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래서 F1이 재밌는 곳이라니까? >
“어제 오전 FP1을 제외하면 현재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가장 빠른 기록을 내는 선수는 단연 해밀턴이군요.”
“그렇습니다. 이게 원래 해밀턴의 본모습이죠. 단순히 컨디션 문제 따위로 페이스가 흔들리는 선수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 이 선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고요.”
5차전 스페인 그랑프리의 토요일 오후. FP1을 제외한 현재 Q2까지 모든 섹션에서의 선두는 해밀턴이었다. 심지어 모든 섹션에서 2위와의 격차가 0.5초를 넘었을 정도로 그는 압도적으로 빨랐다.
매 그랑프리마다 피렐리에서 지정한 세 개의 타이어를 골라 사용해야 하는 규정이 있다. 이번 그랑프리 Q3로 지정된 타이어는 비교적 단단한 S 타이어. 참가 팀 대부분이 Q3에서도 워밍업 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5R Qualifying 3]
[PIT LANE OPEN]
드디어 마지막 퀄리파잉이 시작됐고, Q3 진출자 대다수가 일찍이 서킷에 나왔다.
“가장 먼저 어택을 시작하는 레드불 레이싱 팀! 막누스와 리카도가 롤링을 하며 아웃 랩을 마쳤습니다!”
“이번 라운드 상당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는 레드불 팀이거든요? 오늘 Q2 기록까지 봤을 땐 레이싱카의 업그레이드가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두 선수도 본선 레이스에서 상당히 좋은 위치를 점할 것으로 보이는군요!”
해밀턴 다음으로 좋은 기록을 냈던 레드불 드라이버들. F1 서킷 가운데, 다운포스 세팅을 최대한 높여야 하는 바르셀로나 서킷에서 레드불의 신형 레이싱카가 가진 장점이 고스란히 발휘됐다.
레드불로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시즌 초반 컨스트럭터 챔피언 구도에서 완전히 밀려난 상황에서 분위기 전환이 시급했다. 시즌의 한 쳅터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유럽 무대가 시작되는 이번 5라운드가 바로 그 반전의 기회였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웃 랩을 마친 막누스가 본격적인 플라잉 랩에 들어갔다. 첫 랩의 1, 2턴에서 무리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과감히 레이트 에이팩스를 잡으며 코너링을 시도했다.
‘코너링은 여전히 빠르다...!’
FIA의 새 다운포스 규정에 맞으면서도 차량 밸런스는 크게 무너지지 않도록 업데이트된 이번 라운드 레드불의 경주차. 규정 변화에도 다운포스는 높은 수준을 유지했고, 특히나 고속 코너에서도 RB13의 빠른 코너링은 여전했다.
‘예전 같았으면... 뒤늦게 브레이킹 했겠지만...’
플라잉 랩을 시작하고 이제 3턴의 초대형 헤어핀에 진입한 막누스. 예전처럼 헤어핀 돌파 속도를 높이기 위해 첫 진입을 빠르게 하기보다 이제는 탈출 가속 시점을 일찍 가져가는 데 집중했다.
‘이젠 어디서 감속해야 빠른지 감이 온다고!’
3년 전, 막누스는 주변의 기대를 안고, 투지와 열정만으로 이곳을 돌았다. 덕분에 코너링 돌파는 거칠었고, 초를 아낄 수 있는 미세한 포인트들을 놓쳤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머신을 미숙하게 다루지 않았다. 이번 연습주행과 퀄리파잉에서 머신을 더욱 섬세하게 다루는 연습을 하고 퀄리파잉에 올라왔다.
-섹터 2 피니시! 55초 821! 이번 라운드 통틀어 현재까지 페스티스트! 퍼펙트한 마무리를 부탁한다, 막누스!!
많은 언론이 작년 스페인 GP 막누스의 우승을 저평가했다. 해밀턴과 로즈버그가 사고로 인해 동반 리타이어한 행운을 얻은 것일 뿐이라고. 사실, 행운이 있었던 건 맞지만, 기회는 막누스 말고 다른 선수에게도 주어졌다. 게다가 사고는 경기 초반에 일어났기에 50랩 가까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차지한 트로피였다.
