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장님께서 따로 서준하 선수를 부르셨습니다 >
[포뮬러 원에는 항상 시대를 풍미했던 드라이버들이 있었습니다. 브라밤, 판지오, 라우다, 피케, 세나, 프로스트, 슈마허...]
포뮬러1의 목소리로 불려왔던 머레이 워커. 1948년부터 현재까지 무려 50년이 넘도록 모터스포츠 중계만으로 영국인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감동과 눈물을 선사했던 전설적인 해설가다. 90세가 넘은 그가 영국 방송국 채널 4와의 인터뷰에서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하지만 오랫동안 챔피언 자리에 머물 것 같았던 그들이 새로운 드라이버들, 주로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신인의 등장으로 챔피언들이 물러나게 됐지요. 아마 이번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의 생각을 조금 더 자세히 듣기 위해 귀 기울이는 기자. 눈을 껌뻑이던 워커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무 멀리 가지 않고, 80년대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80년대 챔피언들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슈마허라는 신인. 그렇게 다시 2000년대 초반 왕좌에 올랐던 슈마허를 무너뜨렸던 알론소라는 신인. 또 슈마허의 은퇴 이후 3연패를 노리는 알론소를 잠재워버린 해밀턴이라는 슈퍼 루키...]
당대 최고의 챔피언들이 연승을 이어갈 때 그들을 저지했던 드라이버는 놀랍게도 동시대 드라이버들이 아닌 새롭게 등장한 루키들이었다. 인생 전반을 F1의 역사와 함께 살아온 워커에겐 챔피언의 역사에 어떠한 패턴이 보이는 듯했다.
[그렇다면 워커 씨도 이번 시즌 새로운 챔피언이 탄생하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뭐 이런 얘기를 꺼내는 타이밍이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네, 저는 그렇게 예측합니다. 이번 시즌만큼은 F1의 새로운 챔피언이 탄생하리라는 예감이 강하게 드는군요]
17시즌 초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빗나갔던 적은 없었지만, F1은 보수적인 스포츠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존 챔피언 드라이버들의 연승이 이어지길 바랐다. 때문에 지금 워커의 인터뷰 내용은 다소 놀라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시즌 챔피언으로 어떤 드라이버를 예측하고 계십니까?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신인 드라이버겠지요?]
기자의 말에 고갤 끄덕이는 워커. 특유의 인자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향해 입을 여는데,
[페라리의 루키 드라이버, 서준하 선수가 이번 시즌 챔피언 자리에 오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준하의 성공적인 데뷔전 이후에도 F1 언론 모두 루키의 챔피언 달성이 오래 걸릴 것이라는 태도를 보였지만, 워커는 달랐다. 어딘가 확신에 찬 그의 표정과 말들은 보는 이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게다가 누구보다 F1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프로 중의 프로이기에 그의 말에 무게가 실렸다.
띠융.
영국 블레츨리 메르세데스 팀의 본부. 워커의 마지막 말을 듣고는 해밀턴의 레이스 엔지니어 보노가 TV를 꺼버렸다.
“선생님도 판단력이 많이 흐려지셨어. 네 경기를 마친 시점에 저런 소릴 떠들고 계시다니.”
불쾌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던 보노. 스크린이 꺼지자, 소파에 몸을 던지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곁에선 해밀턴의 표정을 한 번 살피는데,
“저건 이번에 나눈 인터뷰가 아니야. 1라운드가 끝나고 하셨던 게 지금 회자되고 있는 거야.”
“뭐? 이번에 하신 게 아니라고?”
