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때문에 다 잡은 레이스 날려먹었잖아 >
“...!!!”
소치 오토드롬에 위치한 FIA의 관제 본부(컨트롤 타워) 페텔과 크비얏의 충돌 상황에 오피셜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왜 갑자기 속도를 줄인 거야. 차량에 문제가 생긴 건가?”
“코리안이 저걸 피한 게 더 신기한데? 박살 날 뻔한 건 서준하도 마찬가지였네...”
수습과 현재 상황에 대한 판단으로 혼란스러운 관제 본부. 한켠에선 컨트롤 스크린으로 서준하와의 접촉부터 페텔과의 크러쉬 장면이 리플레이 됐고, 관제 위원과 코스 위원들이 사고 장면을 분석하며 수군거렸다.
화면 속 크비얏의 경주차는 급격히 속도가 줄며 뒤따르던 갑작스러운 장애물이 되어버렸고, 페텔에게 날아들어 그의 앞바퀴를 부숴버렸다.
“이번에도 크비얏이 페텔한테...”
“이번엔 어뢰가 아니고, 지뢰였네, 지뢰...”
이번 시즌 중국 GP를 비롯해 지난 몇 년간 다른 선수들에게 공격적인 드라이빙으로 피해를 줬던 크비얏. 특히나 러시아 GP에서 페텔에게 리타이어를 선사했던 그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와의 악연을 이어갔다.
오늘 레이스 이후 F1 팬들로부터 말도나도와 그로장을 잇는 또 다른 ‘F1 파괴의 신’으로 불리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위원장님! 지금 이거 어떻게 할까요?!”
그랑프리 파이널 랩에서 사고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선두권에서 문제가 생긴 건 이번이 처음이다. 관제본부 최고 지휘자이자 경기위원장직을 맡은 바싸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3턴! 13턴 화면 클로즈업해봐!”
파이널 랩이 거의 끝나가는 상황에서 경기를 중단해야 할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바싸르. 사고 현장 주변의 마샬들의 무전을 기다리며, 13턴에 멈춰선 크비얏의 경주차 주변을 유심히 바라봤다.
“...”
지금 경기를 중단한다면 사고 수습 후 다시 레이스를 치르는 방식이 아니라, 현재 순위 그대로 레이스를 마치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하지만 바싸르의 눈에 이제 곧 13턴을 지나칠 보타스의 경주차가 들어왔다. 고민에 빠진 그가 머릴 감싸쥐던 그때,
“위원장님! 사고 현장 데브리는 런오프 쪽으로 쏠려있답니다!”
트랙의 상황을 알리는 무전이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관제 스크린으로 보타스가 등장했고, 섹터 3을 힘겹게 빠져나가고 있는 그는 앞의 페텔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됐어 그럼! 일단 그대로 진행하고, 12턴 앞쪽에 황색기 더 띄워. 구급위원장, 크비얏의 상태 보고하도록!”
“바싸르! 페텔 뒤로 보타스가 접근합니다!”
꺼져가는 속도로 남은 코스들을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는 세 바퀴의 페텔. 그의 뒤로 냄새를 맡은 메르세데스의 실버 애로우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
“자! 자! 속도가 확실히 줄었지만, 선두 서준하는 계속 달릴 수 있고요! 페텔은 남은 코스들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냐...!”
느린 속도지만 선두를 유지하는 서준하. 17턴을 빠져나가며 이제 피니시 라인까지 마지막 코너만을 남겨뒀다. 그리고 그의 뒤를 추격하는 세 바퀴의 페라리카.
“마치 98시즌 슈마허의 모습을 보는 것 같군요!!”
“페라리 팀도 당황스럽겠습니다. 세 바퀴로 달려야 하는 일이 또 한 번 벌어지다니요...!”
98년도 벨기에 GP에서 백마커 쿨사드와의 추돌로 우측 바퀴를 잃었던 슈마허. 하지만 남은 세 바퀴로도 빠른 속도로 달리며 그가 어떤 드라이버였는지 분명히 보여준 바 있다. 지금 페텔 역시 완주에 대한 투지를 발휘하며 피니시 라인에 접근했다.
