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F1 레이서-187화 (187/200)

< 감속하려 할수록 중심은 무너진다 >

정적만이 흐르던 스즈카의 메인 그랜드 스탠드. 스무 대의 포뮬러카가 쏟아내는 배기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2017 일본 그랑프리! 라이트 아웃!!!”

오전부터 이 짜릿한 순간만을 기다려온 갤러리들은 스모그와 함께 사라져가는 경주차들을 향해 열광했다.

“스타트와 동시에 해밀턴이 선두 자릴 노려봅니다!”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승을 차지해야 하는 해밀턴이 스타트와 동시에 서준하의 뒤에 바짝 붙었다.

“홀샷 이후 서준하의 아웃 라인을 노려보는 해밀턴! 바깥쪽! 바깥쪽으로...!”

2턴에 들어가기 전 잠깐의 직선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브레이킹을 해 속도를 줄여야 2턴에서 탈선을 막을 수 있지만, 해밀턴은 브레이킹을 하지 않았다.

“아! 코너 안쪽 공간을 파고드는 막누스! 해밀턴의 움직인 틈을 타...!”

선두 자릴 노리는 건 해밀턴뿐만이 아니었다. 해밀턴이 추월을 시도하기만을 노리던 3위 막누스가 해밀턴이 움직이면서 빈 공간을 기가 막히게 찾아 들어갔다.

“해밀턴도 어쩔 수 없군요! 다시 안쪽으로 들어오며 추격자의 어택에 진로를 막습니다!”

“자, 덕분에 한숨 돌린 서준하! 가장 먼저 S구간을 빠져나가면서 선두 자릴 유지합니다!”

스타트가 비슷했던 추격자들은 큰 격차 없이 홀샷에 들어왔고, 그들의 배틀은 계속 이어졌다.

‘풀브레이킹으로 감속! 우측으로 컷하듯 바짝 붙인다...!’

쉴 새 없이 2위 해밀턴의 자릴 비집고 나오려는 막누스.

‘됐어...! 이렇게 되면...!’

몇 차례 압박에 상대가 주춤하자, 그의 자신감은 치솟았다. 그렇게 스즈카의 악명 높은 8턴 데그너를 실수 없이 빠져나가는데,

“막누스의 추격이 무섭습니다! 아, 데그너(Degner Curve)에서 실수만 없으면 10턴 헤어핀에서 추월을 노려볼 수 있겠는데요?!”

우측 프론트 타이어가 연석에 걸릴 듯한 모습으로 보아, 목표라인을 잡는 데 성공한 듯 보였다.

“그렇죠! 막누스! 레드불의 차량이 헤어핀에서 해밀턴의 옆으로 나옵니다!”

이전 코스의 완벽했던 진입 라인으로 막누스. 탈출 속도에서 우위를 가져갔다. 그리고,

훼에에에에에에에에엥.

결국 해밀턴을 제치며 2위에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시즌 후반부 막누스의 기세가 무섭습니다! 오늘도 벌써 초반부터 선두 자릴 노릴 수 있는 포지션을 차지했는데요. 코스 돌파만 본다면, 해밀턴과의 기량 차이도 이제 크게 나지 않는 것 같군요!”

“지난 13라운드부터 갑작스럽게 세대교체가 진행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후반부 신인들의 돌풍이 F1을 휩쓸고 있습니다!”

지난 세 라운드 연속 2위를 차지하며 서서히 포텐셜을 드러내고 있는 막누스. 후반부 팀 메이트의 부진으로 허우적거리는 레드불을 나락에서 끌어올리고 있었다.

-조급해 하지 마라, 막누스.

“Nope.”

-이제 카시오 트라이앵글(시케인)에서 충분히 감속할 것. 아직 레이스 많이 남았다.

“Copy...!”

시즌 후반 막누스의 선전은 팀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 레드불은 거액을 들여 FIA 기술 담당 책임자였던 부드코프스키의 영입했고, 퍼포먼스 엔지니어 라인업을 전부 갈아치웠다. 사실상 막누스를 중심으로 팀은 리빌딩을 하고 있었다.

“자, 이제 막누스가 선두 자릴 노리기 위해 브레이킹 포인트를 늦춥니다!”

