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F1 레이서-172화 (172/200)

< 피트 스탑 러시가 일어났습니다 >

“서준하의 추격이 무섭습니다. 24랩을 시작하는 지금 선두 해밀턴과의 격차는 4.7초입니다.”

지금 서킷에서 가장 빠른 건 서준하였다. 덕분에 1위와의 격차는 줄어들었고, 3위로부턴 더 멀어졌다.

“2위에 올라선 이후 서준하가 야금야금 앞으로 나오고 있군요. 3, 4위 드라이버들의 격차를 보니, 상대적으로 해밀턴이 느리다기보단 서준하가 가장 빠르게 달리고 있어요.”

레이스 초반 치열했던 공방전이 마무리되자, 스페인 GP답게 레이스는 순위 변동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레이스는 서른 바퀴째에 접어들었다.

“순위권에선 여전히 해밀턴이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는데요. 이번에도 눈여겨볼 선수는 역시 서준하군요.”

“그렇습니다. 지난 여섯 바퀴 동안 1초 가까이 선두와의 격차를 또 줄였습니다. 이제 3.8초대에요. 음... 이렇게 계속 줄여나간다면, 선두 자리 아직 모릅니다.”

중계진의 눈은 계속 서준하에게로 향했다. 레이스 초반 그가 보여준 활약이 더 큰 기대를 하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 지금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선수들 가운데 가장 성과를 내는 선수가 바로 그였다. 좀처럼 쉽지 않아 보이는 상황도 뒤집을 것만 같은 기대를 걸게 만들었으니까.

“또다시 피트 스탑 타이밍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평이하게 흘러가는 흐름을 뒤바꿀 변수로 작용할 수 있을지...”

서른 바퀴를 넘어서며 이제 마지막 타이어 교체가 진행될 것으로 보였다. 피트에 들어서는 타이밍이 모두다 동일할 수 없다. 마치 카드를 섞듯 순위 뒤바꿈이 시작될 것으로 보였다.

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해밀턴의 랩타임의 진전이 없자, 메르세데스 피트 월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로이스, 피트 스탑 오더가 35랩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예상보다 빨라질 수도 있어.

타이어 전략을 고민하던 컨트롤라인에서 그의 레이스 엔지니어 보노에게로 오더가 내려졌고, 이를 해밀턴에게 전달했다.

“예상보다 빨라지다니?”

-크흠...

보노의 아리송한 말에 해밀턴이 되물었다. 그러자 보노가 헛기침을 하며 잠시 말을 멈췄다.

-뒤차가 들어가는 타이밍 보고 바뀔 수도 있어. 페라리의 타이어를 봐야 하니까

미세하지만 조금씩 해밀턴을 따라붙는 서준하의 모습에 메르세데스 팀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전략팀에선 상대의 타이어 선택과 교체 시기를 보고 대응하려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돌아올 말을 예상한 보노의 목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지X하네. 카탈루냐에서 언제부터 뒤차 눈치 보고 바꿨냐. 예정대로 35랩에 들어간다.”

카탈루냐와 같은 서킷에서 해밀턴이 선두를 달릴 땐, 타이어 교체는 그의 요청에 따라 이뤄졌다. 그만큼 선두를 달리는 해밀턴은 압도적으로 빨랐고, 팀은 그를 신뢰했으니까.

하지만 오늘 오더 내용은 팀이 느끼는 불안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차라리 배틀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백스트레치에 오른 해밀턴의 윙미러로 자신을 추격하는 서준하의 모습이 보였다. 막누스가 뒤편에 있을 땐 격차를 통해 실력 차이를 증명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그 증명 방식을 달리하고 싶었다.

‘부숴버리는 게 오히려 더 임팩트 있을 테니까...’

서준하는 여러모로 해밀턴의 자존심을 긁어놨다. 이를 되갚을 수 있는 건 진지하게 실력을 겨룰 수 있는 자리에서 처참한 패배를 안겨주는 일. 해밀턴이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다시 전방을 주시하는데,

-페라리 피트가 움직인다...! 페텔은 멀었어, 서준하. 서준하가 이번 랩 피트 스탑할 듯!

