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게스트를 소개하기 전부터 화가 좀 많이 난 상태입니다 >
-브레이크 밸런스를 뒤로 놓고...아, 아니다
라인의 자유도가 크지 않아 브레이킹만 실수하지 않으면 이기는 상황. 추월당하지 않는 작전으로 오더를 내리려던 롭이 잠시 말을 멈추자, 팀 라디오로 묵직한 정적이 흘렀다.
-...
더 이상 코멘트 할 게 없다는 판단이 섰다. 트래픽과 추격자의 상황을 제외하면, 지금 서준하의 드라이빙은 너무나 완벽했으니까.
지금 롭은 서준하가 만들어내는 주행 라인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무엇보다 서준하의 오랜 습관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엊그제 연습 주행과 비교해서... 아니, 시즌 초반보다 훨씬 부드러워졌어. 한 단계 급이 높아졌달까...?’
서킷의 특성이나 경쟁자의 압박과 같은 외부 요소는 경주차를 불안정하게 만들지만, 드라이빙을 하는 레이서의 조작처럼 내부 요소의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한다. 제아무리 F1 최정상 드라이버라도, 코너를 앞두고 소위, 풀악셀과 풀브레이킹을 습관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애초에 경주차가 흔들릴 만한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고 있어...’
서준하는 스티어링휠의 조작도, 악셀과 브레이크 페달 모두를 부드럽게 조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47랩 피니시! 1분 31초?! 헛... 1분 31초 414!! 페스티스트다!
작년도 페스티스트 랩타임보다 1초 이상 뒤진 기록이었지만, 오늘 레이스 상황은 달랐다. 지금 서준하의 타이어는 미디움이었고, 작년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오히려 드라이 컨디션에서나 나올 수 있는 믿기 힘든 기록이 분명했다.
페라리 팀 피트 월의 우측, 롭의 눈으로 절망한 메르세데스 엔지니어들이 표정이 보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랩을 리드하는 것은 물론, 실버스톤의 4연승 드라이버보다 7초 이상 빨랐으니까.
‘계속 이렇게만 타준다면...’
시즌 후반에도 경쟁자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번 시즌 챔피언 아니, 앞으로 서준하는 레이스에서 절대 질 것 같지 않았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파이널 랩을 향해 전진 중인 서준하가 둥글고 긴 코너 10턴에 들어섰다.
‘여기도 이젠 아무런 느낌 없네.’
전생의 2020시즌 자신을 죽음으로 내밀었던 실버스톤의 10턴, 클럽 코너. 포뮬러 입문 시절 이곳을 지나는 동안 몇 번 아찔한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오늘 레이스 크루징을 하는 듯한 서준하! 이제 파이널 랩에 다가섭니다!!!”
선두 차량의 독주가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실버스톤을 찾은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하기 시작했다.
파이널 랩에 페라리 피트와 티포시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지만, 지금 서준하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악셀을 밟으면 밟을수록 그 욕망은 더욱 커지는 거야. 그러니까...’
전생의 고카트를 타던 시절부터 주체할 수 없던 스피드에 대한 욕망. 그 욕망을 푸는 방법이라곤 경주차에 올라 마구 내지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서준하는 생각이 달라졌다.
‘모든 것을 자연스럽고 고요하게...’
빠르게 달리는 것 대신에 서준하는 경주차 위에서 무위를 즐겼다.
일체의 부자연스러운 행위가 없는 그 상태. 미칠 듯한 욕망은 그 안에서 온전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띠링.
서준하가 여유롭게 파이널 랩의 마지막 코너를 빠져 나왔다. 그렇게 체커기 앞으로 점점 속도를 줄이며 피니시 라인으로 다가섰다.
“영국 그랑프리 정상의 새로운 주인공이 체커드 플래그를 맞이합니다!”
11라운드 폴투윈으로 WDC 종합 포인트 단독 1위에 오른 서준하. 최근 세 라운드 결과로 시즌 초반 상승세가 꺾였다는 언론의 평가를 단숨에 잠재워버렸다.
“7.21초 뒤에 해밀턴이 들어옵니다. 오늘 레이스 서준하가 완전한 승리를 거뒀군요...!”
