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나 이후, 그 어떤 드라이버도 이건 갖추지 못했지 >
“엠버 라운지 F1 드라이버즈 자선 패션쇼는 2006년, 알베르 2세 모나코 국왕님의 지원 아래 시작됐습니다...”
몬테카를로에 위치한 르 메르디앙 호텔의 스위밍 풀. 모나코 국왕을 비롯해 주변 국가의 귀족들 그리고 방송, 언론, 패션, 음악 분야에서 권위를 가진 셀럽들이 쇼가 진행될 스테이지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뚜뚜따따뚜뚜따따.
준비된 음악이 시작되고, 패션쇼 책임자 소니아가 출연진들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에 맞춰 스테이지 위로 등장하는 F1 드라이버들. 대열을 이끄는 가장 첫 번째 모델은 다름 아닌 서준하였다.
“준하. 내가 준하 씨를 메인 모델로 가장 앞에 세우는 건, 그 눈빛 때문이에요. 오늘 쇼에서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쇼에서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메인 모델로 서준하를 선택한 디자이너 소니아 어빈. 무대 밖으로 서준하를 내보내며 윙크를 했다.
찰칵.
찰칵.
무대에 나오자 리허설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적인 슈퍼모델부터 레이싱 관련 인사들까지. 어디서 한 번쯤 본 듯한 셀러브리티들이 즐비했다.
“너무 긴장한 것 같아. 걸음이 너무 어색해.”
“그럴 수밖에 없지. 저런 건 처음일 테니까.”
쇼에 대한 평가는 즉각적이었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서준하의 귀에도 들렸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자신을 두고 나온 게 아닐 거라 생각하며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 해보니까 이것도 감이 온다...’
전생에 이미 경험했던 무대고, 그때도 가장 좋은 평가를 들었던 모델이 바로 자신이다.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서준하는 자신의 걸음걸이에 집중했다.
‘원, 투, 쓰리... 원, 투, 쓰리, 턴...’
패션 모델이 자연스럽게 워킹하는 건 레이싱 드라이버가 경주차를 매끄럽게 운전하는 일과도 같다. 악셀, 브레이크, 스티어링 휠 등을 리드미컬하게 조작해 하나의 움직임으로 완성하듯이 워킹도 마찬가지다. 팔, 다리, 시선 등이 따로 놀지 않도록 리듬을 만들어 움직였다. 스테이지 앞으로 더 가까이 갈수록 관객들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스튜어트 선생님도 오셨네. 이따가 얼굴 한 번 비춰야겠어.’
몇몇 레이싱 유명 인사들 앞에 위축된 몇몇 모델들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감추고자 어색한 웃음을 지었지만, 서준하는 달랐다. 오히려 그들과 눈을 맞추며 가벼운 미소를 짓기도 했다. 같은 신인 모델이었지만, 서준하는 그들에겐 없는 여유가 있었다.
“소니아 어빈과 모델들에게 다시 한번 큰 박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포멀한 의상을 입은 드라이버들이 피날레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대열의 선두는 서준하. 무대 밖으로 나오며 이전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성공적인 행사 마무리에 기쁨을 표했다.
‘이걸 빼먹으면 안 되지.’
마무리 인사를 하며 스테이지를 한 바퀴 돌던 서준하가 귀빈석 앞으로 다가섰다.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모나코 국왕 앞으로 다가서는데,
“모나코에 온 걸 환영합니다. 멋진 레이스 기대하겠습니다, 하하.”
서준하에게 먼저 손을 뻗어 하이파이브하듯이 손을 건네는 국왕. 재빠르게 눈치를 보던 서준하가 그대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오우!”
그 모습에 주변에선 환호가 터져 나왔고, 두 사람의 웃는 모습이 취재진들의 카메라에 담겼다. 그 후로도 많은 선수들이 국왕 앞을 지나쳤지만, 어느 누구도 서준하와 같은 인사를 건넨 모델은 없었다.
‘몬테카를로...’
다시는 밟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었던 곳. 캣워크를 지나치면서 호텔 주변 몬테카를로의 전경이 서준하의 눈에 들어왔다.
‘또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익숙한 무대와 얼굴들을 마주하자 F1의 역사적인 장소, 모나코 그랑프리에 대한 추억과 함께 새로운 승리를 다짐했다.