선두 싸움에서 먼저 언더컷을 시도한 건 페라리였다. 보노의 예측대로 피트 레인에 들어서는 경주차는 페텔이 아닌 서준하였다. 보노의 목소리는 다급했지만, 해밀턴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로이스, 우리도 이제 들어오는... 뭐?! 이런 제기랄!! 그래서 지금...

“뭔데?!”

해밀턴을 설득하기 위해 말을 꺼내던 보노가 갑작스럽게 말을 멈췄다. 메르세데스의 팀 라디오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고, 이유를 모르는 해밀턴은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갑자기 이게 무슨...!! 7턴에서 사고가 났다!

보노의 무전과 동시에 고갤 돌려 7턴 주변을 확인한 해밀턴. 그리고 곧장 그의 시선이 서킷의 곳곳에 설치된 전광판으로 향했다.

[VSC (Virtual Safety Car, 가상 세이프티 카)]

“이런 XX!!!”

전광판을 확인한 해밀턴이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지루했던 카탈루냐 레이스 33랩. 레이스 흐름을 뒤바꿔놓을 새로운 변수가 서킷에 등장했다.

***

VSC는 일종의 세이프티 카 상황으로, 트랙의 특정 구간에서 사고가 나거나, 특정한 이유로 드라이버들과 마샬들의 안전이 위험해서 더블 엘로우 플래그가 발령되는 상황에서 시행된다.

레이스 컨트롤에서 VSC 발령을 명령하게 되면, 서킷 주변에 설치된 전광판에서 VSC 라는 글귀가 나타나고, 드라이버들은 해당 구간에서 스튜어드에 의해 결정된 특정 속도까지 감속하게 된다.

만약 VSC가 발령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버가 특정 구간에서 정해진 속도로 감속하지 않는다면, 피트에 들어가거나 나오는 상황을 제외하곤 전부 패널티를 받게 된다.

“밴도른의 맥라렌이 7턴 그래블에 나가떨어졌습니다...”

밴도른의 리타이어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가 리타이어한 위치가 문제였다. 중장비가 투입돼야 했고, 결국 VSC 상황이 선언됐다.

하지만 이는 곧 트랙에 엄청난 후폭풍을 만들어냈다. 바로 이렇게,

“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번 랩 선수들 전원 감속에 들어갔고요....! 이렇게 되면 지금 상황에 가장 이득을 보고 있는 건 피트 스탑에 들어간 페라리의 서준하와 르노의 훌켄버그죠!!”

피트 레인에 있거나 박스에 대기 중인 선수들은 VSC 상황에 감속을 하건 말건, 랩타임에선 손해 볼 것이 전혀 없다. 마치 사고가 날 것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피트 박스에 대기 중인 서준하가 중계 화면에 등장했다. 그리고,

“피트 스탑 러시가 일어났습니다!”

곧이어 하루빨리 피트 스탑에 들어가려는 드라이버들의 모습이 포착됐다.

“아! 교체 타이밍과 상관없이 많은 선수들이 타이어 교체를 위해 피트로 복귀합니다!”

VSC 상황 속 가장 먼저 피트로 들어온 건 단연 해밀턴이었다. 어차피 서킷에선 감속을 해야 하므로 해밀턴이 예정했던 타이밍보다 일찍 타이어 교체가 시작됐다.

“해밀턴이 빠진 사이 다시 트랙으로 복귀했던 서준하가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 해밀턴이 피트 스탑에 들어오기 전 아마 서준하가 2~3초 정도 이득을 봤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해밀턴이 다시 나왔을 때 격차를 다시 확인해봐야겠지만, 페라리 팀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속하게 교체를 했거든요?”

페라리의 피트 크루가 남다른 움직임으로 오늘 피트 스탑 최고 기록을 냈다. 미세했지만 서준하가 격차를 더 줄였을 것으로 보였는데,

“벌써요?! 아! VSC 해제! 선수들 다시 속도를 높입니다!!!”

서준하가 마지막 코너를 빠져나오며 해제된 VSC 상황. 기가 막힌 타이밍과 함께 서준하가 직선 주로에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아직 피트 레인을 빠져나오지 못한 해밀턴이 또다시 시간 손해를 보게 되는 거죠...!!!”

