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스즈카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드라이버는 너야 >
연습주행과 예선 1, 2를 마치고 이제 본선 레이스 최종 그리드를 가리는 Q3이 시작됐다.
[16R. Qualifying 3]
[PIT LANE OPEN]
F1 서킷 가운데 유일한 8자 형태인 스즈카 서킷. F1 드라이버들과 팬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이자, 스파 프랑코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상당한 고속 서킷이다.
“첫 코너 퍼스트 턴으로 Q3 진출자들이 아웃 랩을 나섭니다. 아웃 랩 동안 워밍업은 물론, 코스 돌파를 어떻게 할지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머신의 밸런스가 중요하지만, 특히나 드라이버의 역량에 따라 상당한 랩타임 차이가 나는 서킷. 때문에 선수들의 워밍업 랩에서 시즌 후반기 가장 신중하게 접근하는 모습이 드러났다.
부와아아아아앙.
Q3 중반 서준하도 피트를 나서기 시작했다.
-트랙의 온도는 27도 정도. 아까 Q2보다 조금 더 기온이 내려갔어.
피트 레인에 들어선 서준하에게 트랙의 환경에 대해 브리핑하는 롭.
-흠, 드라이컨디션 치고 다소 서늘한데?
“Copy.”
오랫동안 구름이 끼어있던 탓에 트랙 온도는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덕분에 드라이버들에겐 조금 더 난이도가 높은 컨디션이 되고 말았지만, 서준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피트레인을 빠져나오자, 서준하의 옆으로 리카도의 경주차가 빠르게 지나갔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앙.
훼에에에에에엥.
플라잉 랩을 시작한 듯, 리카도는 스트레이트를 달려온 속도를 유지하며 우측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빨라. G포스가 엄청났겠어
300km/h 전후로 코스를 공략했기에 드라이버가 받았을 G포스는 5G이상은 넘어 보였고, 롭이 리카도의 대담함에 칭찬 섞인 말을 내뱉었다.
“맞아, 하지만 풀 쓰로틀은 아니었지.”
서준하는 느꼈다. 겁을 먹은 드라이버가 코스 중간 지점에서 악셀 페달을 잠시 떼었다 놓는 소리를.
-여길 풀 쓰로틀로 지나갈 순 없을걸?
“음... 아닐 텐데?”
스즈카의 퍼스트 턴이 추월 포인트로 꼽히는 이유. 선회를 완료하기 전까지 어느 드라이버도 쉽사리 코스 공략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는 난코스이기 때문이다.
훼에에에에에에엥.
F1 최고의 구간이라고도 불리는 ‘S’커브에 진입하자, 이번에도 다른 선수들의 코스 공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여길 저런 단순한 리듬으로 타는 건 코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그들의 돌파 속도에서 지금 선수들의 기분은 그다지 짜릿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지만, 주변 팬들은 그런 돌파에도 열띤 환호를 쏟아내고 있었다.
“자, 이번에는 서준하군요. 아웃 랩을 마친 서준하! 마지막 코너 18턴을 빠져나오면서 플라잉 랩을 시작합니다!”
Q3 중반 트래픽은 안정적이었고, 서준하의 어택 타이밍은 성공적으로 보였다.
‘스즈카의 퍼스트 턴...’
그렇게 들어선 서준하의 플라잉 랩 첫 코너.
‘여긴 풀 쓰로틀이야...!’
이제 오르막과 내리막을 포함해 개성이 분명한 다양한 형태의 코너들로 페라리 카의 독주가 시작됐다.
“아, 남다릅니다. 첫 코너 통과 속도가 남달라요!!!”
“와하하!! 오늘 예선에서도 서준하의 미친 숏런이 등장했습니다! 스즈카 서킷으로 서준하의 이름이 울려 퍼지는군요!”
이번 시즌 초특급 신인 드라이버는 앞선 어태커가 놓쳤던 부분을 확실하게 보완하며 남다른 스피드를 뽑아냈다.
-헛...! 이제 섹터1 돌파가 가장 중요해! S커브에서 레이트 에이팩스를 그리면서 깔끔하게 빠져나가!
