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전히 똑같이 달리고 있어 >
“35랩 기회를 잡은 서준하! 이제 거의 해밀턴을 따라잡았습니다!”
서준하의 눈앞에 해밀턴 경주차가 보이자, 그를 넘어서겠다는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해밀턴의 코스 돌파에 실수가 생긴 건 아니지만, 추격자의 속도는 오늘 레이스 그 어느 때보다 빨랐다.
“카탈루냐 서킷에서 스타트 순위 5위에서 여기까지 올 수 있는 드라이버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사키르는 모래 먼지, 멜버른은 낙엽, 세팡과 상하이는 천둥 번개와 같은 변수가 있지만, 변수랄 게 거의 없는 카탈루냐에서 세 명의 순위권 경쟁자를 제친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현재 서준하의 질주는 의미가 있었다.
“7턴을 만나 왼쪽으로 90도 턴! 다시 8턴 오르막까지 최대한 속도를 끌어올리는 두 선수!”
“섹터2 돌파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전후좌우로 G포스가 드라이버들을 짓누르고 있는데요! 그러나 하이라이트는 아직이죠!”
앞차와의 격차를 1초 내로 줄이려는 자와 어떻게든 추격자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자의 코스 돌파. 3.5G 이상의 G포스가 발생하는 9턴으로 두 선수가 진입했다.
“우측으로 90도 턴하며 9턴 돌파! 아! 서준하가 과감하게 에이팩스를 향해 코너 안쪽까지 바짝 붙입니다!”
“돌파 좋았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직선주로가 끝나면 추월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미리 파악해둔 한계점 전까지 코너 반대편으로 밀려난 서준하의 차량.
‘거의 다 잡았다. 이젠...!’
이제 조금 더 선두와 가까워졌다.
“아 동시에 해밀턴도 브레이킹 포인트를 제대로 맞추지 못한 거 같은데요?!”
카탈루냐에서 가장 머신 컨트롤이 불안정해지는 구간에서 해밀턴의 미세한 실수까지 겹치며 격차는 더 줄어들고 말았다. 그리고,
“DRS ON!!!”
“나와요! 나옵니다! 서준하가 해밀턴의 옆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두 선수의 9턴 코스 돌파 차이가 서준하의 DRS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슬립 스트림을 탄 그가 선두 옆으로 나오는데,
“이제 두 선수의 앞으론 80km/h까지 급격하게 속도를 줄여야 하는 10턴 헤어핀...!”
나란히 직선 주로를 달리는 두 선수의 앞으론 카탈루냐의 최대 추월 포인트 가운데 한 곳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서준하가 깊숙이 안쪽을 파고듭니다!!!”
경주차를 에이팩스에 바짝 꺾어 붙이며 차체의 방향을 틀어 놓는 서준하. 코너 안쪽 공간을 빼앗긴 해밀턴은 속절없이 코스 바깥으로 밀리고 말았다.
“기막힌 인라인 오버테이크!!!”
그렇게 이어지는 코너를 향해 서준하가 먼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추월 성공! 서준하가 선두로 올라섭니다!!!”
10턴을 빠져나오는 빠른 탈출 속도와 다음 코스 진입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며 선두 자리가 뒤바뀌고 말았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훼에에에에에엥.
해밀턴의 앞으로 코스 안쪽을 치고 들어온 페라리 카가 보였다. 허를 찔린 추월이라기보단 전형적인 인코스 추월이었지만, 진입 속도 차이가 너무 컸기에 알면서도 막을 수 없었다.
지금 추월을 만들어내기까지 뒤차의 코스 돌파가 자신보다 훨씬 빨랐다는 사실이 더욱 해밀턴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너냐...’
이번 시즌 초반부터 페라리 팀에게 수차례 고전을 면치 못했던 해밀턴. 그 드라이버는 페텔이 아닌 서준하였다.
카탈루냐는 폴투윈 확률이 어느 곳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서킷이고, 레이스 절반 이상 자신의 드라이빙은 완벽했기에 지금 선두 자릴 내준 해밀턴의 충격은 더욱 컸다.
-로이스! 로이스!
“...”
-갑자기 페이스가 떨어졌어! 뭐지? 출력 문제인가?
