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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턴 진입했습니다! 선두와 격차는 0.412초! 이제 남은 저속 시케인 통과 속도만 좋으면...!”
초조한 표졍으로 서준하의 Q3 플라잉 랩을 지켜보는 페라리 팀 스태프들. 피니시까지 몇 코스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 피트의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페텔도 13턴 진입했습니다. 잠정 폴과 격차는 0.394초! 섹터1,2 랩타임은 준하와 비슷합니다!”
팀의 드라이버 두 명 모두 섹터 1,2 타겟 랩타임보다 훨씬 좋은 랩타임을 끊어냈고, 순위권 경쟁자들 대다수가 어택을 마친 상황에 페라리 듀오의 최종 기록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준하 피니시! 1분 19초 439!”
이번 시즌 퀄리파잉에서 두 선수 모두 동일한 어택 타이밍을 가져가기로 한 건 팀의 전략이었다. 서준하를 시작으로 스타트 라인을 통과하는 팀의 경주차들. 트랙 엔지니어들이 수석 코치진들에게 보고를 올렸다.
“페텔 피니시! 1분 19초 373! 한 번 더 어택 들어갈까요?!”
“흠...”
19초대라는 타겟 랩타임보다 좋은 기록을 얻었지만, 두 선수 모두 해밀턴과 막누스의 기록을 넘지 못했다. 컨트롤라인의 재어택 오더를 기다리는 두 경주차가 여전히 홈스트레치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모습이 아리바베네의 눈에 들어왔다. 빠르게 오더를 내려하는 상황인데,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습니다. 일단 멈추는 게 좋겠습니다, 감독님.”
“그래, 그래야할 것 같지?”
중계 스크린을 바라보던 기술 감독 비노토가 감독에게 어택 중단을 요청하자, 감독이 레이스 엔지니어들에게 오더를 내렸다.
“둘 다 실수 한 번 없었는데, 기록 차이가 꽤 나는구만...”
“메르세데스와 레드불 차량의 업그레이드가 생각보다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잠정 3,4위로 랭크한 페라리 드라이버들. 그들의 실력이 뒤졌다기보단 차량 간 성능 차이가 드러났다. 페라리의 레이싱카는 바뀐 규정에 따라 충분한 다운포스를 뽑아내지 못하며 고속 코너 세션에서 몇 차례나 속도가 뒤지는 현상을 보였다.
“보타스가 재어택을 시작합니다!”
“메르세데스 놈들 이번 라운드에서 제대로 뽑아내겠다는 걸로 보이는데요...”
일찍부터 어택을 시작했던 보타스가 페라리 듀오의 피니시로 5위까지 밀려났지만, 페라리 팀이 속도를 줄이는 걸 본 메르세데스는 재빠르게 전략을 수정했다.
퀄리파잉 종료를 1분 앞두고 보타스가 또 한 번의 플라잉 랩을 시작한 상황. 페라리로선 드라이버와 팀 모두 전력을 다했기에 아쉬움은 없었지만, 차량 성능이 뒤쳐진다는 사실에 마음이 급해졌다. 보타스가 피니시 라인에 가까워질수록 페라리 피트 월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는데,
“보타스 피니시!”
마지막 주자가 골인하며 Q3가 막을 내렸고, 최종 그리드 순위가 전광판에 표기됐다. 예상했던 대로 페라리 듀오는 4,5위로 밀려나자, 코치진들 모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안토니오치 만큼은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나쁘지만은 않다...?”
감독이 그 이유를 묻자, 안토니아치가 카탈루냐 서킷의 두 직선 주로를 손으로 가리켰다.
“100m라면 충분히 수차례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습니까?”
이번 카탈루냐 서킷에서부터 처음으로 적용되는 특별 DRS 규정. 지난 러시아 GP에서 추월 성공 횟수는 현저히 낮았고, 이에 따라 FIA에선 DRS 존을 100m 늘리는 방안을 도입했다.
“오히려 우리가 임팩트를 더 크게 가져갈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르죠.”
“임팩트라...”