왼쪽-오른쪽이 두 번씩 반복되는 스즈카의 S커브. 남다른 질주에 기대감에 부푼 롭도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것보단...”
-...?!
“기다려, 보여줄게.”
기존의 레코드을 깨려면 틀에서 벗어난 주행을 해야 한다. 특히나 스즈카의 플라잉 랩은 그래야 한다.
S구간으로 진입한 서준하가 과감하게 숏컷으로 첫 왼쪽 커브를 자르고 들어섰다.
‘처음부터 이렇게 자르면... 다음 구간까지 더 가속이 가능하고...’
레이트 에이팩스를 그리며 안정적인 돌파로는 느린 랩타임을 만들 뿐이다. 이제 서준하가 S구간의 마지막 코너로 진입하는데,
‘다시 오른쪽으로 바로 들어가면 미끄러질 가능성이 크니까... 살짝 브레이크를 걸어 앞을 누른 다음... 이제 마지막 오른쪽은...’
-안 돼! 줄여! 너무 많이 가속했어!!
코스 아웃의 위험을 껴안고 타이트한 주행을 이어가자, 당황한 롭이 소리쳤다. 하지만,
“마지막에도 악셀을 밟아줘야 하는 거야, 이렇게!!!”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또 한 번의 숏컷 돌파에 짜릿함을 느끼며 S구간을 벗어나는 서준하. 런오프 바깥으로 미끄러질 듯했지만 아슬아슬 돌파에 성공했다.
“스즈카의 런오프 바깥은 전부 그래블이에요! 코스 아웃하면 차와 드라이버 모두에게 엄청난 타격이 가해진단 말이죠! 하지만 이 선수 지금 그런 건 안중에 없는 듯합니다!!!”
F1 초고속 서킷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흥분이 쏟아져 나오는 순간. 덕분에 보는 이의 쾌감과 최종 기록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
“아시아의 마지막 그랑프리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기가 엄청나구만.”
Q3 플라잉 랩을 달리던 서준하가 피니시하자, 엄청난 함성이 스즈카 서킷으로 쏟아져 나왔다. 본선이 아닌 예선 경기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에 FOM의 체이스 회장의 콧수염이 씰룩거렸다.
“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관중의 절반이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라고 합니다. 한국 팬들이 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군요, 하하.”
시즌이 진행될수록 서킷을 찾는 한국 사람들이 늘어났고, 가까운 일본 GP에선 그 숫자가 최대치를 기록했다.
게다가 서준하의 활약이 절정에 달하면서 코리아 그랑프리 재개최에 대한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지금 이런 반응이라면, 코리아 그랑프리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회장님?”
“흐음, 그렇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션?”
2010~2013년간 개최됐던 코리아 GP가 중단된 건, FOM과의 지속적인 개최권료 분쟁과 빈약한 부대시설 등으로 인한 저조한 흥행과 낮은 수익이 가장 큰 원인.
“한국에서 월드 챔피언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다시 안 하는 게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자네 태도가 많이 달라졌구만, 아주 저 친구한테 흠뻑 빠졌어.”
시즌 초반 서준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션 사장. 지금 그의 태도는 180도 달라진 듯했다. 서준하의 활약만으로도 코리아 GP 재개최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봐, 션 사장. 그 문젠 좀 더 현실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이 친구야.”
“물론 그것만 보고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회장님.”
회장의 반응에 미소 짓던 션이 본부로부터 자신이 들었던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한국의 조직위(F1 조직위원회)로부터 재개최를 추진해보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관심만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걸 잘 알지 않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다릅니다.”
“흐음, 달라? 뭐가?”
“한국의 기업들이 주변 인프라에 투자할 생각이 있는 듯합니다. 잠시... 라일라. 아까 말한 자료 좀 가져오게.”
19시즌 한국 RG 그룹의 타이틀 스폰서 계약과 20시즌 고려타이어의 F1진출. 이밖에도 한국의 굵직한 여러 기업들이 F1에 실질적인 투자를 진행하고 있었다.
션 사장이 한국 조직위로부터 전달받은 문건의 요약본을 회장에게 건넸다.
