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면 그때보다 더 뛰어날지도 >
14랩 타이어 체인지 후 3위를 달리던 해밀턴. 아직 피트 스탑에 들어가지 않은 페텔과 보타스를 추격하고 있었다. 경쟁자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언더컷에 들어갔지만, 너무 이른 타이밍이라 전략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해밀턴 16랩 스타트! 보타스와의 격차 23초대에 진입했습니다!”
이전보다 격차가 조금 더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메르세데스 피트 월의 분위기가 밝아졌다.
“보타스의 타이어가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테오? 이번 랩에 바로 불러들일까요?”
“흠...”
기존 데이터상으론 17~18랩이 소프트 타이어의 한계점이다. Q3에서 경쟁자들보다 한 바퀴를 더 달렸던 보타스의 타이어는 슬슬 그립력을 잃고 있었다. 게다가 시작부터 줄기차게 페텔을 압박하기 위해 세심하게 타이어 관리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니, 보타스는 지금 최대한 버텨주는 게 좋겠어. 페텔이 피트 레인에 들어설 때까지 끝까지 추격한다.”
“랩타임이 더 떨어질 텐데요...”
“페텔도 곧 있으면 들어갈 거야. 오늘 보타스한텐 페텔 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고 해. 그게 녀석의 임무니까.”
페텔은 해밀턴의 언더컷에 대한 대응으로 오버컷을 택한 상황. 페라리의 작전을 말리게 만들고, 해밀턴이 안정적으로 우승하기 위해선 팀 메이트의 희생이 필요하다. 불안함이 가득한 보타스의 레이스 엔지니어의 말에 테오가 딱 잘라 말했다.
한편, 현재 상황에 페라리 팀 피트의 분위기는 달랐다.
“그립을 잃으니까 페텔도 자신감이 떨어졌어. 슬슬 박스로 불러들여야겠구만.”
시작부터 끈질기게 이어져 온 보타스의 압박 덕분에 페텔도 예상보다 타이어 교체 시기를 서둘러야 할 것으로 보였다.
“메르세데스가 오늘 페텔을 묶어두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해밀턴의 언더컷이 맞아 들어가는군요...”
“17랩 페텔을 불러들여. 타겟 마이너스 투. 곧바로 타이어 체인지에 들어가도록.”
페텔의 타임 로그와 경쟁자들의 격차를 파악한 아리바베네 감독이 피트 월 엔지니어들에게 오더를 내렸다. 그런데,
“예정대로 피트 스탑하겠다는데요? 타이어는 아직 괜찮답니다, 보타스도 조금 더 멀어졌고...”
페텔의 무전 내용을 감독에게 전달하는 엔지니어들. 실제로 이번 랩에서 보타스와 조금씩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건 메르세데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거야.”
하지만 감독의 보기에 지금 중요한 건 보타스와의 격차가 아니었다. 애초에 보타스를 떼어놓으려는 것이 오늘 레이스의 목표는 아니었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보타스가 아니야. 해밀턴, 해밀턴을 잡아야지! 곧바로 불러들여!”
페텔이 보타스와 거리를 벌리는 격차보다 해밀턴이 앞차들을 따라잡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페텔이 조금 느려질수록 앞으로 팀 메이트와 부딪히게 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 보였다.
“준하, 16랩 막누스와의 격차 3.3초! 17랩 현재 섹터 2에서 2초 8까지 들어왔습니다!”
페라리 피트 월이 페텔의 피트 스탑 타이밍을 재고 있을 때, 서준하는 타이어 체인지 후 연속 추월을 이뤄내며 본능적으로 이뤄졌던 언더컷 전략을 성공시키고 있었다.
“페텔! 피트 레인 진입! 예상대로 보타스가 따라 들어왔습니다!”
“허허, 이거 잘하면...”
피트레인에 들어서는 페텔과 막누스 그리고 그들을 추격하는 서준하를 번갈아 보는 아리바베네 감독. 보타스가 페텔을 추격할 때나, 서준하가 과감한 돌파를 시도할 때조차 감독은 침착했다. 하지만 이제 곧 페라리 팀이 맞닥뜨리게 될 순간을 떠올리자,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따.
