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와 똑같아 >
“해밀턴의 피트 스탑 이후 2위를 달리고 있는 보타스. 44랩 선두와 격차를 2.3초까지 줄였습니다!”
“서준하의 랩타임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거든요? 여덟 바퀴만에 3.7초를 줄여버리다니요! 보타스에게 임무가 떨어진 듯합니다!”
해밀턴과 페텔의 공백이 만들어낸 공간과 클린 에어 덕분에 더욱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었던 보타스. 선두 자릴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며 중계진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서준하 44랩 피니시! 아 1분 16초 187. 랩타임이 떨어졌어요!
“서준하에게도 한계란 게 있었군요.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입니다. 지금 Q3까지 마친 타이어로 44바퀴 동안 달리고 있는 거니까요...!”
서준하의 첫 스틴트는 다른 US 타이어를 장착한 드라이버들 가운데 가장 길었다. 아무리 트래픽과 클린 에어의 이점을 가진 선두 자리라고 해도, 퀄리파잉에서 폴기록을 만들었던 타이어를 지금까지 사용하는 건 드문 일이었으니까.
“자, 그러면 이번 랩 또는 다음 랩에서 보타스에게 기회가 올지도 모르겠는데요?!”
드디어 45랩 서준하의 속도는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고, 메르세데스 팀은 이를 보타스에게 알렸다.
“스위밍풀 코너로 진입하는 두 선수! 오늘 레이스 선두 서준하와 가장 가까이 붙는 선수는 보타스군요...!!!”
기회를 포착한 보타스는 브레이크를 늦추고 고속으로 선회했다. 큰 사고가 날 확률은 더욱 높아졌지만, 코너 탈출에도 조금의 여유를 두지 않으며 거세게 몰아붙였다.
“거의 다 잡았습니다, 보타스! 1턴 직전에 추월이 가능해 보여요!!!”
격차를 1초 가까이 따라붙은 보타스. 다음 DRS존에서 추월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졌다. 오늘 레이스 처음으로 선두가 바뀔지도 모르는 장면에 중계진은 물론, 갤러리 모두의 시선이 17턴 라스가스 코너로 향했다. 그런데,
“아! 서준하가 인라인을 타고 들어가는데요!!!”
보타스가 17턴의 바깥쪽으로 치고 나오자, 진로를 막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는 서준하. 오히려 코너 안쪽으로 붙어버리는데,
“아! 서준하! 피트 레인으로...!!”
SS 타이어를 장착한 보타스와 하위권 선수들을 제외하고, 아직 새 타이로 교체하지 않은 건 서준하뿐이었다.
“그렇죠! 서준하가 보타스를 상대하면서 랩타임을 손해 볼 필요가 하나도 없죠! 지금 피트 스탑은 나이스 타이밍입니다!!!”
팀의 계획대로 다음 랩에서 피트 인하려고 했던 서준하. 갑작스런 보타스의 추격에 재빠르게 대처하며 영리하게 레이스를 펼쳤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끼이이익.
척.
“헉... 롭, 피트 레인 출구 트래픽 예상해서 보고해줘. 헉...”
피트 레인과 박스에 멈춰서도 서준하는 쉽사리 집중을 놓지 않았다. 딱 한 번 있는 피트 스탑이 꼬이게 된다면, 45바퀴 동안 고생한 결과가 한순간에 헛수고가 된다. 게다가 해밀턴을 끌어올리려는 메르세데스의 전략이 뻔했기 때문에 지금부터가 승부처였다.
-해밀턴과 페텔 동시에 라스가스로 접근 중. 리스타트 이후 격차는 4~5초 정도 될 것 같다.
“...오케이!”
다시 서킷에 복귀해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수치였지만, 서준하의 생각보다 격차는 그다지 크게 벌어지지 않았다. 새 SS 타이어가 작동 온도에 오르기까지 또다시 위기가 찾아올 것은 분명해 보였는데,
-와!! 섹터 1 트래픽 제로!! 그대로 나와서 달려!!!
오늘 레이스 또 한 번 행운이 따르는 상황.
