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네 차가 완벽히 컨트롤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넌 느린 거야 >
“또 한 번 스타트라인을 통과하는 서준하! 스무 바퀴째 리드를 가져가고 있습니다!”
“사실상 모나코 그랑프리는 퀄리파잉이 레이스라는 말이 있을 정도죠. 이번 시즌도 역시 선두권은 쉽사리 순위가 뒤바뀌지 않는 모습입니다.”
스타트와 걱정스러웠던 첫 랩을 무사히 마친 서준하는 모두의 예상대로 무난한 레이스를 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비나 사고로 인한 변수는 없었고, 마카오의 서킷처럼 폭이 좁은 트랙 덕분에 뒤차들이 쉽사리 추월을 노리지 못했다.
“해밀턴과 서준하의 격차가 처음보다는 더 벌어졌습니다. 어쩌면 초반 선두 공략보다는 다른 전략을 택한 것 같은데요. 좋은 선택입니다. 계속 저렇게 밀어붙였다간 추월도 못 하고, 타이어는 타이어대로 쓰다가 어쩌면, 뒤따르는 페텔에게 기회를 줄지도 모르니까요.”
첫 코너와 터널 그리고 누벨 시케인 등 모나코의 추월 포인트에서 끈질기게 서준하를 따라붙던 해밀턴. 이제는 선두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클린 에어 속에서 타이어를 관리하고 있었다.
“20랩의 마지막 코너, 안토니 노게즈로 들어오는 서준하! 코너의 모양에 현혹되지 않고, 홈스트레치에서의 탈출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정확한 라인을 유지합니다!”
서준하가 다시 한 바퀴를 마치며 스타트 라인을 통과했다. 20랩 그의 랩타임은 1분 15초 412로, 선수들의 평균 랩타임보다 빠른 속도를 유지했다.
“좁은 방호벽들 사이에서도 서준하의 머신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굉장히 안정적이에요!”
매 코너 아슬아슬 충돌 장면을 연출할 것만 같은 다른 선수들과는 대조적인 모습. 하지만 중계진의 칭찬과 달리 실제 서준하의 주행 상황은 달랐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현재 경주차는 너무나 불안정했다. 3턴 마쎄네의 고속 선회 구간에서 서준하는 차량의 중심이 바깥으로 밀려나는 걸 느꼈다.
-지금 살짝 언더스티어가 났다. 이제부턴 마쎄네에서 진입 속도를 조금 낮추도록!
3턴 진입 전, 오르막길이 계속되는 동안 앞바퀴 그립이 강하지 않은 가속 구간이라 머신은 불안정했고, 차체를 똑바로 세우기 위해 정신없이 카운터 스티어링을 연달아 했다. 게다가 이건 특정 구간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었다.
“젠장, 애초에 그립이 너무 없어!”
팀의 주행 데이터상 트랙 에볼루션 효과도 거의 미미한 곳이 바로 모나코였다. 타이어 스트레스와 횡 방향 스트레스, 아스팔트 거칠기와 그립 등등 타이어가 그립감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제로에 가까운 상황. 트랙에는 온갖 잡다한 가루들이 끼어 있어 그립감은 불량스러움 그 자체였다.
“이러다 한 번 반응이 늦으면 그대로 부딪히겠다! 롭, 무슨 방법이 없는 거야?!”
사인츠 주니어가 경주차를 완전히 부서졌을 정도로 사고가 난 건 한순간에 완전한 제어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하, 방법...?
짧게 몇 바퀴를 달렸던 퀄리파잉과 달리 스무 바퀴 이상 연속해서 달리자, 원인 모를 두려움이 서준하를 엄습해왔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속도를 줄일 순 없다. 더욱 그립을 찾으며 달릴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딴 건 없어! 다 똑같아! 원래 모나코는 그런 상태로 78랩까지 버티는 레이스라고!!!
롭의 무전에 한 대 맞은 듯했다. 그렇다. 지금 이건 자신만이 겪는 상황이 아니다. 게다가 모나코는 아니, 레이스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지금 네 차가 완벽히 컨트롤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넌 느린 거야! 이제 그딴 생각은 집어치우고 그냥 끝까지 버텨!!!
