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예측이 맞았어 >
5차전 레이스 스타트 당시 긴장감이 가득했던 페라리 팀의 피트 월. 첫 랩의 첫 코너를 돌기도 전 등장한 쓰리 와이드 상황에 퍼포먼스 엔지니어를 제외한 모두가 말을 잇지 못했다.
“준하 바깥쪽, 보타스 중앙, 페텔 안쪽! 쓰리 와이드입니다!!”
3위 자릴 노려볼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페라리 팀에겐 기회이기도 했지만, 하필 세 명 중 둘이나 페라리 팀 선수들이라 어쩌면 또 다른 위기.
“아! 보타스가 다시 바깥쪽으로 움직입니다!”
카탈루냐 서킷은 홈스트레치가 매우 길다. 첫 코너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지켜보는 이들의 긴장감은 끝없이 치솟았다. 중앙을 달리던 보타스가 우측 코너 1턴 진입을 위해 서준하의 쪽으로 붙기 시작하는데,
‘누구 하나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이건 전부...’
만약 어느 누군가가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또 다른 누군가 역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라인을 유지한다면, 충돌은 불가피하다. 평소 선수들의 드라이빙 스타일만 가지고도 코스 돌파에서 우위를 점하게 될 승자를 예측하는데 탁월함을 보였던 안토니아치도 지금 상황을 쉽사리 예측할 수 없었다.
“1턴 코스 진입!!”
“페텔...!”
진입로의 가장 안쪽에 있던 페텔이 차의 방향을 틀어 놓으며 경주차의 노즈를 코너로 밀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바깥쪽에서 안으로 크게 찔러 들어오려던 서준하가 주춤했고, 보타스는 어쩔 수 없이 코스 안쪽 페텔의 뒤에 붙었다.
‘그래, 그게 최선이었다, 준하야...!’
스피드와 순위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자신의 경주차를 무리하게 욱여넣으며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 서준하. 페텔의 움직임에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했음에도 그의 선택은 현명했다.
“나이스 페텔!”
“페텔이 리드를 가져갑니다! 준하가 보타스 쪽으로 붙었습니다!”
페텔의 리드와 별 탈 없이 끝난 쓰리 와이드 상황에 페라리 스태프들은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준하가 보타스만 떼어낸다면...’
1턴 이후 곧바로 이어지는 S자 코너 2, 3턴. 다음 코스 진입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서준하가 레코드 라인을 따라 움직였다. 계속 추월을 할듯한 모션은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니야, 거기 말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카탈루냐에서 CP를 찍는 지점이 가장 까다로운 3턴의 초대형 헤어핀. 안토니아치가 스크린으로 달리는 경주차를 바라보며 서준하의 브레이킹 타이밍을 예측해보는데,
‘그래... 거기다!’
평소보다 CP를 조금 빠르게 찍으며 보타스보다 먼저 선회를 시작하는 서준하. 자신이 생각했던 지점과 드라이버의 CP 타이밍이 일치하자 엄청난 쾌감이 안토니아치에게 밀려왔다. 그리고,
“...!!!”
“...!!!”
“...!!!”
선회를 시작하며 조금씩 보타스의 앞으로 뻗어 나오는 페라리카. T3 헤어핀의 크기가 크다 보니 빠르게 돌기 위해 첫 진입을 일찍 하기보다는 탈출 가속시점을 빠르게 가져가는 편이 유리하다. 3턴 탈출로에 이르자, 페라리 카 두 대가 줄지어 4턴 초입에 들어섰다.
“완벽하구만...!!!”
어쩌면 페라리 팀의 대형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던 스타트 초반. 위기 상황을 벗어남과 동시에 팀이 원하는 최고의 시나리오가 등장하자, 피트 월에서 환호가 쏟아졌다.
그 가운데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서준하의 움직임만을 유심히 지켜봤던 안토니아치의 입에선 감탄이 터져 나왔다. 욕심을 버리고 현명한 판단으로 침착하게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을 젊은 신인 드라이버에게 기대하기는 쉽지 않았으니까.
“막누스와의 격차 2.145초! 충분히 해 볼 만합니다!”
“좋아, 최대한 압박해!”