오늘 총 두 번의 변수가 서준하와 해밀턴에겐 각기 다른 영향을 주고 말았다. 그리고,

“아! 만나겠습니다! 만날 거 같아요! 홈스트레치를 돌파하는 서준하 그리고 그 맞은편 피트레인으로 조금 앞서 달리는 해밀턴!”

분리된 중계 화면 양쪽으로 등장한 두 선수의 경주차. 이전보다 가까워진 격차에서 본격적인 배틀이 시작될 것으로 보였다.

***

“VSC 끝!!!”

“와우!!!”

“해밀턴과 격차 1.4초! 서준하 35랩 스타트!!!”

해밀턴이 빠져나오기도 전 VSC가 풀린 상황에 가장 크게 환호하는 건 단연 페라리 팀과 티포시들이었다. 그들이 내지르는 환호는 마치 그랑프리 우승 피니시를 보는 듯했다.

“여기까지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게다가 이렇게나 일찍...”

레이스 피니시까지 서른 바퀴를 남겨둔 상황. 2위 자리는 물론, 선두를 노릴 기회가 생길 거라곤 페라리 팀에서도 예측하지 못했다. 환호를 내지르는 전략팀원들 사이에서 안토니아치가 감격에 빠진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오늘 레이스야말로 진짜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기회야.”

“흠, 오늘 레이스에 더 큰 의미가 있나요?”

전략팀원 루에다가 궁금한 표정으로 묻자, 자신의 안경을 만지작거리던 안토니아치가 손가락 다섯 개를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지난 네 번의 레이스 모두 활약이 컸지만, 제대로 된 배틀을 보여준 레이스가 드물지 않았나.”

1, 2차전 팀을 위한 디펜스 플레이와 3차전 챔피언들의 몰락. 이어지는 4차전에서도 챔피언들과의 배틀이 없으면서 서준하의 실력을 폄하하는 의견도 존재했다. 하지만,

“스타트부터 이번 시즌 우승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올라온 지금 상황이라면 다르지. 순전히 본인 실력으로 배틀에서 상대를 벗겨냈으니까.”

오늘 이후 서준하를 겪어본 경쟁자들의 태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단순히 운이 좋은 신인 드라이버가 아닌 월드 챔피언이 될 자격을 갖춘 드라이버로 인정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보여줘라, 네가 어떤 드라이버인지...!’

처음 서준하를 봤을 때 안토니아치가 느꼈던 직감이 확실해지는 순간. 지난 2년간의 시간을 통틀어 서준하를 향한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고,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피트레인을 빠져나와 자신의 앞을 달리는 메르세데스의 경주차. 오늘 레이스 시작 전 서준하가 상상하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

스타트 직후 자신이 간절히 바라왔던 순간에 온몸의 열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붙었다! 이러다 부딪히겠어!

해밀턴의 뒤에 바짝 붙은 서준하. 1턴 돌파를 위한 준비 동작 없이 그저 앞차를 향해 계속 돌진했다.

끼이이이이익.

훼에엥.

-헛...!!!

해밀턴을 만나고 달라진 서준하의 코스 돌파. 1턴 방호벽으로부터 몇cm 떨어져 닿을 듯 말 듯 코너를 빠져나갔다.

-또다시 방금처럼 돌파했다간 프론트가 박살 날 거라고! 아직 레이스 많이 남았어, 서준하!

피니시까지 서른 바퀴나 남았다. 롭이 고대했던 경쟁자의 모습에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서준하를 진정시키려고 했는데,

“알아, 그러니까 이제 레이스 끝날 때까지 무전 하지 마...!”

흥분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서준하는 차분했고, 전보다 시야는 더 명확해졌다. 다만 이제는 해밀턴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똑똑히 보여줘야 했다.

‘진짜 괴물이 누군지 보여줄게.’

슈마허 이후 괴물 드라이버라는 칭호를 얻게 된 로이스 해밀턴. 하지만 그건 서준하가 데뷔하기 전에나 떠돌던 말이다. 이제 진짜 괴물이 누군지 보여줄 때가 왔다.

< 피트 스탑 러시가 일어났습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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