롭의 말이 맞다. 이곳은 F1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인 모나코 서킷. 이곳의 우승자를 최고로 여기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2시간 가까이 흐르는 레이스에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한다.
“그래, 완벽한 컨트롤 따윈 없지...”
승리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인지, 모나코가 원래 어떤 곳인지, 레이스가 어떤 것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다시 해보자...!”
흥분했던 이전과 달리 축 가라앉은 서준하의 목소리. 다시 스티어링을 꽉 잡으며 흔들리는 차량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
[ 6R Monaco GP – Lap Time ]
[1.서준하 US – 30 / 78 laps]
[2.해밀턴 US +2.5s]
[3. 페텔 US +4.5s( +2.0s)]
[4.보타스 SS +6.0s( +1.5s)]
[5.막누스 US +9.8s( +3.8s)]
피트 월에 표시된 타임 로그를 체크하는 페라리 팀 스태프들. 아리바베네 감독이 선두부터 5위까지 10초도 차이가 나질 않는 랩타임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해밀턴은 무슨 생각인 건지, 10랩 이후 단 한 차례도 추월을 노리지 않고 있습니다.”
“피트 스탑을 노리겠다는 거지.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으니까.”
서른 바퀴 내내 해밀턴은 페텔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았고, 선두와는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덕분에 페텔은 어느 정도 타이어 관리에서 손해를 본 상황. 레이스 초반 프론트 로우를 점령하겠다는 페라리의 전략이 쉽지 않아 보였다.
“에릭손이 보입니다! 터널이 끝나고 누벨 시케인에서 준하와 만날 것 같습니다!”
“벌써? 이제 시작이구만...”
레이스가 절반도 넘지 못한 시점에서 백마커가 선두 앞으로 등장한 상황. 총 길이 3.3km라는 짧은 서킷과 클린 에어를 노리는 하위권 참가자들의 이른 스틴트가 일찍부터 백마커를 만들어냈다. 늘어나는 트래픽 소식에 피트 월의 분위기는 초조해지고,
“준하, 현재 타이어 상태는?”
40랩 전후가 일반적인 US 타이어의 교체 타이밍. 아리바베네는 타이어 상태 체크를 위해 드라이버에게 직접 무전을 보냈다.
‘평소와 달라...’
감독은 서준하에게 적극적이었다. 그런 감독의 달라진 모습을 포착한 안토니아치. 타이어 교체 타이밍이 오늘의 순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했지만, 감독의 태도에서 서준하를 우승시키겠다는 의지가 드러났다.
“아직 타이어는 괜찮다는구만. 그렇다면 계속 처음 전략을 유지하는 게 낫겠지, 안토니아치?”
“다행입니다. 일단 계속 버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계속 버틴다...”
모나코 GP는 참가 팀 전략담당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곳이다. 감독이 묻기 전까지 안토니아치의 머릿속은 온통 피트 스탑 전략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뒤쪽에서 언더컷이 떨어지면, 그에 맞춰 타이밍을 잡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한 번뿐인 피트 스탑에 신중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모나코에선 그 이유가 특별하다. 스틴트 초반 새 타이어의 온도를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트래픽이 전 구간에서 고루 발생한다.
게다가 피트레인 제한 속도도 다른 곳보다 20km/h 낮기 때문에 좀처럼 추월이 나오지 않는 이곳에서 피트 스탑만이 유일하게 순위를 뒤바꿀 가능성이 높다.
“아무래도 눈치 싸움이 치열해질 것 같습니다. 뒤차들의 랩타임으로 봐선 최대한 버티기로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약 서준하가 피트 스탑에 들어가 트래픽과 새 타이어로 애를 먹을 때, 추격자들이 롱 스틴트로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 지난 시즌 US 타이어로 50랩 이상 버티는 선수가 나왔을 정도로 모나코에선 타이어가 받는 스트레스가 적다.
“엇!”
사고는 물론, 언제 상대가 전략을 바꿀지도 모르는 긴장감이 지속되는 가운데, 갑작스럽게 피트 월 한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스, 슬로우...! 슬로우 펑쳐입니다!”
“뭐?!”
새빨개진 얼굴로 코치진들을 향해 외치는 레이스 엔지니어 아다미. 그의 목소리에 피트 월이 순식간에 마비됐다.