예상했던 대로 카탈루냐는 시작부터 서킷 곳곳에서 난타전이 벌어졌고, 어느새 페라리 듀오의 앞으로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예선 2위를 차지한 레드불의 차량이 보이기 시작했다.
***
“4랩 스타트! 이제 격차는 다시 2.7초까지 벌어졌습니다!”
“흠...”
선두 해밀턴의 뒤를 달리고 있는 막누스. 1랩 마무리에서 2초 내로 좁혀졌던 격차가 계속 벌어져, DRS 사용이 가능해진 3랩부터는 2초 후반대로 넘어섰다.
시간이 흐를수록 해밀턴과 격차가 벌어지자, 레드불 팀 호너 감독의 고민이 깊어졌다.
“전략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호너. 여기서 더 격차가 벌어졌다간...”
“이러다 뒤쪽에서 기회를 잡겠구만...”
해밀턴과는 멀어지는 반면, 뒤따르는 페라리 팀과의 격차는 위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 불안한 표정의 레드불 엔지니어들이 팀 프린시펄과 전략 책임자의 역할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호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겟 마이너스 쓰리! 막누스의 피트 스탑을 앞당기는 게 좋겠어.”
“근데 너무 일찍 교체하면 레이스 중후반 막누스의 부담이 커지지 않을까요?”
해밀턴을 잡으려면 레드불에겐 변수가 필요했다. 호너는 막누스의 타이어 상태를 체크하며 계획한 타이어 교체 시점보다 일찍 언더컷 오더를 내리기로 했다.
“어떻게든 해밀턴의 타이밍을 꼬이게 만들어야지. 흐름을 뒤집으려면 이 방법밖엔 없어...”
이번 시즌 한 차례밖에 포디엄에 오르지 못하며, 엄청난 부진을 이어가고 있는 레드불 레이싱. 막누스가 예선 2위에 오르며 시즌 첫 우승을 노려볼 수 있는 지금, 호너 감독은 간절했다.
두 강팀에게 밀려 시즌 내내 의기소침해 있는 팀의 분위기를 전환하려면, 안정적인 2위보단 그랑프리 우승이 필요했다. 특히나 전년도 막누스는 스페인 GP의 우승 경험이 있기에 그 기대는 다른 GP보다 더 높았다. 그리고,
“DRS ON!!!”
“예쓰!!!”
“와아아아아!!!”
퍼포먼스 엔지니어들의 환호. 조금 전 6위를 달리던 리카도가 보타스를 추월하며 페라리팀을 바짝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페라리를 붙잡아줘, 리카도...!”
이번 시즌 레드불 팀의 저조한 성적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리카도의 부진. 어리고 경험 없는 팀메이트가 지난 시즌 3위를 차지했던 자신과 비슷한 조건에 계약을 하자, 리카도의 불만이 깊어졌고, 이는 곧 레이스에 드러났다. 하지만 5라운드 직전 호너와 면담을 하고부터 폼이 조금씩 좋아지더니, 오늘 레이스에서 팀의 기대를 살만한 퍼포먼스를 드러냈다.
“14랩 스타트! 해밀턴과의 격차 3.1초! 페텔과의 격차는 2.5초입니다!”
“이제 피트 스탑 준비해. 또 한 번 S 타이어로 준비하도록!”
처음 예정했던 18랩에서 3랩을 앞당긴 피트 스탑 타이밍. 서킷의 상황을 살핀 호너가 다음 바퀴 막누스의 타이어 체인지를 위해 준비하라는 오더를 내렸다. 그런데,
“메르세데스 피트가 움직이는데요?!”
“뭐?!”
레드불 팀 피트월 근처로 보이는 메르세데스 팀의 피트. 민트색 유니폼을 입은 미캐닉들이 갑작스럽게 14랩 중반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밀턴! 피트 레인으로 들어옵니다...!”
“이런 제기랄!!”
“서, 서준하! 서준하도 피트 레인으로 들어섰습니다!!”
“서준하?! 이건 또 뭐야?!”
그리고 심상치 않았던 또 한 팀의 피트. 이번에는 페라리의 서준하가 언더컷에 들어갔다. 15랩으로 예정했던 막누스의 언더컷 타이밍도 상당히 이른 시도였지만, 14랩은 너무 일렀다.
