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
‘1턴 진입로, 마쎄네 진입로 그리고 터널의 종반까지... 확실히 출력이 떨어져...!’
서준하의 바로 뒤를 달리는 해밀턴에겐 특정 구간 선두 차량의 속도가 이전과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나 클린에어의 이점을 보고 있을 선두 차량이 직선주로에서 뻗어 나가지 못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선두와의 격차 1.5초! 이제 다 왔어, 로이스!
서준하의 리스타트 이후 최대한 격차를 좁히고 있는 해밀턴. 64랩 추월 가능권에 들어오며 오늘 레이스 최고의 기회를 잡았다.
“훗...!”
지금까지 서준하를 특별한 신인이라고 생각하던 자신의 모습에 해밀턴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집중력이 떨어졌겠지. 힘에 부치는 거야. 그게 바로 너 같은 신인들이 안 되는 이유다...!’
레귤러들도 순위권 진입은커녕 완주를 목표로 할 정도로 어려운 모나코 그랑프리. 한 번도 이곳을 달려본 적 없는 신인 드라이버가 우승을 차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우어어어어!!!”
페어몬트 헤어핀부터 터널까지 이어지는 7, 8턴까지 좌우로 발생하는 3G 이상의 G포스를 견뎌내는 해밀턴. 8턴 포르티에를 탈출한 경주차가 어두운 내리막 터널로 치달았다.
‘여기야...!’
그리고 이어지는 모나코 최고의 추월 포인트 누벨 시케인. 해밀턴이 오늘 레이스 최고의 명장면을 떠올리며 앞차의 슬립 스트림에 들어갔다. 그런데,
“...!!!”
뒤차가 추월 시도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터널 통과 직후 좌측 공간을 틀어막는 서준하.
“그렇다면...!”
이에 해밀턴이 재빠르게 대응하며 바깥쪽으로 진로를 바꿔 앞으로 나왔다. 그렇게 나란히 시케인에 진입하게 됐는데,
-여기서 절대 밀리면 안 돼, 로이스!!!
“...!!!”
시케인에 진입한 두 선수가 자리싸움을 벌였다. 해밀턴은 안쪽으로 들어오려, 서준하는 그런 상대를 바깥쪽으로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끼이이익.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다시 한 번 동시에 시케인을 빠져나가는 두 대의 차량. 탈출 속도가 더 빠른 건 서준하였다.
“XX!!!”
-끝까지! 끝까지 해! 생 드보(1턴) 진입로에서 또 해볼 수 있다고!!!
아쉬움도 잠시, 보노의 무전에 다시 기회를 노리기 위해 코스를 살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우측으로 모나코 유일한 DRS존 홈스트레치가 보였다. 분명한 기회가 왔음을 직감한 해밀턴이 DRS존에 진입하는데,
-이제 DRS다!!!
해밀턴이 앞차의 슬립 스트림에 들어서려는 순간,
-엇...?!
“...!!!”
갑작스런 기척에 놀란 메르세데스 팀. 우측 시야로 등장한 또 다른 경주차의 프론트 노즈에 해밀턴이 당황하고 말았다.
“페, 페텔!!!”
***
“와아아아아아아아아!!!”
60랩 후반 페라리팀의 드라이버들이 프론트 로우를 차지한 상황에 모나코에 모인 티포시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훼에에에에에에엥.
60랩에서 페스티스트 랩을 달성하며 줄기차게 해밀턴을 쫓아왔던 페텔. 드디어 선두 자리에 정신이 팔렸던 해밀턴을 앞지르는 데 성공했다.
“하마터면 방호벽과 충돌할 뻔했어. 방금 이건 거의 목숨을 걸고 뛰어든 시도였어...”
환호하는 티포시들과 달리 페라리 피트의 분위기는 밝지 못했다. 레이스가 후반에 다다르면서 페텔이 굉장히 저돌적이었고, 몇 번이나 위험천만한 상황을 연출했기 때문. 무엇보다 팀을 초조하게 만든 건 바로,
“시작됐다...!”
여태껏 모나코 레이스의 프론트 로우는 팀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상황이었지만, 현재 페라리 팀 상황엔 맞지 않았다. 그리고,
“...!!!”
“...!!!”
