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 0.001초라도 빨라졌다면, 그걸로 충분해 >
5차전 스페인 그랑프리가 시작되기 전, 2000년대 F1의 전유물이었던 V10 터보엔진을 장착한 포뮬러카 세 대가 카탈루냐 서킷을 질주를 시작했다. 최대 675마력 이상의 고막을 찢을 듯한 V10 엔진음이 바르셀로나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현재 서킷을 도는 경주차들은 2인승이 가능하도록 특수 제작된 차량들. FOM이 준비한 F1 Experience의 메인 이벤트인 투 시터 익스페리언스(F1 2-Seater Experience) 진행 장면이 서킷 내 슈퍼 스크린은 물론, 전 세계로 방송됐다.
“으어어어어어어어...!”
특히나 오늘 이벤트에 참여하는 게스트들 덕분에 보는 이의 관심은 굉장히 뜨거웠다. 해외 유명 드라마, 왕좌의 게임 배우들이 F1 드라이버와 함께 F1카를 타는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괜찮아요, 피터?”
“오오오오오마마마마이이이 갓!”
선두 차량 드라이버 알론소와 동승한 작은 악마, 티리온 역의 피터 딘클리지. 카탈루냐 서킷의 완만한 고속 코너 3턴으로 이벤트 경주 차량들이 들어섰다. 선회 시 드라이버와 탑승객이 받는 G-포스는 최대 3G 이상. 알론소가 묻는 말에도 피터는 연신 소리만 질러댔다.
“오오오우예! 이런 XX! 이거 완전 미쳤어!!”
알론소의 차량을 뒤따르는 해밀턴의 포뮬러카. 왕좌의 게임 주인공 존 스노우 배역의 킷 해링턴의 반응도 피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량이 최고속을 달리다 급브레이킹을 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는데, 라이브 방송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좀처럼 욕을 멈추지 못했다.
“와하하하!”
“어때요, 에밀리아?”
“준하! 아까 했던 것처럼요! 더! 더 크게 돌아주세요! 엄청 기분 좋아요!!!”
한편, 대열의 마지막 포뮬러카에선 여주인공 대너리스 배역의 에밀리아 클라크가 달리고 있었다. 슈퍼 스크린에 용 엄마가 등장하자 전 세계 팬들이 더욱 크게 환호했다. 다른 게스트들이 소리를 질러대는 것과 달리, 동승한 드라이버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걸 두 시간 동안 타신다고요?!”
“테스트 주행 땐 7시간까지 타죠.
“어우, 바지가 다 젖어버렸구만.”
두 바퀴 폭풍 질주를 마치고 게러지로 복귀한 포뮬러카들. 자신들을 태워준 드라이버들에게 배우들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 가운데, 얼굴색이 하얗게 질린 해링턴과 연신 자신의 아랫도리를 확인하는 피터의 모습에 게러지는 금세 웃음바다가 돼버렸다.
“고마워요, 준하. 진짜 오늘 너무 재밌었어요!!”
이어서 자신의 완주를 만족스러워하는 에밀리아가 아이처럼 기뻐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담겼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듯 서준하에게 감사를 표현하며 갑작스럽게 포옹 인사를 했다. 거리낌 없이 자신을 꽉 끌어안는 모습에서 그녀가 정말로 드라이빙을 즐겼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이쪽이요! 이쪽도 한 번 봐주세요!”
배우들과 인사를 나눈 드라이버들이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사진 촬영이 시작됐다. 세계 최고의 인기 배우들이 온다는 소식에 게러지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카메라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포뮬러 원, This is amazzzzzing!!!”
톱스타들과 F1 슈퍼스타들의 만남. 즐거움과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의 해밀턴과 알론소 옆에 선 페라리 드라이버는 페텔이 아닌, 서준하였다. 덕분에 몇몇 포뮬러 기자들의 카메라 포커스가 그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준하...!”
에밀리아가 촬영을 마치고 피트로 걸음을 옮기려는 서준하를 불러세웠다.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이 취재진의 눈길을 끌었다.