“아! 보타스! 기회를 잡은 보타스가 페텔의 뒤까지 쫓아왔어요!!!”
“이렇게 되면, 남은 두 개의 턴에서 페텔이 코너링을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인데요...!!!”
페텔은 좌측으로 꺾이는 코너 한 개를 가까스로 돌아 나오며, 우측으로 꺾이는 마지막 코너 두 개를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서준하도 거의 다 왔어요...!!!”
비록 접촉 사고 이후 세 개의 턴을 돌았지만, 서준하의 완주도 힘겨웠다. 프론트 윙은 경주차의 작은 부분이지만, 다운 포스의 25%나 차지하기에 문제가 생기면 차량 제어에 상당한 어려움을 주기 때문.
“피니시! 우여곡절 끝에 서준하가 먼저 체커기를 받습니다! 2연승을 이어가는 서준하!!!”
“서준하 F1 사상 최연소 폴투윈을 달성합니다! 이번 시즌 페라리의 4연승을 이끄는군요...!”
결국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자마자, 서준하는 위닝랩을 돌지 못하고 멈춰 서고 말았다. 곧이어 서준하의 뒤로 경주차들의 배기음이 들려왔다.
부와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앙.
마지막 코너 직전 보타스가 페텔의 뒤에 있었지만, 코너가 끝나면 그 둘은 나란히 달릴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둘의 레이스를 지켜본 서준하조차 쉽게 한 선수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마지막 코너를 빠져나오고 보타스가 페텔의 옆으로 나오자, 팬들의 함성은 더욱 커졌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승부를 보겠다는 페텔의 모습에서 서준하는 존경심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애초에 멈춰섰어야 했을 페텔의 경주차. 그야말로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으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치고 나와라, 보타스...!’
페텔의 집념에 대한 찬사와는 별개로 지금 맘속으론 보타스가 먼저 들어오길 바랐다. 페텔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도, 팀이 더 높은 포인트를 따는 걸 원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다만,
‘여기서 한 포인트라도 더 멀어져야 해.’
오늘 승리로 종합 랭킹 단독 선두로 올라선 서준하. 챔피언 경쟁 구도에서 한 포인트라도 페텔을 더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선 보타스가 승리해야 했다.
띠링.
동시에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 두 선수의 차량. 서준하의 시선이 곧바로 전광판으로 향했다.
“0.021초 차이! 오늘 레이스 2위는 보타스가 차지합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메르세데스가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던 상황을 보타스가 가까스로 구해내는군요...!”
팬들로부터 엄청난 환호와 박수를 받았지만, 고갤 들지 못하는 페텔. 분노로 가득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서준하의 눈에 들어왔다.
***
“차량 문제도 아니었다면서, 근데 왜 갑자기 속도를 줄인 거냐고.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냐?”
레이스를 마치고 메디컬 체크와 스튜어드들의 판정을 받기 위해 대기실로 들어온 참가 선수들. 크비얏을 발견한 페텔이 그에게 다가서 사고 장면에 대해 물었다.
“비켜주려고 속도를 줄였던 거야.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난 너희가 슬립에 들어온 줄 몰랐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지난 시즌과 똑같이 이번에도 등장한 두 선수의 설전. 크비얏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위닝랩을 마치고 검차대로 복귀한 서준하가 뒤늦게 두 선수의 설전을 듣게 됐다.
“페텔, 넌 내 상황을 정확하게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겠지. 나도 억울하다고.”
“왜 자꾸 나만 들이받는 거냐고, 너 때문에 다 잡은 레이스 날려 먹었잖아. 너 나한테 무슨 원한 있어?”
페텔은 분노를 조절하고 있었고, 그게 서준하의 눈에 보였다. 화를 내지 않는 건 그가 그만큼 현명한 선수이기 때문도 했지만, 어차피 크비얏의 이런 행동으로 그가 F1에서 사라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지금이 시즌 초반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20개의 라운드 중 고작 4개 레이스를 마친 상황. 어쩌면 페텔은 지금이 큰 위기라고 여기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초반 이런 흐름을 뒤엎고 챔피언을 달성했던 시즌이 수차례 있었던 그였으니까. 지금이 시즌 후반이었다면 아마 98년도 슈마허와 쿨사드 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크비얏에게 10 그리드 페널티를 부여합니다. 앞으로 계속 그렇게...”