서준하의 약점을 잘 아는 그가 직선 주로 이후 마쎄네 코너에서 추월을 시도했다. 격차가 조금 있었지만, 페텔은 다음 코스에서 수월한 추월을 위해 서준하를 압박했다.
“저러다 들이받겠어...!”
앞차와 부딪힐 듯 계속해서 레이트 브레이킹 하며 압박을 가하는 페텔. 덕분에 페라리 팀 분위기는 엉망이 됐다.
“감독님 이거 막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결승선을 눈앞에 두고, 둘 다 퍼져버릴까 미치겠습니다...!”
“크흠...”
누군가의 사소한 슬립 한 번에도 심각한 사고가 날 수 있는 상황. 승점 물론, 드라이버와 경주차까지 위험할 수 있다. 흥분한 피트 월 엔지니어들이 아리바베네 감독만을 바라보는데,
“둘의 자존심을 건 레이스야. 우리가 말려도... 후.”
이미 팀이 퍼스트 제도를 폐지한 상황에 페텔을 말리는 건 우스운 일이다. 게다가 레이싱 카테고리를 막론하고 드라이버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모나코 GP의 우승. 두 선수 모두 우승 경험이 없기에 그 승부욕은 엄청날 게 분명했다.
“말린다고 말릴 수 있는 게 아니지. 그저 무사히 들어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수밖에...”
안토니아치도 감독의 곁으로 다가서 서킷을 바라봤다. 하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어딘가 흥미로운 걸 발견한 듯했다.
‘오늘 우승이야말로... 완전한 세대교체의 기회다, 준하야!’
모나코라는 역사적인 그랑프리를 불리한 차량 조건 속에서 우승한다는 건, 현존하는 드라이버 가운데, 최고의 실력을 갖췄다는 걸 입증하는 셈.
“이제 파이널 랩까지 단 한 바퀴! 터널을 빠져나오는 페텔! 이번에도 움직임이 심상치 않죠?!”
오늘 서준하가 우승한다면, 이제 더는 어느 누구도 그를 신인 취급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페텔이 서준하의 리어윙에 가까이 붙는데요...!”
기회를 잡은 페텔이 해밀턴이 시도한 것과 동일한 어택 라인으로 추월을 시도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페라리 피트 월이 또 한 번 엄청난 불안에 휩싸였다.
***
부아아아아아아앙.
위이잉.
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위이잉.
출력이 조금 떨어져도 괜찮다. 이미 서준하는 뒤차가 어느 코스에서 어떻게 파고들지 경험적으로 다 알고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까지도.
‘너희가 노릴 곳은 여기밖에 없어...!’
자신을 앞지르려면 추월 포인트가 아닌 곳에서 허를 찔러야 한다. 하지만 추격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추월 포인트가 아닌 곳에선 코스 자체가 너무 비좁았고, 그곳에선 서준하도 뒤차와 같은 출력을 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마치 세나의 환생을 보는 듯하군요!!! 서준하의 온보드 영상 보시죠! 핸들링과 페달링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섬세합니다!!!”
아일톤 세나가 모나코에서 마스터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건, 그가 트랙션을 거의 완벽하게 컨트롤 할 수 있는 드라이버였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페텔의 어택을 막아내는 서준하!!! 77바퀴째 단 한 차례도 머신 컨트롤에서 오차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서준하의 핸들링과 페달링은 굉장히 정교했다. 출력이 뒤져도 계속 달아날 수 있는 건, 직선 구간이 아닌 14곳의 코스에 등장한 신기에 가까운 드라이빙 덕분이었다.
“자! 이제 파이널 랩! 마쎄네를 그냥 지나치는 페텔! 이제 더는 기회가 없을 텐데요?!”
직전 랩 홈스트레치와 마쎄네까지의 직선 코너에서 추월을 시도했던 모습과 달리 그저 서준하의 뒤를 따라 달리는 페텔.
“차량 문제인가요? 왜 추월을 더 시도하지 않는 거죠?!”
중계진은 물론, 파이널 랩 역전극을 기대했던 팬들 모두 의문에 휩싸이던 그때,
“아! 터널! 페텔이 서준하의 슬립 스트림에 들어갑니다!!!”
터널 끝에 다다를 때쯤 자신의 안쪽으로 파고드는 추격자를 서준하가 포착했다. 그런데,
삐이이이이이이이이.