바르셀로나에선 공기역학적 성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으면 섹터3에서 앞차의 뒤로 바짝 따라붙기 어렵지만, 반대로 스트레이트에서 앞 차의 드래그가 극대화된다는 점을 생각했을 땐, 의외로 추월 시도가 제법 성공을 거둘지도 모른다.
“충분히 추월쇼가 나올 만합니다.”
검차대로 복귀한 페라리카를 바라보는 안토니아치. 아이러니하게도 평소와 달리 인터뷰 없이 빠르게 현장을 빠져나가는 서준하의 모습에서 또 다른 기대감을 품었다.
***
“네가 치고 가는 바람에 내가 두 번째 어택 기회를 잃었잖아!”
“뭐?! 나는 그냥 내 레이싱 라인을 달렸을 뿐이라고, 서행을 할 거면 앞에서 완전히 물러나줘야 하는 거 아니야?!”
Q3를 마치고 드라이버들이 자리한 프레스 컨퍼런스. 자우버 팀의 베를라인과 윌리엄스의 스트롤이 Q2에서 벌어진 충돌 문제를 두고 말싸움을 시작했다. 덕분에 오늘 충돌에 대해 간단한 질문을 던졌던 취재진이 어쩔 줄을 몰라 했는데,
“진짜 뻔뻔한 게 서킷에서도 드러나는구나. 누가 페이 드라이버 아니랄까봐. 나 참...”
“원래 모터스포츠는 돈 없으면 힘든 곳이야. 너도 조건 달고 시트에 앉은 거 아니냐? 말 좀 똑바로 해라.”
메르세데스가 매노어에 엔진 공급을 저렴하게 해주는 대가로 F1에 데뷔했던 베를라인과 윌리엄스를 스폰하는 캐나다 사업가의 아들로서 쉽게 콕핏을 차지한 스트롤. 평소 유쾌했던 프레스 컨퍼런스 분위기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야! 쟤네들 사람들 불러 놓고 뭐하는 거야?!”
“...”
“후... 빨리 끝내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라고 전해, 얼른!”
이번 그랑프리 폭 넓은 팬 베이스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FOM. 션 사장이 특별히 마련한 스테이지 위에서 수많은 갤러리들 앞의 컨퍼런스가 엉망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한 두 선수의 싸움. 실랑이를 중재하지 못하는 스태프들이 어쩔 줄 몰라하던 순간, 스테이지 가장 앞에 앉은 한 선수가 작은 목소리로 옆에 앉은 선수에게 말을 꺼냈다.
“Shall we go?”
“크흐흐흐...”
“그러니까 네 잘못이...”
주의를 환기시키는 듯한 그의 말 한 마디에 스테이지는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고, 베를라인과 스트롤 두 선수가 분위기를 파악하고 다툼을 멈췄다.
“역시... 앞에 앉히길 잘했어. 진행자보다 낫구만, 이거.”
“어린 친구가 제법이네요, 하하.”
모두가 어쩔 줄 모르는 분위기를 농담 한 마디로 전환해버린 센스. 그 주인공은 바로 서준하였다. 갤러리와 취재진 사이에서 터져나온 웃음은 물론, 스테이지의 가장 맨 앞에 앉은 그의 주위로 주변 선수들까지 재밌다는 반응을 보였다.
“체이스 회장님이 눈여겨 보시는 이유가 있군요...”
“그래, 맞아. 기회는 저런 친구들한테 주어져야지.”
체이스 회장의 지시로 서준하를 지원하고 있는 FOM의 션 사장. 처음 회장의 선택에 의문을 품었지만, 오늘에서야 조금씩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서준하는 단순히 실력과 특별한 배경만이 전부가 아닌 선수였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드러나는 센스와 순발력에서 슈퍼스타가 갖춰야할 덕목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헤이, 준하. 오늘 재밌었다, 하하.”
프레스 컨퍼런스를 마치고 뿔뿔이 흩어지는 드라이버들. 페라리의 팀 하우스로 걸음을 옮기는 서준하의 뒤로 F1의 오랜 터줏대감, 마싸가 다가섰다.
“오우, 마싸 형.”