“또 한 번 만날 것 같구만...”
무난하게 타이어 교체를 마치고, 피트 박스를 떠나는 페텔과 홈스트레치를 향해 달려오는 서준하. 두 선수의 충돌 지점, 피트 레인 출구로 감독의 시선이 향했다.
***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훼에에에에엥.
피트 레인을 빠져나온 페텔. 그의 앞으로 홈스트레치를 최고속으로 달리는 막누스의 경주차가 보였다. 그리고,
“제기랄!”
곧이어 자신의 앞으로 등장한 페라리 카. 언더컷의 효과를 톡톡히 본 그의 팀 메이트는 어느덧 2위 막누스의 자릴 노리고 있었다. 일찍이 14랩에서 사라졌던 서준하의 경주차가 어느새 자신보다 앞서 달리는 상황이었다.
-아직 해 볼 만해. 이번 랩에서 조금 더 압박을 가한 다음, 18랩에서 바로 시도하도록
아직 경쟁자들과 압도적인 차이가 벌어진 건 아니었다. 새 타이어의 가속도가 조금 떨어진 것뿐이었고, 자신의 뒤를 쫓던 보타스는 아직 복귀도 못 한 상황. 하지만,
“아니, 기다릴 시간 없어.”
-뭐?!
페텔은 서준하가 순위를 뒤집었다는 사실이 거슬렸다. 아다미의 판단과 달리 새로운 타이어의 그립감은 나쁘지 않았다.
-굳이 왜 지금...!
“...!!!”
팀의 무전 따윈 들리지 않았다. 이제 팀 메이트 또한 분명한 경쟁 상대임을 확인한 지금, 페텔은 더욱 공격적으로 경주차를 몰았다. 그리고,
“지금 잡는다! 공간이 보여!!!”
서준하가 12턴에서 라인을 느슨하게 타는 걸 포착한 페텔. 연석을 끝까지 활용하며 코너의 바깥쪽을 크게 돌기 시작했다.
“이번 시즌 처음으로 페라리의 드라이버들의 배틀이 벌어졌습니다!!!”
페라리 듀오가 완만한 고속 코너를 나란히 달리는 상황이 연출되자, 서킷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페텔의 진입을 막으려는 서준하가 탈출 지점 근처에서 상대 쪽으로 경주차의 방향을 미묘하게 바꿨다. 하지만,
“헛...!!!”
-런오프! 런오프를 밟아! 그래! 그대로 나가!!!
탈출로가 막혀버린 페텔의 상황을 두고 좌측 연석 밖 잔디밭을 활용하라는 아다미.
파바바바바바.
휘이이이잉.
런오프에는 항상 자갈과 데브리와 같은 혹시 모를 위험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는 건 도박과도 같지만, 무리해서라도 서준하를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던 페텔은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서준하의 앞으로 나왔다.
“후우!!!”
추월에 성공하며 달아오른 흥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때쯤, 이제 그의 앞으로 레드불 경주차의 리어윙이 보였다.
-저것도! 쟤도 할 수 있어! 이번 랩 섹터 3 돌파 톱 스피드다!
계속되는 페텔의 시원스러운 질주에 아다미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스피드를 살려낸 끝에 페텔이 막누스와 휠투휠 상황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것만 잡으면...!’
몇 차례 틈을 노렸지만, 확실한 기회가 아니었다. 페텔은 침착하게 격차를 유지하며 DRS존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너도 나와!!!”
홈스트레치의 기다란 DRS존. 결국, 페텔이 막누스의 슬립스트림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팀의 예상과 달리 막누스를 먼저 앞지른 건 서준하가 아닌 페텔이었다. 슬립의 효과로 끌어올린 페텔의 가속도에 레드불 루키가 꿈꿔온 스페인 2연승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선두의 위치는?”
-2턴 탈출! 현재 격차는 6.6초! 분명 두 번째 타이어가 우리보다 먼저 무너진다, 충분히 뒤집을 수 있어...!
