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오더가 안 떨어졌어! >
VSC 발령 시 서킷에서 경주차의 위치에 따라 상당한 이득을 볼 수 있다. 서준하가 피트 레인 입구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백스트레이트를 지나올 때쯤 VSC가 시작된 건 행운이었다.
“VSC 등장 타이밍이 기가 막히는군요. 서준하는 곧바로 프리 스탑(free stop)에 가까운 기회를 얻었습니다! 18턴을 통과하며 이제 피트레인으로 들어가는군요!”
너덜너덜 떨어질 듯한 프론트 타이어로 18턴을 빠져나온 서준하. 현재 피트 스탑을 할지 말지 판단 자체가 필요 없기에 곧바로 피트 레인에 들어섰다.
“첫 타이어 교체 타이밍이 얼마 남지 않았었던 시기였기도 하고요. 이제 다들 피트 스탑을 시도하는군요.”
“자, 이렇게 되면 페텔과 보타스 뒤를 달리는 차량들이 타이어 교체 후 반전을 노려볼 수 있게 됐군요.”
피트 레인을 가까이 뒀던 선수들은 곧장 타이어 교체를 시작했지만, 이미 피트 레인 입구를 지나친 페텔과 보타스의 피트 스탑은 다음 바퀴부터 가능했다.
VSC가 오래 지속된다면, 상관없지만, 만약 두 선수가 한 바퀴를 돌아오기도 전에 VSC가 끝난다면, 뒤따르는 경쟁자들보다 훨씬 더 손해를 보게 된다.
“VSC가 계속되면서 스무 바퀴 동안의 격차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자, 과연 VSC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페텔과 보타스. 페라리와 메르세데스의 눈치 싸움이 시작될 듯한데요!”
VSC에서 시간 손해를 보더라도 페텔은 쉽사리 피트 스탑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VSC가 끝나버릴 시점에 피트 스탑 한다면, 보타스가 오버컷으로 선두에 오르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아직 두 선수 모두 첫 타이어의 상태는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피트 스탑 타이밍에 신중해야 했는데,
“테오, 지금 보타스를 불러들일까요...?”
VSC 시작 이후 굉장히 분주해진 메르세데스 피트 월.
조금 있으면 피트 레인 근처로 다가설 보타스에게 아직 피트 스탑 오더를 내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크흠...”
그리고 첫 피트 스탑 주자, 서준하가 피트 박스를 나설 때쯤이었다.
“감독님, 잠깐...”
막누스의 사고 현장 주변을 살피며 처리 상황을 살피던 메르세데스의 전략 책임자 보울즈. 테오 곁으로 달려와서는 무언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 그래?”
전략팀의 생각을 전해 들은 테오 감독.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고.
“오케이. 자, 맥키, 지금 바로 움직여!”
결단을 내린 듯한 표정의 테오가 피트 크루들에게 오더를 내렸고, 미캐닉 전원이 피트 박스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움직임을 눈치챘는지 갑자기 페라리 팀의 미캐닉들도 피트 박스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페텔이 들어옵니다...!”
18턴을 빠져나온 페텔의 경주차가 피트레인으로 들어섰다.
“됐어!!!”
하지만 경쟁팀의 예상과 달리 보타스는 페텔을 따라 피트 레인에 들어오지 않았다.
메르세데스의 피트 크루는 피트 스탑을 준비하는 척하고는 피트로 돌아섰다.
“하하하!!!”
“제대로 물었구만...!”
그야말로 페라리 팀은 메르세데스 피트 크루의 움직임에 낚인 상황. 팀의 생각대로 흘러가자, 보울즈와 전략팀원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직... 아직이야...”
이번 페이크 전략의 완성은 마지막까지 운이 따라줘야만 가능하다.
무언가 기다리는 것이 남은 듯한 테오 감독. 팀의 밝은 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못하던 그때,
“...!!!”