“...!!!”
피트 스탑의 또 다른 변수, 백마커들이 피트 레인 출구부터 서준하가 속도를 끌어올려야 하는 구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됐어!!! 앞으로 두세 바퀴만 버텨내면...!’
피트 스탑마저 완벽했던 서준하는 안전하게 피트 레인으로 올라탔다. 60km/h의 느린 제한 속도에 답답함을 참아내며 출구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1단, 2단, 3단... 175km/h...]
[4단, 5단, 6단... 264km/h....]
다시 한번 휘청거리는 머신을 휘어잡으며 속도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
고속 직선 구간, 경주차의 계기판이 서준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그와 동시에 그 옆 윙미러로 해밀턴과 페텔의 경주차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
“서준하가 나왔습니다!”
“제기랄!”
메르세데스가 기대했던 선두 차량의 피트 스탑 시나리오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이제 그들이 기대를 걸 수 있는 건 사고와 같은 돌발 상황뿐. 서준하가 롱 스틴트로 최대한 이점을 챙기고도 2위와의 격차는 4초도 벌어지지 않았지만, 테오는 지금 상황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제 보타스와 격차는 23초대입니다!”
“해밀턴, 해밀턴과 격차는?!”
“아! 3.76초! 생각보다 크게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서준하의 리스타트 전, 피트 레인 출구 주변으로 아무런 장애 요소가 보이지 않자, 이미 그의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럼 이제 보타스! 보타스의 피트 스탑은 언제로 예정해둘까요, 감독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 네...”
“랩타임이 크게 떨어지지 않을 때까진 그냥 달리라고 해!”
지금 테오는 보타스의 타이어가 터질 때까지 달리도록 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크게 속도만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해밀턴이 2위로 올라오기 전까지 최대한 선두에서 서준하의 방해 요소가 되는 게 나아 보였다.
“괜찮네, 괜찮아. 해밀턴도 페이스가 오를 때가 왔어. 저것 보게 랩타임도 꾸준하게 오르고 있잖은가.”
제아무리 모나코가 추월하기 어려운 서킷이라고 해도 지금 팀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새 SS타이어로 교체 후, 해밀턴의 랩타임을 체크했던 라우다가 손을 뻗어 페라리카를 가리켰다.
“확실히 새 타이어가 힘들어 보여. 속도를 충분히 내지 못하고 있네.”
오히려 피트 스탑 전 랩타임이 떨어졌을 때의 돌파 속도보다 느려 보이는 서준하의 경주차. 탈출 속도를 살려내지 못한 탓인지, 직선 구간에서 속도가 크게 떨어져 보였다.
“그렇죠... 지금이 마지막 기회지... 보노, 지금부터 어떻게든 해밀턴의 랩타임이 끌어올려. 구석구석 숨어있는 백마커 다 찾아내서 해밀턴에게 알려.”
“하하... 그러죠.”
“웃지마, 지금 웃을 기분 아니니까...”
레이스 엔지니어들과 서킷의 트래픽을 확인하며, 해밀턴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전력을 쏟아붓는 테오 감독. 라우다의 말에 힘을 얻은 그가 서준하의 경주차와 페라리 팀 피트 월을 번갈아 바라봤다.
향후 보타스가 피트 스탑으로 빠지며 선두를 되찾게 될 페라리팀. 해밀턴과 벌어진 격차 그리고 중요했던 피트 스탑이 무난하게 흐르며 팀 분위기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출력이 떨어진다는데요?”
“뭐?!”
“...갑자기 무슨!”
롭으로부터 전달받은 서준하의 메시지. 고속 구간에서 출력이 떨어진다는 무전 내용에 페라리의 피트 월이 다시 한번 심각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새 타이어... 아니, 터널에서 다시 달려보라고 전하게...”
그 소식에 아리바베네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일시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음 직선 주로까지 기다려보기로 하는데,
“하... 7단까지 기어가 안 올라간답니다... 이거 엔진 문제 같은데요?!”
“그게 무슨...!”