다음 시즌, 다다음 시즌을 바라보며 이번 시즌 후반기를 보내고 있는 레드불 레이싱.

팀의 최고 기대주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또다시 추격을 시작했다.

***

-막누스가 해밀턴을 제치고 올라왔다. 절대 거리를 주지 않도록!

서준하가 롭의 무전을 듣고 뒤를 살폈다.

‘레드불의 꼬맹이.’

추격자는 역시나 해밀턴과 페텔이 아니었다. 지난 레이스보다 훨씬 이른 타이밍에 2위로 치고 나온 막누스가 보였다.

“Copy.”

시즌 후반 막누스의 돌풍이 무섭다는 걸 서준하도 잘 안다. 언론과 관계자들의 예측처럼 막누스는 앞으로 훨씬 더 좋은 성적을 내는 걸 확인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전생이건 현생이건 그의 돌풍은 자신 앞에선 그 영향력이 늘 미미했으니까.

-준하, 타이어 컨디션 확인 바람

“예상보다 그립감이 훨씬 좋아. 벌써 작동온도에 달한 듯.”

-오케이, 그러면 이제 슬슬 페이스를 올릴 것

막누스를 신경 쓰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평균보다 뜨겁게 달아오른 현재 날씨는 상대적으로 높은 트랙 온도일 때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페라리 팀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고, 그밖에도 순수한 서킷 경험에 있어 막누스는 서준하보다 한 수 아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속하려 할수록 중심은 무너진다. 그러니까...!’

환생 후 서준하는 더욱 대담해졌다.

‘멈추지 않는다!!!’

눈앞으로 빠르게 날아드는 긴 오르막 130R 턴을 시속 310km를 웃도는 속도로 돌파하기 시작했다.

-130R 진입 속도가 너무 빨라!! 브레이킹!!!

130R 코너의 스피드 트랩. 09시즌 알게수아리 선수의 사고를 비롯해, 레이아웃 변경에도 여전히 사고 위험이 큰 곳으로, 많은 드라이버들이 속도를 줄이는 구간이다. 하지만,

“우어어어어!!!”

서준하는 결코 쓰로틀 페달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타이어의 작동온도와 완벽한 주행 감각 컨디션 그리고, 추격자 막누스라는 세 조건에 자신감은 치솟았다.

[Speed Trap: 315.51 km/h...!]

결국, 지난해 최고속도보다 7.6km/h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며 스즈카 서킷의 열기를 더욱 후끈하게 만들었다.

“우후!!!”

300km/h 이상의 속도로 내리막을 빠져나오자 엄청난 희열감을 느꼈다. 4G 이상의 G포스에서 벗어났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무엇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뒤차와의 격차는?”

-...4.39초! 지금 페이스 좋아!

10랩 스타트 라인을 통과하며 막누스의 랩타임을 체크했다. 경쟁자들도 페이스를 올리고 있는 상황. 생각만큼 격차는 빠르게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래, 한 번 더...!’

흔히 F1 드라이버들에게 이번에도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느낌을 주는 곳이 스즈카지만, 앞으로 이렇게 서른 바퀴를 또 해볼 수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희열을 느꼈다.

“선두를 달리는 서준하! 다시 한번 퍼스트 턴 진입에서...!”

F1 레이싱카의 터질듯한 배기음과 아슬아슬한 드라이빙 라인.

“풀쓰로틀!!!”

선두 페라리 카의 코스 돌파에 스즈카 팬들은 또다시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

시간은 계속 흘러 어느덧 레이스 중반. 기존 SS타이어의 한계가 드러나면 순위권 경쟁자들이 타이어 교체에 들어갔다.

“22랩 해밀턴과 보타스 모두 피트 스탑에 들어갔습니다!”

페라리 팀 퍼포먼스 엔지니어들의 눈동자가 상황판 이곳저곳으로 더욱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21랩부터 랩타임이 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예상대로 두세 바퀴 안에 한계가 올 것 같습니다. 이제 준하도 슬슬 피트 스탑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준하의 타임 로그를 체크하던 전략팀원 루에다가 안토니아치를 향해 물었다.

“오케이, 지금부터 타겟 플러스 2 그리고 S 타이어로 교체 준비 오더 내리게.”