4라운드 종료 직후 서준하가 단독 선두로 있는 상황이었다면, 워커와 같은 말을 내뱉는 사람이 종종 있었을 거다. 하지만 워커의 인터뷰는 1라운드 직후 나눴던 내용으로, 인터뷰 발표 당시 언론과 팬들로부터 엄청난 혹평을 받고 있었다. 뒤늦게 인터뷰를 봤던 보노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거 페라리 팀 주가가 치솟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지금 서준하는 영국은 물론, 전 세계 F1 언론들로부터 조명을 받고 있었다. 덕분에 과거 그에 대한 코멘트 영상들과 인용문들까지 재조명받고 있는 상황. 선수는 물론, 덩달아 소속 팀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띠디딩.
워커의 인터뷰에 관심을 보이던 보노가 다시 TV를 켰다. 스크린으로 다시 한번 평온한 표정의 워커가 등장했다.
[...07년도는 해밀턴의 데뷔 시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데뷔 해에 무려 11번이나 포디엄에 오르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렇죠... 마지막 그랑프리에서 차량 문제만 아니었다면, 데뷔 시즌에서 챔피언에 오를 수 있었으니까요]
[그때도 역시 3연패를 달성하려는 챔피언을 막은 건 신인 드라이버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해, 해밀턴은 데뷔 2년 차에 챔피언에 오르면서 2010년대 최정상 드라이버로 군림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확인했습니다. 슈퍼 루키가 데뷔 시즌이나 바로 그다음 시즌에 챔피언에 오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요...]
자신의 얘기에 더욱 집중해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해밀턴. 십 년 전 자신의 성공을 예측했던 워커의 인터뷰 내용이 떠오르는 듯했다. 워커는 해밀턴이 07년도 데뷔 시즌 첫 라운드에서 3위를 달성했을 때에도 오늘과 비슷한 인터뷰를 했었고, 그것이 화제가 됐었던 적이 있었다.
[저는 심지어 서준하 선수가 사상 최고의 슈퍼 루키가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지금 해밀턴의 모습과는 다를 거라는 예감이 드는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해밀턴은 첫 챔피언 달성 이후 6년 뒤에야 다시 정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팀과 차량에 대한 문제 등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아마 그때 당시에는 드라이버 개인적으로 챔피언 자릴 유지할 능력이 부족했던 걸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금은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드라이버가 됐지만요]
커리어 초반, 상승세를 탄 신인으로서 혼자 기고만장하는 느낌을 보여줬던 해밀턴. 몇몇 중견 드라이버들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와 성숙하지 못한 드라이빙 때문에 언론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었다.
[해밀턴의 젊은 시절 그런 모습들은 루키라면 당연히 부족했을 부분들이 드러난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준하라는 루키는 말이죠...]
여전히 불쾌한 표정의 보노와 달리 해밀턴은 워커의 말에 고갤 끄덕이며 더욱 스크린에 집중하는데,
[F1 관계자들이나 언론이 바라는, F1팬들이 기대하는 챔피언의 모습을 제대로 갖췄다고 평가할만해요. 저는 이 선수가 F1이 원하는 최고의 드라이버가 과연 어떤 것인지 분명히 보여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계 각국의 미디어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루키 드라이버들에 대한 비판. 하지만 포뮬러 입문부터 현재까지 서준하에 대한 비판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성적은 물론, F1 안팎에서의 그의 행동이 완벽했기 때문.
“...웃기고 있네.”
오랜 기간 워커와 교류해오며 속으로 그를 깊이 존경했던 해밀턴. 인터뷰 초반 보노의 비판처럼 좀처럼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워커의 마지막 말에 배신감 비슷한 감정이 차올랐다.
“한 번도 콕핏에 올라본 적 없으면서... 최고니 뭐니, 너무 헛소릴 하잖아.”
순간 가슴 속에 뜨거운 불길이 일었고, 해밀턴은 거침없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지금 이 순간 코멘테이터들 전부, 서킷 밖에서 F1에 대해 떠드는 가짜들처럼 느껴졌고, 그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이번엔 진짜 개박살 내줘야겠어.”
인터뷰를 마치고 스크린에 등장한 서준하의 1라운드 시상식 모습. 얼굴이 붉어진 해밀턴이 주먹을 불끈 쥐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
“세상에! 아직도 이렇게나 많아...!”