그의 시선이 상황판 아래 레이스 컨트롤 메시지에 고정됐다.
[이번 랩 VSC 종료(Virtual Safety car out in this lap)]
“와, 메르세데스의 매직 콜(Magic Call)이었습니다! 가장 뒤늦게 피트 스탑을 빠져나온 보타스! 계속 선두를 유지합니다!”
페텔이 피트 박스를 떠나기도 전 바로 그 순간, VSC가 종료됐다.
“피트 크루의 페이크 무빙도 인상적이었고요. 무엇보다 메르세데스의 전략팀! 이번 라운드 끝나면 전략팀에게 상당한 보너스가 떨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탁월한 오더였습니다...!”
서킷에 나온 경주차들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고, 그들 가운데서 선두를 달리던 보타스도 타이어를 불태워버릴 듯 쾌속 질주를 시작했다
“아직 피트에 있는 페텔! 이렇게 되면 경쟁자들보다 시간 손해가 엄청난데요! 빨리 복귀해야겠어요...!”
페텔보다 한 바퀴 늦게 피트 스탑에 들어갔던 보타스. 복귀 이후에도 그보다 앞선 위치를 달리며 오버컷 전략이 성공을 거뒀다.
***
COTA 중앙에 위치한 76미터 높이의 전망 타워(The COTA Tower) 내부 관람실.
70명의 VVIP 게스트들만이 레이스를 관람할 수 있는 이곳에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디자이너 마우리찌오 콜비가 자리했다.
‘Human willpower... How amazing...!’
시작부터 서준하만을 지켜봐온 콜비. 페라리카가 피트 박스에 멈추고 나서야 서킷에서 시선을 뗄 수 있었다. 노트와 펜을 꺼내 재빠르게 스케치를 시작하는데,
스스스슥.
스스스스슥.
조금 전 자신의 두 눈과 귀에 담아뒀던 선명한 이미지들이 슈퍼카 디자이너의 노트 위로 쏟아져 나왔다.
“허허, 뭔가 좀 떠오른 게야?”
무언가에 심취해 있는 콜비의 모습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피에로 부회장. 페라리 50주년 기념작 F50을 비롯해 F355, 550 마라넬로, 456, 캘리포니아와 같은 역작들을 디자인한 콜비를 직접 데리고 온 건 바로 그였다.
“제게 이 장면, 이 소리... 특히나 이 전율을 말로 설명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아리송한 말에 부회장이 고갤 갸우뚱하자, 콜비가 다짜고짜 노트를 내밀었다.
“선과 점들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개략적으로 스케칭된 스포츠카 한 대의 정측면 모습. 기존의 페라리 슈퍼카 라인보다 훨씬 많은 곡선미를 가미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오호, 기존의 모델 라인들과는 좀 다른 느낌이구만.”
“오늘 레이스로부터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이...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달라?”
콜비가 오늘 처음 F1 서킷을 찾은 건 아니지만, 오늘 레이스에서 분명 다른 느낌을 받았고, 이를 해석한 결과물 역시 달라졌다.
“네, 그렇습니다. 모티브가 다르기 때문이죠...”
서준하가 F1에 오르기까지 그 과정을 기록한 스토리부터 오늘 레이스 그의 주행까지. 평소와는 다른 자극을 받은 콜비가 새로운 디자인을 뽑아냈다.
“모티브가 다르다... 그렇지. 확실히 다른 느낌을 주는 친구니까.”
“...남은 레이스 동안 세세한 디자인과 후측면 디자인을 떠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이거 같이 오길 참 잘했구만.”
영감이 없으면 열정을 쏟지 않는 콜비. 그의 성향을 잘 아는 피에로는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피에로, 혹시 콘셉트 카(Concept Car)를 기획 중이신 겁니까?”