서준하의 기존 타이어는 이미 평균보다 많은 랩을 소화하고 있었다. 전략 감독의 오더가 롭과 서준하에게 전달됐는데,

“...막누스가 들어가고 곧바로 들어가겠다는데요?”

“막누스? 흐음, 딱히 그럴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뒤차들이 전부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겠답니다. 그래도 그냥 들어오라고 할까요?”

무전 내용에 다시 한번 경쟁자들의 레이스 현황을 체크하는 안토니아치. 순위권에선 선두와 2위를 제외하곤 5위까지 전부 피트 스탑을 완료된 걸 확인했다.

“루에다, 막누스의 랩타임 변화는 어떤가?”

“준하와 비슷합니다. 레드불도 곧 있으면 교체에 들어갈 것 같은데요?”

“...그럼 막누스도 곧 있으면 들어가겠구만. 6위 마싸와는 격차가 꽤 되고... 그래, 그럼 서준하의 교체는 막누스를 보고 하도록.”

막누스와 동일한 타이밍에 교체를 하더라도 크게 이득 보거나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서준하의 랩타임이 떨어지기 전에 타이어를 교체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시기로 보였다.

“혹시 타이어 관리 능력을 보여주려는 걸까요...?”

“이유가 있을 거야. 드라이버의 판단을 믿어보자고.”

서준하는 이번 시즌 대부분 팀의 오더를 착실하게 따랐지만, 간혹 오늘처럼 피트 스탑 타이밍에 있어선 자신의 요구를 드러냈다. 그때마다 숨은 뜻이 있었고, 레이스 상황을 뒤집어놨기에 페라리 팀은 이번에도 서준하를 믿기로 했다.

“22랩 스타트! 예상대로 21랩 보다 0.31초 느려졌습니다!”

“더?”

막누스 뒤로 새 타이어를 장착한 추격자들이 작동온도에 도달하면서 랩타임이 조금 더 빨라진 상황. 전략팀원들의 표정은 더 어두워지고 말았다.

“막누스는?”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준하보다 변화폭이 적습니다. 막누스 말고 뒤차들과는 격차가 더 줄었을 텐데요...”

레이스 초반부터 힘들게 벌려온 격차가 단순히 타이어 차이 덕분에 쉽게 쉽게 좁혀지고 있었는데,

“22랩 1분 356초 381! 막누스와의 격차 4.3초!”

“...”

“계, 계속 줄어듭니다... 안토니아치 어서...!”

예상보다 길어진 막누스의 스틴트. 단 두 바퀴 만에 1초가량 줄어들자, 페라리 피트 월의 긴장감이 치솟았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스즈카의 마지막 시케인, 카시오 트라이앵글을 빠져나온 서준하가 직선 구간에 올라 윙미러를 살폈다.

-제기랄! 이번엔 0.44초나 죽었어! 막누스 저 자식, 네가 들어갈 때까지 피트 스탑 생각이 없는 거 아니야?

이전보다 더욱 심각해진 롭의 목소리. 서준하와 마찬가지로 막누스도 이미 타이어의 한계가 왔지만, 여전히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안 되겠어. 다음을 노리자, 준하야!

다음을 기약하자는 롭의 말에 서준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없다...!”

-...! 예쓰!!!

스무 바퀴 이후 매번 홈스트레치에서 윙미러를 주시했던 서준하. 더 이상 레드불 차량이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이번 랩 피트 스탑 준비할 것!”

뒤차들보다 피트 스탑을 먼저 할 경우, 다시 서킷에 복귀하기까지 순위는 뒤로 밀려나게 된다.

추격자들과 격차가 줄어드는 걸 알면서도 서준하가 그런 순위 변동을 원하지 않았던 이유,

‘이제 나머지 레이스 절반에서만 리드한다면...’

폴포지션과 페스티스트 랩 그리고, 레이스의 모든 랩 리드을 조건으로 하는 F1 레이스 최고의 타이틀,

‘그랜드 슬램(Grand Slam)이다!!!’

모터레이싱의 완벽한 승리, 그랜드 슬램을 향해 서준하가 한 발짝 다가섰다.

< 감속하려 할수록 중심은 무너진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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