2000년대 초반부터 F1에서 활약해온 레귤러 드라이버 마싸. 워낙 나이 차이도 많고, 부딪힐 일도 없었기에 서준하와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직접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언제 기회가 되면 나랑 같이 움직이자. 매번 가만히 누워서 비행기 타는 것도 지겹잖아?”
다음 그랑프리 장소로 이동하며 친한 드라이버들과 함께 가벼운 파티를 즐기는 마싸. 어딘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는 듯한 눈빛과 함께 언제 한 번 자신의 전용기로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그럴까요? 다음 모나코 때 한번 같이 가죠.”
F1 슈퍼스타가 되려면, 주변 드라이버들과의 좋은 관계 유지도 필수. F1 드라이버에 대한 평가는 온전히 서킷 위의 실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회를 포착한 서준하가 재빠르게 마싸와 약속을 잡았다.
***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도련님.”
“안녕하세요, 박사님. 잘 지내셨나요?”
스위스 제네바 호숫가에 위치한 한 저택.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제프 슈마허가 철저한 보안 절차를 마치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왔다. 뇌 치료 전문가 개리 하트슈타인 박사가 반가운 얼굴로 제프를 맞이했다.
“다행히도 며칠 전부터 의식이 확실히 또렷해지셨습니다. 급히 찾으시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연락을 드리게 됐습니다.”
“네네, 근데 말을 하신다고요?”
“요 며칠간 도련님 이름을 계속 부르시더군요.”
“이름을요...?! 지금 들어가 봐도 괜찮을까요?”
2013년 12월 프랑스 알프스의 한 스키장에서 스키를 타다 넘어져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던 F1의 전설 마누엘 슈마허. 지난 몇 년 간 최소한의 의식만 남기고, 식물인간 상태로 지냈던 그가 몇 개월 전부터 호전을 보이다, 최근 급격히 간단한 대화까지 가능한 상태가 됐다. 의식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 아들 제프를 불러들였는데,
“찾으셨어요?”
“제프...”
여전히 병실에 누워있지만, 호흡기를 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만 빼고 어느 것도 움직이지 못했던 그가 호흡기 없이 스스로 숨을 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변화에 제프의 눈가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페라리... 드라이버... 축하...”
지난달 사진을 통해 제프가 페라리 팀에 입단한 사실을 봤지만, 정작 자신의 입으론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를 꺼내지 못했던 마누엘. 말을 꺼낼 수 있게 되면서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은 단연, F1 무대에 오른 자신의 아들이었다.
“아직 기본적인 의사소통만 가능하신 상태입니다. 한 번에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시는 건 힘드실 겁니다...”
하트슈타인 박사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제프는 좀처럼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주 조금이지만, 말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기적처럼 느껴졌고, 더듬거리는 아버지와 함께 지난 몇 년간의 시간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휴식을 취하던 마누엘이 다시 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드라이버... 페라리...”
“페라리의 드라이버요?”
지금 누구보다 제프가 페라리카에 오르는 걸 보고 싶은 사람은 마누엘이었다. 마누엘은 페라리 팀의 주전자릴 꽤 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았기에, 아들과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이제 제프가 경쟁해야 할 상대가 누군지 궁금했다.
“이번 시즌 페라리가 4연승을 달리고 있어요, 아버지. 이것 좀 보세요.”
“페텔...”
제프가 휴대폰을 열어 페라리 드라이버들의 사진을 보여줬다. 한 때 자신의 멘티였던 페텔의 모습이 보이자, 마누엘이 묘한 감정을 느끼며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옆으로 또 다른 드라이버에게로 시선이 향하는데,
“준하, 한국 출신 드라이버죠. 지난 시즌 페라리에 입단한 신인에요.”
화면 속 동양인 드라이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 마누엘. 2013년 이후 F1에 대한 기억이 없는 그에게 사진 속 또 다른 드라이버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코리안...?”
아들의 설명을 듣고는 사진 속 인물을 다시 바라보는 마누엘 슈마허. 이제는 어딘가 낯설지 않은 남자의 얼굴에서 그의 오래전 기억들이 떠오르는 듯했다.
< 아직 기본적인 의사소통만 가능하신 상태입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