“오늘은 응원 팀을 바꿔야겠는데요?”
“오, 그래요?”
“원래는 윌리엄스 팬이지만, 오늘은 페라리도 함께 응원하려고요. 오늘 레이스 기대할게요, 준하. ”
스포츠를 좋아하는 영국인답게 F1 역시 관심이 높은 그녀가 오늘은 서준하를 응원하겠다며 친근함하게 웃었다. 불과 몇 개월 전 스크린 속에서만 마주했던, 전 세계가 사랑하는 드라마의 유명 배우. 그런 그녀와의 첫 만남에도 서준하는 특유의 여유 있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
‘흠... 이번에도 느낌이...’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생에도 에밀리아를 만나봤던 것은 물론, 그녀와 비밀스러운 사이로 지냈던 적이 있었으니까.
“고마워요, 에밀리아. 기회가 되면 또 보도록 하죠.”
오늘의 만남이 훗날 어떤 추억으로 남게 될지 모르는 두 사람. 각자 눈을 한 번 마주치고는 피트를 빠져나갔다.
***
“2017시즌 유럽에서 펼쳐지는 F1 첫 레이스! 바르셀로나의 날씨는 여전히 화창하군요!”
“그렇습니다, 어제 퀄리파잉보다 온도가 2~3도 낮기는 하지만, 여전히 트랙의 온도가 40도에 가까운 드라이한 컨디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드라이버 퍼레이드와 국가 연주 등 각종 행사를 마친 참가 팀 선수들. 자신의 팀 미캐닉들과 함께 서서히 스타팅 그리드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선수가 가장 무른 타이어인 S 타이어를 장착했습니다만, 몇몇 선수들은 M 타이어를 장착했군요.”
“오늘 레이스 큰 변화가 없다면 2스탑 전략이 예상되지만, 추월이 어려운 바르셀로나의 특성상 먼저 피트스탑을 하는 드라이버가 손해를 볼 수 있기에, 미디엄 타이어로 오래 버티는 전략도 나쁜 전략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Q3 진출자의 경우 모두가 S 타이어를 장착했지만, 그 아래 반전을 노리는 선수들은 다른 타이어 전략을 쓸 것으로 보였다. 변수를 최소화할 수 있는 투 스탑 전략이 최고의 전략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대부분 새 소프트 타이어를 두 번째 타이어로 선택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오늘 레이스 메르세데스와 레드불의 스타팅 위치가 좋습니다. 시즌 초반 페라리의 기세를 꺾고 분위기 반전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두두두두두두두둥.
두두두두두두두두둥.
포뮬러카들의 엔진음과 미캐닉들의 분주한 움직임으로 가득한 스타팅 그리드. 혹시 모를 스타트 미스에 트랙 위에서도 엔지니어들의 최종 점검은 끊이질 않았다.
“러시아 GP에서 확인했다시피 기회는 스타트 때 반드시 올 거야. 너무 서두르지 마.”
“그렇지, 하지만 반대로 봤을 땐 위기 상황도 동시에 존재하는 거네. 어떤 상황에서든 가장 중요한 건 평소처럼 스타트하는 거야. 뭐 이렇게 말 안 해도 잘하겠지만...”
변수가 적은 서킷에서 후미에 위치한 경우, 추월 포인트는 스타트 시점부터 초반 그리고, DRS가 활성화되는 시점이다. 서준하의 차량 주변에서 주의 사항을 일러주는 롭과 안토니오치. 두 사람의 말처럼 서준하는 지금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갖고 스타트를 끊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5R Starting Grid]
[1.해밀턴] [2.막누스]
[3.보타스] [4.페텔]
[5.서준하] [6.리카도]
미캐닉들이 빠지고 그리드에 홀로 남은 지금, 주변으로 경쟁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출발 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경쟁자들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그들의 동선을 떠올렸다.
‘스타트 미스가 나올 가능성이 가장 높은 그리드는 2번 막누스. 그리고 보타스와 페텔이 파고들 공간은 좌측이 가장 높아. 그렇다면 이번에는...’