이제 페텔의 앞으로 자신이 진정한 경쟁자라고 여기는 해밀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속 추월에 힘입어 자신감이 최대로 오른 페텔이 1턴 진입에 온 신경을 쏟던 그때,
-다시 붙었다...!
“끈질긴 새끼!”
끝이 아니었다. 뒤처질 줄 알았던 막누스가 다시 붙으며 또다시 휠투휠 상황이 시작됐다. 그리고,
-엇! 안쪽을 막아 페텔!
좌측 코너 2턴에서 인라인 코스를 찌르고 들어오는 막누스. 다음 코스에 들어서기 전, 페텔이 고개를 한번 옆으로 돌리자, 막누스 역시 자신을 보고 있는 걸 확인했다.
그렇게 나란히 달리는 두 선수가 이어지는 우측 코너 3턴으로 들어갔다.
“어딜...!!!”
-못 나오게 막아버려!!!
코스 방향의 변화로 이번엔 3턴의 안쪽을 차지하게 된 페텔. 선회를 시작하며 막누스의 차량을 코스 바깥으로 밀쳐내는데,
훼에에에에에에에엥.
코너 안쪽, 페텔의 우측에서 들려오는 경주차의 배기음. 놀란 페텔이 우측을 바라봤다.
“...!!!”
-...!!!
연석을 타고 3턴을 빠져나가는 서준하의 페라리카. 막누스의 진로를 막아선 페텔이 조향을 바꾸지 못한 채 넋 놓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막누스와 페텔의 뒤에 떨어져 공간을 노리던 서준하. 페텔이 디펜스를 시작함과 동시에 라인크로스를 통해 3턴 안쪽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그대로! 그대로 버텨내, 서준하!!!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 코너 안쪽 연석을 물고 달리는 서준하.
“우어어어어어어어어어!!!”
카탈루냐 최대 횡 G와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는 그의 목소리가 팀 라디오에 울려 퍼졌다.
-됐어!!! 이제 DRS존까지 최대한 격차를 벌리는 거야!!!
페텔의 추격 능력과 교체 타이어의 상태로 봤을 때, 지금 추월로 완벽한 승기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레이스는 지금부터다.’
사실상 추격자들이 한 번 주춤한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이제 매 턴에서 초를 잃지 않고 상대보다 조금씩 앞서가야 선두까지 노려볼 수 있다.
***
“...더블 오버테이크...!”
“와...”
서준하의 추월에 카탈루냐 서킷 전체가 들썩거렸고, 메르세데스의 게러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놀란 건 빨간 모자의 라우다였다.
‘2000시즌의 바리첼로 그것과 똑같구만...’
F1 사상 최고의 추월 장면으로 손꼽히는 2000시즌 스페인 GP의 더블 오버테이크. 서킷의 3턴을 바라본 라우다의 머릿속으로 페라리 드라이버 바리첼로가 슈마허 형제를 제치고 선두에 올랐던 장면이 떠올랐다.
장소도, 추월 방법도, 코스 돌파 타이밍 역시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과 지금 상황은 유사했다.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뛰어날지도...’
서준하의 탈출 속도에 오늘의 장면이 더 많이 회자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탈출 이후 격차가 벌어지는 속도는 서준하가 훨씬 더 빨라 보였으니까.
“보노, 섹터가 끝날 때마다 2위와 격차 보고하게.”
조용했던 피트 월에선 테오만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조금 전 장면에 많이 놀란 듯했지만,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18랩 스타트! 격차는 5초 67!”
“크음...”
라우다의 눈엔 테오의 오랜 습관이 보였다. 서준하가 해밀턴을 따라잡을수록 테오는 더욱 강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제 서준하의 앞으로 챔피언 경주차가 나타났다. 레이스가 절반도 끝나지 않은 지금, 해밀턴을 따라잡을 수 있는 기회는 무한해 보였다.
‘그 마법의 가루란 게 정말로...’
그의 주변엔 마법 가루가 있었다. 다음 세대 챔피언이 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아우라와 같은 무언가. 라우다는 서준하의 주행에서 자신과 겨뤘던 전설적인 F1 드라이버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 어쩌면 그때보다 더 뛰어날지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