판단을 멈춘 아주 잠깐 사이 앞차는 조금 더 멀어지고 말았다. 당황한 메르세데스 팀과 보노는 차량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했지만, 대답 없는 로이스의 모습에서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아직 많이 남았어! 격차만 더 벌어지지 않으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로이스! 저런 꼬맹이한테 챔피언 자릴 내줄 거냐?!
레이스까지 서른 바퀴 가까이 남았고, DRS를 활용해 압박만 잘한다면 충분히 한두 번의 기회는 온다. 제아무리 최정상 드라이버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시점이 있기 마련. 최다 챔피언 슈마허의 기록을 넘어서겠다는 해밀턴의 목표를 언급하며 보노가 승부욕을 자극했다.
“후...”
보노의 말에 답하는 대신, 해밀턴이 한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오늘 여기서 서준하에게 우승을 넘겨준다면, 챔피언 경쟁 구도에서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는 상황.
“타이어는 교체 없이... 피니시까지 간다.”
어떠한 결심을 한 듯한 말투와 함께 해밀턴이 보노에게 무전을 보냈다.
-뭐? 교체 없이?
상대의 주행에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던 해밀턴은 신인 시절 이후 레이스 엔지니어로부터 추격자에 대한 격차 보고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부터 섹터가 끝날 때마다 앞차와의 격차를 알려.”
지금 요청은 그가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걸 의미했다.
-...Copy! 엔지니어를 한 명 더 붙여줄게.
선두 차의 페이스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드라이버에게 전달하려는 메르세데스 팀. 오랜만에 듣는 해밀턴의 진지한 목소리에 보노가 바짝 긴장했다.
***
“와, 그냥 부드러운 정도가 아니에요. 이건 뭐 거의 크루징(Cruising)이네, 크루징.”
드라이버들이 훈련에 사용하는 시뮬레이터에는 서킷을 최단 시간에 돌파할 수 있는 크루징 드라이브 기능이 있다. 그야말로 완벽한 주행.
페라리의 전략팀원 루에다의 눈에 들어온 서준하의 경주차는 마치 크루징을 하듯 오차 없이 달렸고, 이는 변동 없이 빠른 랩타임을 만들어냈다.
“용케 F1 머신을 길들이고 컨트롤 하는 것이... 무슨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구만.”
시즌 다섯 번째 레이스만에 새로운 경주차를 길들이고 컨트롤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좀처럼 입 밖으로 드라이버들에 대한 평가를 내놓지 않는 아리바베네도 스무 바퀴째 리드를 잃지 않는 서준하의 주행에 이번 시즌 처음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아마도 차량 문제만 없으면 피니시까지 문제없이 들어올 거 같군요.”
“타이어 말고는 문제 생길 게 없어. 조금만 버티면....”
서준하와 해밀턴의 격차는 줄었다 늘어났다를 반복했지만, 모두가 기대하는 극적인 휠투휠 배틀은 나오지 않았다.
“흠...”
52랩에 들어선 지금, 또다시 빨라진 서준하의 모습에 전략팀원들이 긍정적인 결과를 예측했다. 하지만,
“격차가 3초 밖으로는 절대 떨어지지 않고 있어.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데 이건 더 봐야겠어.”
페라리 팀의 밝은 분위기 속에도 전략 감독 안토니아치의 표정은 긴장감으로 가득했고, 타임 로그에 드러난 두 선수의 격차를 유심히 살폈다.
“왠지 진짜 승부는 60랩 이후부터 시작될 것 같군.”
“아마 메르세데스가 레이스 후반을 노리는 것 같은데요. 이러면 타이어 관리를 누가 더 잘했느냐가 관건일 텐데...”
안토니아치의 눈길을 끈 건 두 선수의 격차였다. 선두를 빼앗긴 이후 해밀턴은 마치 의도적으로 일정한 격차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서준하와 해밀턴 모두 미디움 타이어로 마지막 타이어 교체를 했는데, 서른 바퀴가 넘어서면서 그 한계가 드러날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추격자가 해밀턴이라는 드라이버니까요... 끝까지 쉽지 않겠어요.”
“그렇지, 해밀턴의 단골 패턴이 오늘도 나올지도 모르겠구만.”