며칠간 소치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유럽으로 긴 여정을 떠나는 페라리 팀. 4라운드 동안 묶었던 소치의 어느 호텔을 나서자, 주변에 대기 중이던 팬들이 페라리 팀을 배웅했다. 특히나 스태프들 가운데 서준하를 발견한 언론과 팬들은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 레이스 끝나고 이랬던 적 있었나...?”
“반응이 확실히 달라졌어. 준하 또 인터뷰 해야겠는걸?”
롭과 서윤이 보기에도 너무나 달라진 풍경들. 레이스가 끝난 월요일에도 서준하에 대한 인기는 식지 않았다. 그들의 예상처럼 호텔을 빠져나가며 주위로 모여드는 기자들 덕분에 서준하의 몸은 또다시 쉬질 못했다.
“준하! 준하!!”
아침 일찍부터 자신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아준 팬들을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드는 서준하. 전생 자신의 마지막 시즌에서나 볼 수 있었던 팬들의 반응이 조금은 놀라웠다.
서준하가 영국이나 독일 출신 드라이버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티포시들의 사랑은 더욱 커졌다. 팬들 가운데 티포시와 한국 팬 말고도 동남아 팬들도 많았는데, 케이팝 스타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그의 외모 또한 팬심을 사로잡는데 한몫했다.
“후... 이번에는 8시간짜리 비행이지 아마?”
페라리 팀 전용기가 있음에도 시즌 내내 거의 매주 비행을 하는 건 굉장히 피로한 일. 비행기 탑승 장소에 도착한 서준하와 한서윤, 그리고 롭이 짐을 싣기 위해 스태프들 뒤로 다가섰다.
“페텔은 먼저 갔나 봐?”
“레이스 끝나자마자 당일에 바로 떠났대. 걔는 전용기가 있잖아.”
“...그렇구나.”
선수 개인 전용기를 보유한 페텔은 이미 빠르게 다음 장소로 이동한 상황. 롭의 말에 한서윤이 부럽다는 눈치로 바라봤다. 페라리 팀도 전용기로 서킷을 오고 갔지만, 100여 명의 스태프와 함께 동승했다. 그런데,
“오늘 서준하 선수는 이쪽에 타도록 하시죠.”
“네...?”
“회장님께서 따로 서준하 선수를 부르셨습니다. 함께 가시죠. 짐은 저희가 따로 옮겨놓도록 하겠습니다.”
탑승 대기 중이던 서준하 곁으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다가섰다. 팀 비행기 옆의 또 다른 전용기를 가리키는 남자.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페라리 팀의 스폰서 비스타 글로벌 제트의 비행기로 안내했다.
“어서 오게, 준하 군.”
회장이 자신을 직접 부른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객실로 들어서자 환히 웃으며 자신을 맞이하는 마르치오네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 비행은 좀 편하게 가도록 하게. 유럽까진 거리가 좀 멀잖아?”
시즌 초반 서준하에 대한 팀의 대우는 서서히 달라졌다. 하지만 4차전 이후 단독 챔피언 랭킹 1위에 오른 지금 그 대우는 확실히 달라졌다. 게다가,
“아 그리고, 스페인에서부터 이 비행기는 이제 자네가 타고 다니도록 하게. 이 비행기가 맞지, 마르코?”
국내에서도 0.0001% VVIP만이 타고 다니는 전용기. 전용기 탑승에 대한 절차를 설명하는 수행원의 모습에 서준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생의 데뷔 3년 차 챔피언을 앞둔 순간에도 이런 파격적인 지원은 없었으니까.
‘전용기를 벌써?!’
아직 한 시즌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신인에게 쏟아지는 특별대우. 이제 페라리는 물론, 팀의 스폰서들까지 서준하에 대한 엄청난 지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 회장님께서 따로 서준하 선수를 부르셨습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