***
“모나코 그랑프리 퀄리파잉 두 번째 세션이 시작됐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참가자들이 피트를 빠져나오는데요. 가장 먼저 피트를 나서는 선수는 페라리의 서준하입니다!”
“그렇습니다. Q1에서 가장 일찍 등장해서 워밍업을 최대한 많이 가져갔던 서준하였습니다. 지금도 일찍 나오는 걸 보니 아마 Q2에도 같은 전략을 쓸 것 같군요.”
Q1 어택 기록이 자신의 예상보다 좋지 못했던 서준하가 Q2에서도 최대한 많은 랩을 소화할 생각이었다.
“모나코 서킷은 시가지 서킷답게 이전까지 만났던 상설 전용 서킷과는 확연히 다른 트랙 조건을 갖고 있죠?”
“그렇습니다. 노면 상태와 레이아웃이 다른 것은 물론, 바짝 붙어있는 방호벽과 암코 배리어 등 이밖에도 다양한 블라인드 코너가 섞인 코스가 대부분이라 난이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좁은 노폭과 노면의 심한 고저차는 레이스 내내 드라이버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F1 서킷 가운데 가장 느린 서킷이지만, 이런 요소들 덕분에 오히려 변속 횟수는 다른 곳보다 훨씬 많은 곳이다.
“Q2가 시작한 지 5분 정도 지났는데요. 벌써 모든 선수들이 서킷에 나온 것 같습니다. 확실히 다른 서킷과는 예선 전략이 달라요.”
“그렇습니다. 어택 타이밍도 빠르죠? 일찍 피트를 나섰던 선수들이 플라잉 랩에 들어갔습니다!”
어택을 시작한 선수들 주변으로 보이는 서킷의 모습들. 기존의 광고와는 전혀 다른 배너들이 중계 스크린에 잡혔다. 모나코는 FOM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벗어난 유일한 이벤트이기에 그 어느 그랑프리와도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첫 번째 어택 기록이 좋지 못한 사인츠 주니어! 또다시 어택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서준하! 토로 로쏘의 차량을 페라리카가 쫓습니다!”
“1분 13초 초반으로 가야 Q3 안정권인데요. 지금 기록이라면 두 선수 모두 Q3 진출이 아슬아슬하죠.”
만족스럽지 못했던 첫 번째 어택 기록. 인 랩과 워밍업 랩까지 진행했던 서준하가 또 한 번의 어택을 시작했다.
트래픽과 더티 에어를 피하고자, 앞차와의 간격을 유지했던 서준하. 무난하게 1턴을 빠져나와 다음 코스로 이동해가던 그때,
끼이이이이이익.
콰과과과가가가가쾅.
퍼억.
엄청난 충돌음과 동시에 서준하의 눈앞에 등장한 모래 먼지. 3턴 마쎄네 코너 앞으로 부서진 경주차의 부품이 나뒹굴고 있었다.
“오마이갓!!! 사, 사인츠 주니어의 차가 방호벽을 들이받았습니다! 아 큰일입니다!!!”
“아! 뒤따르는 서준하도 2차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요...!”
제법 속도를 올리며 빠져나가야 하는 코너에서 스핀하며 미끄러진 토로 로쏘의 경주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살 난 그의 경주차가 화면에 잡혔다. 드라이버는 의식을 잃었는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부와아아앙.
끼이익.
잔해들을 피해 마쎄네 코너를 통과하는 서준하. 타이어가 데브리를 밟지 않도록 요리조리 피하며 경주차를 몰았다. 그런데,
“...!!!”
“...!!!”
뒤이어 모두가 예상치 못한 장면이 등장했다. 사고 차량을 빠져나간 서준하가 런오프에 자신의 차량을 멈춰서는데,
“아! 서준하가 사인츠에게로 달려갑니다!!!”
엄청난 스모그와 함께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사고 차량. 레이스가 중단되지도 않은 상황에 서준하가 그곳으로 달려가는 장면이 전 세계로 중계됐다.
***
[일단 모래 먼지를 보고 큰 사고가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바깥에선 보이지 않았지만, 사고 현장 가까이로 들어서니 차량 상태가 너무 심각했습니다. 사인츠 선수가 의식이 없을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Q2 종료 직후 서준하의 인터뷰가 중계됐다. 몬테카를로 서킷의 페라리 피트로 수십 명의 기자들이 모여들었고, 모든 이의 관심이 인터뷰 내용에 집중됐다.