터널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서준하의 시야가 거짓말처럼 하얗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
뿌옇게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야. 77바퀴 동안 비슷한 현상을 겪었지만, 파이널 랩의 그것만은 굉장히 강렬했다.
삐이이이이이이이이.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서준하가 붙잡은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훼에에에에에엥.
시야는 어두웠지만, 경주차의 기척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조금씩 가까이 느껴지는 또 다른 페라리카의 엔진음. 머릿속으로 페텔의 진입 라인과 트랙의 모양을 떠올리며 감각적으로 손발을 움직였다.
‘안쪽!!!’
기척이 좌측에서 더욱 커져오는 순간, 서준하는 인라인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삐이이이이이이이이.
시야는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해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서준하는 터널을 빠져나올 때와 동일한 방식으로 주행을 계속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터널을 빠져나와 다음 코스를 향해 달려가던 그때,
‘어, 없어...!!!’
놀란 서준하가 소리를 내질렀다. 무엇보다 전방에 페텔의 차량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미칠 듯한 불안감을 녹아내렸다.
“서준하! 페텔! 누가 먼저 피니시 라인을 밟게 될지...!!!”
마지막 코너를 빠져나와 피니시 라인으로 들어가자 휘날리는 체커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 서준하가...!!!”
“마지막 리드에 성공! 서준하가 극적인 우승을 차지합니다!!!”
팀 라디오로 결과를 전해 들은 서준하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
[동양인 최초로 모나코 그랑프리 우승했던 서준하. 7차전 캐나다 GP에서도 폴투윈 성공. 5연속 GP 우승으로 시즌 초반 WDC(월드 드라이버 챔피언) 독보적 1위 - 2017년 6월 11일 XX일보]
......
[서준하의 아찔했던 8차전. 바쿠 시티 GP에서 보타스와 크러쉬로 시즌 첫 리타이어... 1, 2위로 페텔과 해밀턴이 포디엄에 오르며 WDC 순위 맹추격 - 2017년 6월 25일 XX일보]
......
[한국 최초의 F1 월드 챔피언을 꿈꾸는 서준하. 9차전 오스트리아 GP에서 4위 달성. 우승자는 페텔. 페라리 팀 WCC(월드 컨스트럭터 챔피언) 압도적인 선두 - 2017년 7월 9일 XX일보]
......
[모두의 관심이 쏠렸던 10차전 헝가리 그랑프리. 서준하, 파이널 랩 해밀턴과 접전 끝에 아쉽게도 우승 기회 놓쳐. WDC 총 171 포인트 따낸 해밀턴이 종합 2위로 올라서며 1위 서준하와 3점 차이 - 2017년 7월 16일 XX일보]
......
10라운드 시상식을 끝난 헝가로링 서킷의 홈스트레치. 헝가리 GP의 전통 트로피를 손에 쥔 한 선수가 포디엄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터벅터벅.
먼발치에서 그를 지켜보던 채널 4의 젊은 프레젠터 조니. 선수의 달라진 듯한 심경 변화를 감지하고는 재빨리 그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안녕하세요, 서준하 선수! 지난번 바쿠 씨티 리타이어의 충격 때문에 서준하 선수를 걱정하는 팬들이 많았었잖아요?”
지난 8라운드 생애 첫 크러쉬로 인한 충돌로 연승이 깨지고, 다음 경기에서도 포디엄에 오르지 못하며 서준하의 상승세가 끝났다고 우려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 드디어 포디엄 달성! 축하드립니다, 다행히 오랜만에 2위에 오르면서 표정이 한층 밝아지신 것 같군요? 하하.”
의도가 섞인 듯한 자극적인 질문을 던지는 조니. 그런 기자의 얼굴을 서준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어, 저기. 그게...”
성실한 인터뷰 태도로 유명한 서준하가 아무런 말이 없자, 잠시 조니가 어쩔 줄 몰라 했다.
“하하...”
잠시 후, 서준하의 입가로 평소와 같은 미소가 번지기 시작하는데,
“17시즌의 치열했던 재미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앞으로 WDC는 지루해질 겁니다.”
그의 한 마디에 어색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오, 지루해진다라...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되묻는 말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서준하. 그저 카메라를 바라보며 여유로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