라리의 구세주라는 별명까지 붙은 상황인데요. 오늘 레이스 어떨까요?”
계속해서 션 사장의 요청대로 카고 트럭이 서킷의 절반을 지나칠 때까지 계속해서 서준하에게만 질문을 던지는 페트로프. 평소 인터뷰엔 관심 없던 선수들도 오늘과 같은 특별한 상황에 의아하게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해밀턴. 어제 퀄리파잉은 정말 평소 해밀턴답지 않았었는데요. 오늘 레이스에서 지난 러시아 GP와 같은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날이죠. 충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페트로프의 침이 튀겨서인지, 현재 상황과 결과가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그의 질문에 불쾌한 표정으로 얼굴 주변을 만지작거리는 해밀턴. 평소와 다른 무뚝뚝한 표정으로 형식적인 답변을 이어나갔다.
‘이제 이런 모습이 익숙해지도록 만들어줄게.’
그랑프리 하나가 끝날 때마다 팬들의 반응은 날로 커져갔다. 챔피언들의 인터뷰 내용과 주변 드라이버들의 질투 섞인 눈빛을 읽어낸 서준하. 지난번 자신의 우승이 결코 행운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겠다고 마음먹었다.
***
“자, 이제 레이싱 슈트로 환복한 선수들이 다시 홈스트레치로 등장합니다.”
드라이버 퍼레이드를 마치고, 러시아 국가 연주를 위해 서킷으로 등장한 선수들. 선수들 앞으로 러시아의 어린이들과 합창단이 나란히 서며 국가 연주를 시작했다.
“오늘 레이스 폴포지션 서준하 선수를 시작으로 드라이버들이 러시아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입니다.”
세계적으로 그랑프리는 국가적인 행사다. 특히나 러시아 GP는 타이틀 스폰서 없이 국가 주도로 개최됐을 정도로 러시아 내각에서 공들인 행사. 국가 원수까지 직접 팔 걷고 지원에 나서는 모습이 또 한 번 전 세계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제 선수들이 그리드 위에 올라서고 있고요. 어제 퀄리파잉 결과에서 흥미로운 점을 좀 말씀드리면, 바로 페라리와 메르세데스 그리고 나머지 팀들의 기록 격차입니다.”
“그렇습니다. 선두 서준하와 4위 해밀턴까지 0.5초도 차이가 나질 않는 반면, 5위 리카도부터는 1.6초 이상 차이가 납니다. 그 아래로 내려갈수록 차이는 더 심해지구요.”
좀처럼 보기 드문 F1 퀄리파잉의 1.5초 격차. 폴 기록자의 트랙 레코드와 더불어 시즌 초반 중하위권 팀의 몰락이 현저하게 드러났다.
“이제 경주차들 주변으로 미캐닉들이 물러...”
“잠깐만요! 지금 아리바베네가 페라리 피트로 등장했습니다. 인터뷰가 시작되는 것 같은데요? 곧바로 인터뷰 내용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퀄리파잉 종료 후 좀처럼 서킷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아리바베네 감독. 그를 발견한 주최 측 리포터가 인터뷰를 시도했다.
“안녕하세요, 아리바베네 감독님. 페라리 팀은 오늘 레이스 어떤 식으로 풀어나갈 예정인가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페라리 팀은...”
감독의 주위로 더 몰려든 취재진들. 리포터가 평소와 같은 질문 내용으로 감독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자, 아리바베네는 형식적인 답변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많은 F1 팬들이 페라리 듀오의 배틀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과연 오늘 그 장면이 나올 수 있을까요?”
오늘 페라리 팀의 레이스 운용 방향이 어떻게 바뀔지야말로 모든 팬과 관계자들이 가장 궁금했던 사항. 답변을 기다리는 취재진 모두 감독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는데,
“페라리에겐 두 명의 퍼스트 드라이버가 있습니다. 페라리는 더 이상 누군가의 희생으로 우승을 일궈내는 팀이 되지 않을 겁니다...”
리포터의 마지막 질문에 ‘예’, ‘아니오’로 답변하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분명했다. 감독의 말을 알아들은 취재진들이 놀라움을 표시했고, 몇몇은 박수를 보내기까지 했다.
“아리바베네 감독의 방금 저 말은 페라리가 정말로 변화를 시작하겠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군요!”
“이렇게 되면 오늘 그랑프리 우승자를 예측하기가 더욱 어려워졌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감독이 사라지자, 곧바로 그리드로 넘어간 화면. 프론트 로우의 붉은색 페라리카 두 대가 중계 화면과 슈퍼 스크린에 등장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둥.
F1카들의 엔진음만이 가득한 홈스트레치. 서준하가 고갤 돌리자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페텔이 보였다. 목을 꼿꼿이 세우고 조금의 미동도 없는 모습에서 오늘 레이스를 대하는 그의 의지가 드러났다.
‘오늘부터 양보 따윈 없다.’
팀으로부터 오늘 전략을 전달받은 서준하. 폴포지션을 차지한 오늘 레이스 자신의 할 일은 명확해졌다.
‘반드시 폴투윈(Pole to Win)으로 끝낸다!!!’
F1 사상 최연소 폴투윈이라는 역대급 기록을 달성할 기회를 눈앞에 둔 서준하. 출발 신호와 함께 퍼팩트한 스타트를 선보였다.
< 과연 오늘 그 장면이 나올 수 있을까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