콘셉트 카는 일종의 개념과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기술을 보여주기 위한 자동차의 프로토타입이다. 스케칭을 하던 콜비가 이번 프로젝트의 목적에 관해 묻는데,
“아니네, 판매 가능한 모델을 만들어 볼 생각이야. 일종의 스페셜 에디션이랄까?”
“스페셜 에디션이라면...?”
“슈마허의 페라리 458 모델처럼 말이야.”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호날두, 메이웨더 등 인기 스타들이 오너로 있는 슈퍼카, 페라리 458. 이 차의 가장 큰 특징은 슈마허가 개발에 참여해 F1 기술력을 녹여냈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다면...”
“이번 모델은 저 친구가 개발에 참여할 거네.”
“아...!”
현재 서준하의 엄청난 인기와 더불어 정점에 달한 그의 존재감을 확인한 피에로 부회장.
F1의 새로운 기대주, 서준하를 활용한 본격적인 슈퍼카 개발에 들어갔다.
***
“자, 이제 참가자 전원 새 타이어로 교체 완료했고요. 처음보다 선수 간 격차가 거의 사라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COTA 레이스입니다!”
참가자들이 또다시 치고받기 시작하며 서킷 곳곳에서 배틀이 벌어졌다.
“크흠...”
그 가운데 페라리 팀은 선두 자릴 빼앗기며 좋았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말았는데,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지...?”
“그러니까... 지금 뭘 기다리시는 거야?”
피트에선 스태프들 모두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2, 3위를 나란히 달리는 페라리카를 바라보던 레이스 엔지니어들은 감독을 몇 번씩 흘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다미.”
잠시 후, 아리바베네가 피트 월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페텔에게...”
페텔의 레이스 엔지니어를 부르며 직접 오더를 내리려는 아리바베네.
감독은 지금 페텔에게 서준하를 위해 2위 자릴 비켜주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감독님, 잠시...”
그런 감독의 모습을 포착한 안토니아치가 황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조금 더 때를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아직 종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페텔에게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직 레이스 종료까지 절반이 남은 시점. 페텔이 보타스의 힘을 충분히 빼준다면, 오늘 팀의 목표인 서준하의 우승이 조금 더 수월해 보였다.
“음...”
“후반까지 압박을 해준다거나, 선두 자릴 되찾게 된다면, 준하의 부담이 훨씬 줄어들 겁니다.”
“그렇지... 하지만 만약 페텔이 보타스를 놓치게 되면 어쩔 텐가? 그 격차를 준하가 다시 따라잡는 건 더 힘들어 보이는데...?”
충분히 좋은 전략이었지만, 감독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 시즌 페텔은 레이스 중후반 페이스가 좋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매 섹터 둘의 격차를 체크해야죠. 벌어지는 순간, 곧바로 페텔에게 물러나라는 오더를 내리... 엇?!”
“...?!”
감독과의 대화에 집중하던 안토니아치가 무언가 발견했다.
“서준하!!!”
재빠르게 상황판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린 코치진 모두가 페라리카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리스타트 이후 팀 메이트의 뒤를 달리던 서준하가 페텔의 뒤에 바짝 붙기 시작했다.
-잠깐! 아직 오더가 안 떨어졌어!
레이스 시작 전부터 페텔의 서포트 전략을 알고 있었던 롭. 추월할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경주차를 포착하고는 급히 무전을 보내는데,
“쉿...”
SC나 VSC가 끝나고 DRS 사용은 세 바퀴가 지난 후 가능하다.
하지만 정확히 세 바퀴가 지난 지금, 서준하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훼에에에에에에에엥.
백스트레이트에 올라타자 COTA의 가장 좋은 추월 포인트 12턴이 눈앞에 보였다. 그리고,
“기다릴 생각 없어.”
DRS를 열고 페텔의 리어윙으로 달려드는 서준하의 페라리카.
[Speed Trap: 322.9km/h...]
오늘 레이스 최고 속도를 찍으며 페텔의 우측 공간을 파고들었다.
< 아직 오더가 안 떨어졌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