“순전히 운이 아니었다는 걸 보여줄게...!”
규정 변화로 높아진 다운포스가 만드는 드래그로 인해 직선 주로에서의 속도는 떨어졌지만, 고속 코너가 많은 카탈루냐에서 막누스는 오히려 초를 회복했고, 현재까지 가장 빠른 돌파를 이뤄냈다. 그리고,
띠링.
-와! 와아아!!! 와아아아!!! 1분 19초 306!!!
끝까지 집중력의 끈을 놓지 않고 스타트 라인에 들어온 막누스가 잠정 폴 기록을 세웠다.
'흐음?'
흥분해 소리를 지르는 레니의 목소리와 함께 이제 막 아웃 랩을 시작한 경주차 몇 대가 보였다. 막누스의 눈에 ‘넘버 50’의 페라리카가 들어왔다.
‘따라와 봐, 새끼야.’
자신의 타겟 목표보다 1초나 앞선 엄청난 기록. 이번 시즌 내내 받았던 설움이 씻겨나가며, 의기양양한 태도로 페라리카를 응시하던 그때,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훼에에에에에엥.
경주차 뒤쪽에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포뮬러카들의 배기음. 심상치 않은 기척에 막누스의 들뜬 기분이 갑작스럽게 가라앉아 버렸다.
-리카도, 1분 20초 175! 우리가 압도적이다, 하하하!!!
자신보다 1초 가까이 느린 팀 메이트의 랩타임. 레니의 기쁜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막누스는 여전히 긴장을 놓지 못했다. 그건 바로,
훼에에에에에에에에엥.
리카도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메르세데스의 실버 애로우. 스타트 라인 통과 직전 앞차의 슬립을 타고 들어온 해밀턴이 무서운 속도로 막누스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서 저렇게 달릴 수 있다고?!'
결국, 팀으로부터 경쟁자의 랩타임을 확인하기 전에 막누스는 원인 모를 불안함에 휩싸였다. 어제오늘 카탈루냐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F1 차량의 스피드를 느낀 순간이었다.
***
“나왔다...!”
레드불 팀의 어택 종료를 끝으로 시작된 해밀턴의 플라잉 랩. 랩타임 측정이 시작되는 스타트 라인을 최고속으로 통과하기 위해 아웃 랩의 마지막 코너에서부터 스피드를 끌어올린 해밀턴의 경주차가 메르세데스 팀 중계 스크린에 등장했다.
[Speed Trap: No.44 HAM]
[Top Speed: 326.5km/h...]
새 다운포스 규정으로 인한 드래그 증가로 지난해 스페인 GP 최고속도보다 15km/h 뒤진 기록이었지만, 오늘 예선까지 320km/h를 넘은 선수는 지금 해밀턴이 유일했다.
이번 차량 업데이트로 더욱 가벼워진 메르세데스 경주차. 파워 유닛의 무게와 해밀턴의 빠른 숏런이 시너지를 발휘한 순간이었다. 플라잉 랩 출발부터 메르세데스 피트 월은 엄청난 기대감에 휩싸였다.
“어! 어! 1턴 진입 속도가 너무 빠른데?! 내리막이라는 걸 잊은 거 아니야?!”
홈스트레치의 최고속으로 달려온 해밀턴. 약간의 내리막인 1턴 진입 시작에서도 좀처럼 속도를 줄이지 않자, 퍼포먼스 엔지니어들이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끼이이이이이이익.
팀의 우려와 달리 해밀턴의 브레이킹 타이밍은 늦었지만, 코너 안으로 깊이 파고 들며 차량의 방향을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현재 경주차와 드라이버의 컨디션은 완벽한 상태. 브레이크 답력 조절에 엄청난 자신감을 드러내며 아찔한 돌파에 성공했다.
“계속해서 진입 속도가 너무 빠른데... 저러다 한번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로, 로이스가 많이 흥분한 것 같습니다, 테오!”
해밀턴은 이어지는 돌파에도 굉장히 타이트한 주행을 가져가며 수석 트랙 엔지니어 마틴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테오 감독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
“내버려 둬. 저게 원래 저 녀석의 스타일이야.”