속도가 빨라도, 출발 방향을 미리 설정해두는 스타트 방식과 그때그때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의 추월 성공 확률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제아무리 드라이버의 반응 속도가 빠르더라도 예측을 통한 움직임보다 빠를 순 없다.
‘단 0.001초라도 빨라졌다면, 그걸로 충분해. 믿는다, 페라리...’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스타트 미스가 없는, 정확하고 빠른 스타트에만 가능한 시나리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레이스에서 평소 자신의 스타트 실력과 경주차 업데이트 파츠로부터 확신을 가졌다.
“미캐닉들은 이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엔지니어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그리드에 홀로 남은 서준하. 그렇게 찾아온 고요한 적막에 또 한 번 외로운 싸움이 시작되는 걸 느꼈다.
***
‘네가 내 앞에 있을 수 있는 건 지금뿐이다...’
포메이션 랩이 시작된 5차전 레이스. 보타스의 눈앞으로 레드불 루키의 경주차가 보였다. 오늘 보타스의 임무는 빠르게 2위로 올라가 선두 해밀턴과 프론트 로우를 점령하는 것. 해밀턴의 무난한 우승을 위해 메르세데스 팀은 레이스 초반 보타스가 최대한 빠르게 페이스를 끌어올릴 것을 주문했다.
“후...”
포메이션 랩을 마치고, 스타팅 그리드에 멈춰선 보타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막누스에게로 향해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이뤄내려면 스타트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레이스 시작합니다!!!”
출발 신호가 하나둘 떨어지는 시작한 순간에도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보타스. 지금 머릿속은 온통 앞에 위치한 막누스가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다섯 개의 출발 신호가 모두 꺼짐과 동시에 보타스는 해밀턴과 막누스의 사이로 경주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누스! 막누스가 늦었어! 파고들어!!!
“봤어!!!”
해밀턴과 자신의 출발은 비슷했지만, 막누스는 분명 반 박자 늦게 출발했다. 엄청난 흥분과 함께 보타스가 막누스의 좌측으로 파고들던 그때,
“...!!!”
-...!!!
그리드에서부터 줄곧 시선을 전방에 뒀던 보타스는 그의 옆으로 자신보다 빠르게 치고 나가는 페텔의 차량에 당황하고 말았다. 아주 간발의 차이였지만, 페텔의 프론트 노즈는 자신의 그것보다 조금 앞서있었다.
“빨라...!”
-무조건 막아! 공간을 주면 안 돼!!!
이번 라운드 메르세데스와 레드불이 대대적인 다운포스 업그레이드를 진행했다면, 페라리의 업데이트는 차량의 기본적인 부품들을 교체하는 데 중점을 뒀다. 그중에서도 눈여겨 볼만한 것이 클러치 파트로, 새로 교체된 클러치 레버가 핵심이다. 페라리에겐 레이스 스타트야말로 이번 라운드 업데이트 효과를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다고 쉽게 줄 순 없지!!!”
페텔의 스타트는 네 명의 선수 가운데 가장 빨랐지만, 가장 뒤에서 출발했다. 자신의 옆으로 고개를 내미는 그를 막기 위해 보타스가 출발 계획보다 더 우측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훼에에에에에엥.
보타스가 우측으로 이동하면서 생겨난 빈 공간. 이번에는 또 다른 페라리카 한 대가 그의 좌측을 파고 들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XX!!!”
-서준하!!!
기회를 잡으려고 달려드는 순간, 동시에 위기를 맞은 보타스. 덕분에 출발이 늦었던 2위 막누스가 다시 앞으로 빠져나갔고, 보타스는 페라리 듀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쓰리 와이드! 스타트부터 바르셀로나는 대혼란입니다!!!”
“첫 코너를 향해 세 대의 포뮬러가 나란히 달리기 시작합니다!!!”
한 선수의 움직임으로 자칫하면 대형 크러쉬가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 한 치의 양보도 없을 3위 싸움에 갤러리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단 0.001초라도 빨라졌다면, 그걸로 충분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