“이미 한국에선 모터스포츠 붐이 일어났답니다. 영암 서킷 자체도 훌륭한 평가를 받던 곳이고요. 부대시설 확충하고 2~3년 후에는 다시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현재 한국에선 F1경기를 제외한, 세계 여러 레이싱 카테고리의 대회가 열리는 상황이다. 본래 개최 초창기 FOM에서 요청했던 대로 주변 인프라가 갖춰진다면, FOM에서도 막을 이유는 없었다.
“하하하, 투자 계획이 있으면 얘기가 달라지지.”
“월드 챔피언이 탄생하면 지금보다 반응은 더 뜨거워지지 않겠습니까?”
“이거, 이거 선수 한 명에 나라 전체가 움직이는 듯하구만.”
한국의 SNS에서 심심치 않게 터져 나오던 코리아 GP에 관한 얘기들. 이후 재개최를 희망한다는 서준하의 인터뷰 몇 번이 한국팬들의 목소리를 더욱 키웠고, 대중의 욕망을 포착한 기업들이 실질적인 투자 계획을 내기 시작했다.
“그랑프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본부 복귀하면 이 사안은 빠른 시일 내로 다시 검토하도록 하지.”
“그러시죠, 회장님.”
때마침 마지막 플라잉 랩을 마치고 스타트 라인을 통과한 서준하의 경주차. 터질 듯한 배기음에 두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고,
“엇...!”
“...!!”
전광판에 등장한 서준하의 폴 기록과 서준하의 팬들이 쏟아내는 함성. 또 한 번 스즈카가 들썩거리자, FOM 임원진의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
“와아아아아!!!”
일본 레이스 시작 전, 선수대기실에서 휴식 중인 서준하. 갑작스러운 함성에 놀라 중계 TV로 시선을 옮겼다.
“타쿠마 사토 선수입니다. 다시 한번 큰 박수로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메인 그랜드 스탠드로 등장한 일본 모터레이싱의 영웅적인 존재, 타쿠마 사토. 2000년대 F1 드라이버이자, 아시아 최초의 인디 500 챔피언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세운 드라이버다. 축구로 따지자면 일본에선 마치 박지성과 비슷한 위상을 가진 인물.
“오, 사토 선수가 스즈카에 왔구나. 응? 이제 시간 됐다. 우리 슬슬 나갈까?”
이제 콕핏에 오르기 위해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한 서준하가 대기실을 빠져 나와 한서윤과 피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또 한 번의 엄청난 함성.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에 두 사람이 피트 앞에서 걷던 걸음을 멈춰서 슈퍼 스크린으로 고갤 돌렸다. 그런데,
“세상에!!!”
스크린에 등장한 건 바로 자신이었다. 주변을 흘겨보자 주최 측 카메라맨이 어느덧 자신의 옆을 걷고 있었다.
“서준하! 서준하! 서준하!!!”
“서준하! 서준하! 서준하!!!”
레이스 당일 처음 스크린에 등장한 서준하의 모습에 팬들의 함성은 끊이지 않았고 계속됐다. 전생에도 느껴본 적 없는 팬들의 열정에 서준하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오늘이야말로 기회다, 준하야.”
피트에 들어서 헬멧을 착용하자, 아리바베네가 환영인사를 건넸다. 서준하는 대답 대신 고갤 끄덕이며, 자신을 응원하는 팬과 팀원들을 둘러봤다.
“지금 스즈카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드라이버는 너야.”
확신에 찬 아리바베네의 말투. 정말 농담이 아니었다. 어제 예선에서 서준하는 2그리드보다 0.5초 이상 빨랐으니까.
“참가 선수들은 이제 스타팅 그리드로 위치해주시기 바랍니다!”
레이스 시작을 위해 서준하가 그리드로 이동해 경주차에 올라탔다.
‘기회...’
연습주행부터 예선까지 실력 차이가 분명했던 이번 라운드.
‘오늘 여기서 최연소 타이틀은 싹 다 갈아치운다!!!’
지금껏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레전드 레코드를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 지금 스즈카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드라이버는 너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