“이런 제기랄...!!!”
트랙 어딘가에서 데브리를 밟은 페텔의 타이어에 서서히 공기압이 빠지고 있었고, 터널을 빠져나온 경주차의 출력은 서서히 떨어졌다.
“예상보다 교체 시기가 이르지만... 어쩔 수 없지. 곧바로 타이어 체인지하도록!”
“그나마 피트 레인을 지나치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군요...”
계획한 40랩 피트 스탑보다 다섯 바퀴나 일찍 들어온 페텔. 덕분에 좁아터진 트랙에서 치열했던 순위권 경쟁자들의 숨통이 조금은 트이게 됐다.
‘골치 아픈 상황은 피했어. 조금만 더 버텨준다면...’
추격자들의 이른 스틴트는 앞차에겐 희소식이다. 서준하의 랩타임을 체크하는 안토니아치. 1분 15초대 기록을 벗어나지 않는 모습에 안도하던 그때,
‘...너도?!’
페텔이 빠지고 36랩. 선두 뒤를 달리던 해밀턴이 17턴 헤어핀을 탈출 후 피트 쪽으로 방향을 트는 모습을 포착했다.
“감독님! 해밀턴이 피트 레인으로 들어섭니다!!!”
롱 스틴트 전략을 고수할 것으로 보였던 메르세데스 팀. 지루한 레이스에 변화를 주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
“페텔의 교체는 타이어 펑쳐 때문인 걸로 확인됐는데요. 지금 해밀턴의 교체는 페텔의 언더컷에 대한 대응인지, 아니면 메르세데스의 어떤 의도가 담긴 선택일 수도 있고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원 스탑 롱 스틴트 전략이 유리한 모나코 그랑프리. 갑작스러운 해밀턴의 타이어 교체에 혼란스러운 건 중계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습니다. 아직 두세 바퀴 이르거든요? 무전 내용으로 봐선 해밀턴의 차량에 문제가 생긴 것 같지 않고요. 자, 이제 해밀턴이 SS타이어로 교체를 진행합니다!”
잠시 후, 중계 스크린으로 분주해진 메르세데스의 피트 월이 등장했다. 손톱을 물어뜯는 테오 감독 주위로 보타스의 레이스 엔지니어와 전략팀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로이스의 교체 타이밍이 좀 이르지 않습니까, 감독님?”
“아니, 우리한텐 지금이 기회다.”
순위권 선수 모두가 US타이어로 출발할 때, 나 홀로 SS타이어로 질주를 이어온 보타스. 페텔이 피트 스탑으로 빠지면서 보타스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올 수 있게 됐고, 이에 테오는 재빠르게 전략을 변경했다.
타이어 덕분에 경쟁자들보다 스틴트가 훨씬 더 긴 보타스를 활용할 생각이었는데,
-오늘 팀 우승은 너한테 달렸다, 보타스. 최대한 밀고 나가도록!
이번 모나코 레이스에서도 메르세데스는 철저히 퍼스트 드라이버 중심의 전략을 펼쳤다.
“Copy. 드디어...!”
오늘 보타스의 임무는 해밀턴이 복귀하고, 새 타이어의 온도를 끌어올릴 때까지 선두가 치고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 해밀턴과 페텔이 피트 스탑으로 들어가자, 이제 보타스가 2위에 올랐다.
‘타이어가 빛을 발휘할 때가 왔다!’
그의 앞으로 스타트부터 지금까지 끈질기게 앞길을 막아선 차량들이 사라지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이제 너도 사라져!!!’
레이트 브레이킹을 통해 벌어진 격차를 줄이기 시작하는 보타스. 덕분에 자신과 경주차가 받는 부담은 더욱 커졌지만,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최대한 스틴트를 늦추고 있는 서준하가 추격자들의 피트 스탑 소식을 들었다. 이제 그의 뒤로 또 다른 실버 애로우가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보타스겠지. 그렇다면...’
처음 보타스의 타이어 선택을 보고 난 뒤 지금 상황을 예측했었던 서준하.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건 이것뿐이야...!’
곧바로 그에 대응하기 위한 자신의 플랜을 떠올리며 질주를 이어갔다.
< 지금 네 차가 완벽히 컨트롤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넌 느린 거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