서준하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터널 빠져나가 시케인 전까지 다시 속도를 높이려고 시도해봤지만, 6단 이후 기어는 올라가지 않았다.
모나코 GP의 단골손님인 엔진 출력의 문제. 아마도 피트 스탑 전의 연속 주행 탓에 엔진룸의 열 발생량이 한계를 넘으며 생긴 문제가 분명했다.
“7단을 쓰지 못한다는 건, 아마도 ... MGU-K 파트의 문제 같습니다.”
MGU-K는 엔진 파츠로, 브레이킹 시 버려지는 에너지로 제네레이터를 돌려 전지에 충전하고, 필요할 때 이 에너지를 이용해 가속에 사용하는 장치다.
“후... 이거 차를 세워야 하는 건가, 비노토?”
“그게...”
서준하의 무전 내용을 전달받고, 고민에 빠졌던 CTO 비노토가 조심스럽게 얘길 꺼냈다.
“사실 7단 이상을 쓰지 못하는 것일 뿐이지, 1~6단까지는 전부 사용 가능합니다...”
“흠...”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모나코는 7단 이상 속도를 내는 구간이 많지 않습니다.”
모나코 서킷의 평균 속도는 160Km/h로 F1에서 가장 느린 서킷이다. 270km/h 이상의 속도를 내야 하는 곳은 홈스트레치와 터널 구간 그리고 2~3턴 총 세 곳뿐. 비노토는 아직 해볼 만하다는 표정인데,
“...준하를 끝까지 믿어보시죠.”
현재 팀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출력이 떨어지는 차량으로 서른 바퀴가량을 남겨둔 서준하. 순탄하게 끝날 줄 알았던 레이스가 한순간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
“아! 서준하의 랩타임이 생각보다 금방 좋아지지 않는데요! 새 타이어에 적응할 시간이 아직 더 필요해 보이는군요!”
중계진은 물론, 참가 팀 대다수가 서준하의 랩타임이 회복되지 못하는 자세한 속사정을 알지 못했다.
“해밀턴이 2.5초까지 격차를 좁혔습니다! 지금 이 추세라면 충분히 추월을 노려볼 수도 있겠는데요?!”
때문에 티포시들과 서준하의 팬들은 그저 새 타이어의 작동 온도가 어서 오르기만을 바라며 그를 추격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봤다.
“자! 지금 기회를 노리는 건 해밀턴만이 아니죠! 페텔과 막누스가 레이스 후반 대역전극을 노리고 있습니다!”
“서준하의 뒤를 따라붙는 추격자들! 5위 막누스까지 격차가 이제 불과 6초 안으로 들어왔군요...!”
앞차의 미묘한 변화는 트랙의 선수들의 눈에 더 잘 보인다. 특정 구간 서준하의 느려진 스피드를 포착한 추격자들이 냄새를 맡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특히나 레이스 엔지니어 아다미로부터 상황을 전해 들은 페텔에게 지금 선두의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직선주로에 오른 서준하의 윙미러로 이전보다 훨씬 많고 가까워진 추격자들이 보였다.
-온다! 페어몬트! 해밀턴이 붙는다!!!
팀으로부터 회복 불가능한 차량의 문제를 전해 들었다. 덕분에 팀 라디오에도 불안과 긴장이 가득했다. 하지만,
‘레이스 끝날 때까지 한 대도 못 지나가게 만들어줄게...!’
불리한 상황에도 서준하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남은 스무 바퀴 동안 빈틈을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왜냐하면,
‘그때와 똑같아...!’
전생의 18시즌 모나코 그랑프리, 레드불의 리카도는 지금 서준하와 같은 문제를 안고 50랩을 방어하며 결국 우승을 차지했었다. 무엇보다 선두의 바로 뒤를 달리던 드라이버는 서준하 자신이었다.
‘모나코는 6단으로도 충분하다는 게 이미 증명됐으니까!!!’
출력이 떨어지는 현상이 처음 일어났을 때 서준하는 즉각 알아차렸다. 무엇이 문제이고, 그 현상이 어느 때와 같았는지를.
< 그때와 똑같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