시즌 후반기 직전, 압도적인 실력 차이가 드러난 오늘 레이스. 서준하에 대한 평가는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
F1의 여름 휴가가 시작됐다. F1 팀들의 여름 휴가에 대한 규제는 강력한데, 4주간의 의무 휴가 기간 동안 각 팀의 본부는 모두 문을 닫는다.
“사실, 오늘 게스트를 소개하기 전부터 화가 좀 많이 난 상태입니다.”
영국 BBC에서 방송하는 자동차 프로그램 탑기어의 메인 MC 제레미 클락슨이 인상을 쓰며 녹화를 시작했다.
“촬영 장면이 나간 프로그램이 BBC F1이었나요? 덕분에 지금 여기 계신 여러분은 오늘 누가 나올지 다 알고 계시겠죠?”
탑기어의 가장 인기 있는 코너, 합리적인 가격의 차(Reasonably Priced Car). 유명인사들 지정한 차량에 태워 탑기어 트랙을 한 바퀴 주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는 코너다.
오늘 게스트의 정체가 다른 프로그램을 통해 미리 알려진 상황. 출연 게스트의 이름만으로 모터스포츠계에선 엄청난 화제였는데,
“바로 소개하도록 하죠! 포뮬러 원의 떠오르는 초신성...!”
“와아아아아!!!”
“허허, 이런 헐리우드적인 소개 멘트는 좀 별로인데, 근데 멘트를 안 할 수가 없는 게스트가 오셨군요...!”
탑기어는 1977년부터 영국 BBC에서 방영되는 초장수 프로그램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는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이다.
“다시 한번 박수 주시죠,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서준하 선수입니다!!!”
톰 크루즈, 카메론 디아즈, 베네딕트 컴버배치 등 유명 배우들은 물론, 다양한 레이싱 카테고리의 초대형 스타 드라이버들이 출연해왔던 이곳에 신인 드라이버 서준하가 등장했다.
“이거 뭐, 현재 모터스포츠계에서 최초라는 타이틀을 휩쓸고 있는 분이 나오셨군요.”
“음, 제가 한국인으로선 탑기어 출연도 최초인가요?”
“오, 네 맞아요. 국적을 떠나서 지금 당신만큼 젊은 게스트는 나온 적이 없었죠. 하하.”
영국 그랑프리 우승 이후 유럽에서 서준하의 인기는 역대 최고. F1 사상 최고의 루키라는 타이틀이 붙으며 탑기어와 같은 해외 인기 프로그램의 섭외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근데 사실, 아직 탑기어에 나오실 때가 아닌 것 같아 보였는데요... 뭐, 아직 챔피언은 아니잖아요? 그쵸?”
“그럼 녹화 그만할까요?”
“오우, 저도 농담 그만하겠습니다, 하하하하.”
탑기어에 출연한 모두가 챔피언 타이틀을 달성한 드라이버 이력이 있는 선수들. 아직 한 시즌도 마치지 않은 신인 게스트의 등장에 제레미가 농담을 던졌다.
“...준하! 팀 메이트를 한 명 고를 수 있다면, 누구를 고르겠어요? 아마도 쓸모없는 선수면 좋겠죠?”
본격적인 코너가 시작 전, 간단한 인터뷰. 출연 소감과 근황을 묻던 제레미가 장난스러운 눈으로 페라리 팀에 관해 질문했다.
“음, 한 자리 원하세요?”
“하하하, 이 친구. 아니, 준하 그런 식으로 피해 가려 하지 마요. 여기 탑기어라고.”
곤란한 질문에 재치 있게 답하는 서준하 때문에 스튜디오의 분위기는 식을 줄 몰랐다. 제레미가 답변을 기다리자, 서준하가 다시 천천히 입을 뗐다.
“누구든 괜찮습니다. 전 크게 상관하지 않아요.”
“은근히 자신감을 드러내시는군요. 그런 모호한 답변에 그냥 넘어갈 순 없지만, 시간상 마무리하도록 하고요,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답변과 제스처에선 인기를 얻어 기고만장한 느낌보다는 그의 진심과 순수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우우우우우우우웅.
끼이이이익.
곧이어 스튜디오 스크린으로 탑기어 공식 기록 측정 주행 영상이 등장했다.