[그리고 차량에서 연료가 새어 나오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때 이걸 끄지 않으면 엄청난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가서 그를 꺼내야 한다... 레이스고 뭐고, 그냥 이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서준하의 뒤에 이어 사고 현장에 들어온 경주차도 많았지만, 차에서 내려 현장으로 달려간 건 오직 서준하뿐이었다. 서킷에서 사고가 있었을 때마다 전생 자신의 사고 장면이 떠올랐고, 항상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움직이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세나가 몸소 보여준 드라이버 정신, 아마 그것이 제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92년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세나 역시 퀄리파잉 도중 사고로 앞차의 드라이버가 의식을 잃자, 위험을 무릅쓰고 사고 차량으로 달려갔던 적이 있다.
[음... 그것 말고는 제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네요]
[와... 그렇군요. 오늘 이후로 ‘포스트 세나’라는 수식어가 서준하 선수 옆에 따라다니지 않을까 싶은데요...]
서준하가 말을 꺼내기 이전, 오늘 상황을 지켜봤던 수많은 팬들은 이미 그 모습에서 세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세나가 보여준 드라이버 정신이라...”
구조 장면과 서준하의 인터뷰가 VVIP 스텐드의 슈퍼 스크린으로 중계됐다. 그 모습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70대 고령의 이탈리아 남성. 엔초 페라리의 유일한 상속자 피에로 페라리가 25년 전의 일을 떠올리며 서준하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아까 얘길 들어보니, 사인츠 주니어가 후송차에 오를 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이거 간접적으로 충격을 좀 받진 않았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아무래도 심리적인 충격이 좀 있겠지. 아직 좀 어리니까 말이야.”
마샬과 의료진의 등장에도 계속해서 사인츠의 목과 머리를 손으로 받치며 후송을 도왔던 서준하. 경기 재개 후에도 자신의 랩타임을 갱신하지 못하며 가까스로 Q3에 진출했다.
“괜한 행동을 한 건 아닌지... 심리적인 충격으로 Q3와 내일 레이스 결과에 영향을 미칠지 걱정스럽군요.”
“허허, 자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부하 직원의 걱정스러운 말에 피에로 부회장이 웃으며 되물었다. 그 모습에 놀란 직원이 어쩔 줄 몰라 했다.
“Q3를 못 올라갔어도. 아니, 내일 모나코 그랑프리를 완전히 망쳐도 괜찮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페라리가 전에 없던 걸 갖게 될 가능성이 생긴 걸지도 모르네.”
“전에 없던 거라면...?”
오늘 서준하의 행동에 큰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하는 피에로 부회장. 걱정스러운 페라리 팀 스태프와 달리 그의 얼굴은 밝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F1 최고의 드라이버로 해밀턴이나 슈마허보단 세나를 떠올리지.”
“그, 그렇죠...”
“대중의 기억에 더 오래 남을 수 있는 건, 항상 최고의 성적을 낼 수 있는 능력만이 전부는 아니야...”
아일톤 세나는 역시 당대 최고의 성적으로 정상에 오른 드라이버지만, 후대에는 더 뛰어난 기록을 세운 드라이버들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세나가 F1 유일하고도 영원한 별로 기억되는 이유가 있었으니,
“휴머니티, 세나 이후, 그 어떤 최고의 드라이버도 이건 갖추지 못했지.”
서준하에게서 세나가 보였다. 단순히 오늘의 사건만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그간 그의 인터뷰와 행실에는 세나와 같은 드라이버가 갖춰야 할 자질이 있었다.
“서준하, 이 친구 엔지니어링 파트도 꽤 알고 있다지?”
“네, 맞습니다. 헌데 어떤 이유로...?”
사실 페라리는 1980년대 세나가 활약한 10년의 세월 동안 라이벌 팀으로서 가만히 그를 지켜보기만 해야 했고, 늘 세나와 같은 드라이버를 원했다. 부회장이 부하직원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려고 하는데,
“슈마허한테 맡겼던 걸, 이 친구한테도 맡겨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구만...!”
페라리의 슈퍼카 제작과 생산을 총괄하고 있는 피에로 페라리. 오늘 결정적인 사건으로 서준하를 향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 세나 이후, 그 어떤 드라이버도 이건 갖추지 못했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