“단골 패턴이라면...”
기본기가 충실한 해밀턴은 고전적인 드라이빙 스타일을 가진 드라이버지만, 가끔 이를 바탕으로 차 성능 이상의 무언가를 뽑아내는 바람에 그런 스타일도 장점으로 꼽힌다.
“거리가 좁혀졌을 때 레이트 브레이킹으로 기습적인 추월 시도. 아마도 준하의 허를 찌를 거야...”
안토니아치의 불안한 시선이 해밀턴의 경주차를 향해 고정됐다. 그리고,
“해밀턴과의 격차가 줄고 있습니다! 53랩 2.9초! 54랩 2.4초까지 떨어졌습니다...!”
“갑자기?!”
또다시 시작된 해밀턴의 추격. 한 바퀴에 무려 0.5초 가까이 줄어든 상황에 페라리 피트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
“59랩 가장 빨랐습니다! 이번 랩 해볼 만합니다!”
파이널 랩까지 다섯 바퀴를 남겨두고 급격하게 격차를 좁혀가는 해밀턴. 59랩 페스티스트 랩을 달성하며 본격적인 어택을 시작했다.
“조금만 더...!”
선두를 빼앗기고 내내 초조했던 테오의 표정도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1턴 0.2초! 2턴 0.1초! 3턴 0.2초! 섹터 1 0.5초 단축! 전체 격차 1.2초!!! 선두 차량 4턴에 진입합니다!”
“...!!!”
“제대로 몰아붙이는구만...! 똑같이 섹터 2만 줄여주면...”
지금껏 숨겨온 스피드를 폭발시키는 해밀턴의 질주. 테오가 해밀턴의 차와 백스트레치의 DRS존을 번갈아 바라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배틀!!!”
해밀턴의 반격에 서준하도 뒤지지 않았다. 완만한 중고속 코너 4턴을 빠져나오는 두 선수의 탈출 속도는 비슷했고, 이어지는 코스에서 수차례 나란히 달리며 휠투휠 배틀을 벌였다.
“...!!!”
“이, 이게...!!!”
타이어와 차체가 부딪칠 듯 말 듯 코너 진입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는 두 선수.
“완전히 똑같이 달리고 있어!”
악셀, 브레이크, 스티어링 휠 등 0.001초도 차이가 없어 보이는 두 선수의 머신 컨트롤 타이밍. 육안으론 보기엔 오차란 없었다.
“둘 다 미쳤어...! 270km/h 이상으로 달리면서 저런 레이싱을 하다니!”
F1카가 얼마나 다루기 힘든 차량인지 잘 아는 엔지니어들에겐 두 선수가 마치 괴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왔다...!”
이제 두 선수의 앞으로 점점 백스트레치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격차는?!”
“1초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백스트레치 이후 10턴 인라인 오버테이크 코스. DRS 존을 앞두고, 무조건 선두 탈환이 가능해 보이는 상황 앞에 테오가 소리를 질렀다.
“똑같이 갚아줘. 끝내버려, 로이스!!!”
레이스 중반 해밀턴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주길 기대하는 메르세데스 팀. DRS 액티베이션 버튼에 불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9턴을 돌며 백스트레치로 들어서는 서준하. 윙미러에 등장한 해밀턴의 경주차를 흘겨봤다.
‘갑자기 이렇게 따라온다고?!’
필사적으로 60랩 가까이 집중력을 유지해왔지만, 이번 랩 해밀턴의 어택은 이번 시즌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고, 결국엔 추월 가능성이 높아지고 말았다. 게다가,
‘제기랄 프론트가...!’
안정적이던 프론트 타이어의 그립에 어떤 문제가 생겼음을 느꼈다. 만약 다시 선두를 뺏기더라도 다시 추월을 노려볼 수 있겠지만, 타이어 상태가 이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레이스의 혹독함을 곱씹으며 불길한 예감을 직감한 서준하. 백스트레치 전방으로 눈길을 돌린 그때,
‘엇...!!!’
백스트레치 중간을 달리는 새하얀 무언가를 포착했다. 마치 유니콘을 본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는데,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서준하가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이 슈퍼 스크린에 등장했다.
< 완전히 똑같이 달리고 있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