“아니, 저 200km/h 넘게 달리면서 이거 너무 조용한 거 아니에요? 이거 우리 방송 작가들 당황했겠구만...”
“말이 좀 없었나요?”
“좀? 아니, 없어도 너무 없잖아요... 누군 노래도 부르고 환호하고 그러던데. 그래, 맞아, 리카도는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테스트 차량은 스즈키의 양산차 리아나. 놀라운 건 서준하의 표정이었다.
최대 속도로 코너를 선회할 때마다 차량의 사이드가 공중으로 뜨는 스릴 넘치는 상황이 연출됐지만, 서준하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절 변화 없이 고요했다.
“드라이버가 다이나믹하지 않아서 좋은 기록이 나왔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런 건 문제 없을 겁니다.”
“오호, 자신감! 지금까지 출연했던 F1 드라이버들 가운데 몇 위 예상해요?”
오늘 출연은 해당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나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탑기어 공식 랩타임은 참가자 모두 동일한 차량으로 주행했기에, 이 기록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드라이버라는 엄청난 상징을 갖는다.
“마지막에 바람이 조금 불었는데, 그게 좀... 하하.”
“바람? 이 친구 능청스럽기까지 하네. 자, 이제 보도록 하죠...!”
서준하의 재치있는 대답을 끝으로, 랩타임과 순위가 적힌 스티커에 제레미가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1분 41초 9! 이야! XX! 41초?!”
순위표에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는 서준하의 이름. 지난 몇 년간 1위 자릴 지켜왔던 해밀턴의 기록보다 정확히 1초나 빠른 랩타임이 등장하자, 스튜디오가 뒤집어졌다.
“우와하하하!!!”
“진짜...?!”
게다가 해밀턴의 랩타임은 신인 시절 이후 또 한 번의 도전으로 만들어낸 기록이었다. 줄곧 농담을 던지며 밝게 웃던 제레미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준하, 당신 뭡니까, 도대체?! 하하하.”
팬들과 함께 환호하던 서준하가 자신을 향해 묻는 제레미의 얼굴을 바라봤다.
‘뭐긴, 이것도 한 번 해봤더니 쉽더라...’
등장하는 족족 모든 기록들을 갈아치우는 서준하. F1 서킷 밖에서도 새 시대 챔피언의 탄생에 대한 기대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
[여름 휴가 끝내고 다시 서킷으로 돌아온 서준하. 12라운드 벨기에 GP에서 폴투피니시 성공!]
-2위와 9초 차이로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하며 시즌 후반기 순조로운 출발. 올 시즌 우승만 7번째로 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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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RG 그룹 2019 F1 타이틀 스폰서 계약 체결 임박... F1 무대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한국 기업들 많아져...
2017.08.27 XX일보 이예림 기자
......
[페라리 홈 그라운드에서 서준하는 웃었고, 페텔은 울었다. 13라운드 이탈리아 GP에서 랩 레코드 갈아치우며 또다시 우승!]
-서준하 유럽 무대 정복! 카탈루냐, 실버스톤, 스타 프랑코샹 등 유럽에서 확실히 강한 모습...
-포디엄에 오르지 못한 페텔. 페라리 팀 사실상 페텔에게 거는 기대 낮아져...
-(사진) 서준하의 몬차 레이스 감명 받은 페라리 슈퍼카 수석 디자이너 콜비(60) 포디엄 앞에서 서준하와 대화 중...
2017.09.03 XX일보 이예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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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즌 서준하는 챔피언 더욱 가능성 높아졌다. 14라운드 싱가폴 나이트 레이스 극적인 승리로 4연승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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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누스 시즌 후반 3연속 포디엄 달성. WDC 3위 페텔 자리 위협...
-(사진) 해밀턴의 리타이어로 메르세데스의 홈 그라운드, 마리나 베이 서킷 침울에 빠지다. 밝은 얼굴의 한국 팬들과는 상반된 모습...
2017.09.17. XX일보 이예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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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 이후 새롭게 시작된 17시즌 후반기. 서준하는 포디엄 정상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 오늘 게스트를 소개하기 전부터 화가 좀 많이 난 상태입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