“타이어 펑쳐인가?!”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마지막까지 앞차와 격차가 떨어지지 않았는데요...”
“아니, 14랩?! 도대체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
누구도 쉽게 예상치 못했던 교체 타이밍에 레드불 팀이 오히려 허를 찔린 순간. 차례로 피트로 들어서는 메르세데스와 페라리 카를 보고, 호너 감독의 머리가 하얘지기 시작했다.
“호, 호너...! 예정대로 15랩 피트 스탑 진행할까요?!”
“...”
자신의 뒤를 따르는 경쟁자들의 언더컷을 사전에 예방한 해밀턴의 발 빠른 대처. 덩달아 의도를 알 수 없는 페라리 루키의 피트 스탑 타이밍에 판단을 내려야 하는 감독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피트 스탑 예정대로 진행해!”
해밀턴이 빠지고 선두를 달리던 막누스. 한동안 정적이 흘렀던 그의 팀 라디오로 복귀 오더가 내려졌다.
***
“메르세데스는 초반부터 계획했던 전략 같고요. 뒤따라 피트 레인에 들어온 서준하의 타이밍이 눈여겨볼 만합니다.”
“서준하의 피트 스탑은 갑작스럽게 내린 판단으로 보이는데요. 차량 문제인지 아닌지는 한 번 박스에 있는 모습을 봐야 할 것 같군요.”
해밀턴이 들어오길 기다렸단 듯이 빠르게 타이어를 교체하는 메르세데스의 피트 크루들. 이어서 중계 스크린으로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는 페라리 피트 크루들이 등장했다.
금방 오더가 내려진 탓인지 서준하의 경주차가 도착하기 직전까지도 미캐닉들은 대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타이어였군요! 서준하가 타이어 교체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차량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고요. 아마 서준하도 순위권 도약을 위한 언더컷을 시도하는 것 같습니다.”
경주차의 도착과 동시에 부산스러웠던 페라리 팀의 피트 박스가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오더에도 신속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미캐닉들의 움직임에 서킷 곳곳 티포시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자, 그럼 다시 레이스 상황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죠. 아, 막누스도 곧바로 대응에 들어가네요. 페텔과 보타스가 피트 스탑 없이 그대로 달려서 1, 2위를 차지하고 있고요.”
“해밀턴이 나왔습니다. 보타스를 뒤따르던 리카도의 앞으로 등장하는데요. 4위로 복귀하는군요.”
선두의 언더컷에 따라 경쟁자들의 대응은 저마다 달랐다. 자신의 타이밍을 그대로 유지하는 선수부터 곧바로 대응에 들어간 선수까지. 피트 스탑으로 인해 순위가 크게 뒤바뀌자, 갤러리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 타이어 교체를 마친 서준하가 피트 레인을 빠져나옵니다!”
피트 레인 출구 근처에 등장한 서준하의 페라리카. 새 타이어를 장착한 단독샷이 슈퍼 스크린에 등장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준하야, 네 예측이 맞았어! 해밀턴이 4위로 복귀했다. 출구 쪽으론 리카도와 알론소가 접근 중!
갑작스럽게 해밀턴이 빠지고 막누스의 이른 피트 스탑 타이밍을 예측했던 페라리. 팀은 원래 드라이버 모두 타이어 교체 없이 오랫동안 프론트 로우를 지키는 전략을 세웠지만, 갑작스럽게 피트 스탑을 한 건 서준하의 요청 때문이었다.
“됐어! 여기서 시간만 줄여준다면...!”
피트 스탑 전, 서준하는 앞선 페텔과 막누스 때문에 쓸데없는 시간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해밀턴의 피트스탑에서 복귀하고 부딪히게 될 선수가 바로 4위를 달리던 자신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승부처는 여기야!!!”
페라리의 전략 팀은 물론, 최고의 레이스 엔지니어들도 쉽사리 내리지 못했던 교체 타이밍. 서준하의 직관은 선두 싸움을 위한 승부처야말로 지금, 첫 번째 피트 스탑 이후라고 말하고 있었다.
< 네 예측이 맞았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