07년도 데뷔 시즌 당시의 드라이빙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오늘 주행. 신인 시절 해밀턴은 한 번 폭풍 질주를 시작하게 되면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미친놈이 돼버렸다.
“게다가 오늘은 저런 드라이빙을 보여줄 필요가 있으니까...”
이런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퀄리파잉에서도 종종 엄청난 기록을 뽑아냈던 적이 있었던 해밀턴. 테오는 오히려 흡족한 표정을 보이며 말을 꺼냈다. 그리고,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카탈루냐 서킷의 최대 G포스는 4.5G. 엄청난 압박 속에서도 스피드를 내려놓지 않자, 순간 해밀턴은 어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백스트레치를 빠져나온 것도 잠시, 그렇게 마지막 섹터에 접어들었다.
-섹터 2 피니시! 잠정 폴보다 0.145초 빨라. 섹터3에선 흥분을 좀 가라앉혀, 로이스!
Q3 시작부터 가장 불안했던 사람은 해밀턴의 레이스 엔지니어 보노였다. 섹터 3에선 길이 좁아, 순간 가속을 많이 할수록 라인이 크게 흔들려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게다가 현재 충분히 빠른 랩타임을 기록 중이라 이쯤에선 드라이버에게 평정심을 유지하라는 오더를 내려야 했다. 하지만,
“...닥쳐. 그냥 닥치고 있어라, 보노.”
긍정적인 랩타임에도 해밀턴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 Q3 자신의 목표는 잠정 폴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로이스 해밀턴! 섹터3의 14, 15턴을 남겨둔 상황에서 잠정 폴 기록보다 0.222초 빠릅니다...!”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어느 누구도 감히 뛰어넘지 못할 레코드를 세우는 일. 오늘 퀄리파잉에서 해밀턴은 현시대 숏런 최강 드라이버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달렸다.
***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훼에에에에에엥.
아웃 랩의 마지막 코너를 벗어나기까지 타이어 예열에 최대한 집중하고 있던 서준하. 그의 옆으로 해밀턴의 경주차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
-미, 미쳤다... 저 좁은 구간을 저 스피드로 돌파한다고?!
서킷 밖에서도 해밀턴의 좁은 섹터3 코스 돌파는 빨라 보였지만, 실제 트랙에서 서준하가 느낀 스피드는 더욱 엄청났다. 플라잉 랩 시작에 앞서 본격적으로 공략 준비에 들어가야 하는 서준하를 순간 멍해지게 만들었을 정도.
띠링.
-...빠르다. 해밀턴 피니시, 1분 19.064초...
그렇게 빠른 속도로 사라진 해밀턴이 스타트 라인을 통과했고, 롭이 곧장 그의 기록을 무전으로 알렸다.
-오늘은 진짜 작정했어 저 녀석. 트, 트랙 레코드야...
“우후후후...”
빠르다고 생각했던 막누스의 폴 기록보다 0.025초나 앞당긴 해밀턴의 랩타임. 조금 전 그 스피드를 보고 어느 정도 직감했지만, 생각보다 랩타임은 굉장히 빨랐다. 롭이 당황함을 드러낼 때쯤 팀 라디오로 울려 퍼지는 서준하의 웃음소리.
-야, 지, 지금 상황이 웃겨...?
그 이후에도 페라리의 팀 라디오에는 서준하의 웃음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의 경주차가 마지막 코너에 접근할 때쯤 웃음이 멈췄는데,
“이래서 F1이 재밌는 곳이라니까?”
-뭐?!
팀의 분위기와 반대로 서준하는 지금 상황이 즐거웠다. 불안과 걱정보다는 해보고 싶다는 의지와 승부욕이 치솟았다.
“해밀턴이 카탈루냐 서킷 트랙 레코드를 세운 가운데, 이제 갤러리의 시선이 또 다른 선수에게 향합니다!”
마지막 코너를 빠져나온 서준하. 본격적인 플라잉 랩을 위해 스타트 라인까지 빠르게 스피드를 올렸다.
“계속 덤비고 싶게 만들잖아!!!”
-...!!!
광기 앞에 등장한 또 다른 광기. 최강자의 폭풍 질주에 서준하의 가슴속 무언가가 다시 한번 불타올랐다.
< 이래서 F1이 재밌는 곳이라니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