스튜어드들의 판정이 내려지자, 대기실엔 침묵과 함께 긴장감이 맴돌았다. 심판진의 생각과 오늘 상황의 위험성에 대해 간단히 토의한 드라이버들이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폴투윈 축하한다, 준하.”
서준하가 페텔의 몸 상태를 확인하며 다가서자, 그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인상적인 건 그의 표정이었다. 어제는 물론, 오늘 레이스 시작 전과도 비슷한 무뚝뚝한 표정. 하지만 오늘 레이스 직후에만 드러난 미묘한 차이를 서준하는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마치,
‘다음 라운드에서 보자, 뭐 이런 건가.’
08시즌 자신의 최연소 폴투윈 기록이 깨져버린 오늘, 페텔 분명 더 이상 예전처럼 서준하를 루키나 팀 메이트로서 바라보지 못했다. 간단한 축하 인사를 주고 받은 두 사람, 대화 없이 피트로 걸음을 옮겼다.
***
[월드 드라이버 챔피언십(WDC)]
[종합 순위 – 4 / 20 라운드]
[1위. 서준하 83 포인트]
[2위.페텔 65 포인트]
[3위. 보타스 56 포인트]
[4위. 해밀턴 45 포인트]
[5위. 막누스 43 포인트]
.
.
“지금 이게 말이 돼? 와, 서준하가 83 포인트야.”
“4라운드밖에 안 끝났는데, 2위랑 무려 18 포인트 차이야. 초반에 이런 흐름은 드문데...”
4라운드 그랑프리가 끝나고 정비에 들어간 레드불 팀. 이번 라운드 시상식에 참가할 일 없는 엔지니어들이 정비를 시작하던 중 중계 스크린에 표시된 WDC 종합 순위를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이번 시즌은 루키랑 뉴 드라이버들이 강세네. 봐, 메르세데스도 보타스가 3위야.”
“와, 그러네. 해밀턴이 4위로 내려온 건 정말 처음 본다.”
각 팀 퍼스트 드라이버들과의 포인트 차이에서 앞선 서준하와 보타스, 막누스. 그야말로 세컨드 드라이버들의 반란이었다.
“우리도 나쁘지 않아. 해밀턴과 고작 2점 차이라고. 고생했어, 페르스타펜. 이번 시즌 목표 달성 충분히 가능하겠는걸?”
엔지니어들 곁에 있던 막누스. 시즌 출발이 나쁘지 않은 그에게 스태프들이 칭찬을 건네자, 웃으며 답하려던 찰나,
[F1 사상 최연소 폴투윈을 기록한 서준하 선수입니다!!!]
때마침 중계 스크린으로 흘러나오는 사회자의 목소리. 중계 스크린으로 우승 트로피를 높이 드는 페라리 팀 루키 드라이버의 모습이 등장했다.
“...”
F1 사상 최연소 데뷔, 우승, 페스티스트랩 등등 자신이 세웠던 모든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서준하. 스크린을 바라보는 막누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번 시즌 또 다른 월드 챔피언 후보로 서준하 선수를 꼽는 분들이 많아졌는데요...!]
이어지는 사회자의 멘트에서 그의 표정이 더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데뷔 초, 자신과 라이벌로 지목됐던 선수가 이제는 강력한 월드 챔피언 후보가 되고 말았으니까.
[5R: Spanish Grand Prix]
[Barcelona-Catalunya 14 May]
그런 우울감도 잠시, 중계 스크린에 등장한 다음 그랑프리 장소에 막누스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카탈루냐에선 절대 지지 않아!’
자신의 생애 첫 그랑프리 우승 서킷, 스페인 바르셀로나. 40포인트 차이에도 막누스는 결코 희망의 끈을 내려놓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엔 RB13이다...!’
5차전 대대적인 경주차 업그레이드에 들어간 레드불 레이싱 팀. 천재 엔지니어 아드리안 뉴이의 새로운 버젼의 경주차, RB13이 막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 너 때문에 다 잡은 레이스 날려먹었잖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