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수들이 거부했던 건 아닌 것 같군요 >
페텔의 슬립 스트림을 타고 12턴 헤어핀 진입로의 바깥쪽 공간으로 튀어나온 서준하.
“서준하의 아웃 라인 오버테이크...!”
진입과 동시에 에이팩스 쪽으로 경주차를 바짝 붙이며 선회를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익.
진로가 막힌 페텔은 감속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재가속 타이밍이 늦어지며 팀 메이트보다 느린 탈출 속도를 갖게 됐는데,
“서준하가 다음 코스를 두고, 속도와 주행 라인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합니다!”
서준하는 페텔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팀 메이트의 서포트 따윈 필요 없다는 생각이 아니라, 챔피언 자릴 남에게 맡길 수 없었으니까.
“이젠 페텔도 쉽게 제쳐요. 단 한 차례 시도만으로 오버테이크 성공!”
“COTA에 서준하의 이름이 울려 퍼지며 박수가 쏟아져 나오는군요!”
서준하가 슬립에 들어가며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페라리 팀과 티포시들.
지속적인 접전 없이 깔끔하게 상황을 마무리한 서준하의 오버테이크에 박수를 보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원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레이스다. 페텔이 보타스를 놓치면, 경기 후반 서준하의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무기력해 보이는 페텔. 추월에 성공한 이후 서준하는 윙미러로 그의 경주차를 바라봤다.
크게 벌어지지 않은 격차 덕분에 페텔이 다음 DRS존에서 재추월을 노려볼 수 있었지만, 그는 곧바로 압박을 시작하지 않았다. 서준하의 판단이 맞아떨어진 상황.
추월 시도를 하지 말라는 팀의 오더 때문이 아니었다. 시즌 후반 페텔의 정신력은 급격히 쇠퇴했다.
이미 목표 달성이 불가능한 드라이버에게 이전과 같은 날카로운 주행을 기대하긴 힘들어 보였다.
“뒤쪽에서 접전이 치열했던 사이 나 홀로 보타스는 쾌속 주행을 이어가고 있군요....!”
오늘 레이스 타이어 전략으로 수월하게 선두 자리를 차지한 보타스. 실수만 없다면 우승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하지만,
“자, 이제 서준하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의 앞으로 메르세데스 팀의 보타스의 경주차가 보입니다!”
“30랩, 결국엔 서준하가 다시 또 기회를 만들어내는군요. 초반 경기 중단 때문에 가라앉았던 COTA의 분위기. 챔피언 달성을 앞둔 서준하 덕분에 다시 또 달아오르기 시작합니다!”
이제 서준하라는 매서운 추격자가 따라붙으며, COTA에는 또 다른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
“감독님, 마지막 피트 스탑을 어떻게 할까요?”
레이스는 계속 흘러 마흔한 바퀴째. 피트 월 레이스 엔지니어들이 테오 감독에게 타이어 교체 타미밍을 물었다.
“...현재 격차는?”
첫 피트 스탑 이후 별다른 압박 없이 무난하게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보타스. 하지만 메르세데스 피트 월은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테오 감독이 서준하의 페라리카를 주시하며 물었다.
“40랩, 4.1초 차이였습니다. 미세하지만 조금씩 줄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에 테오는 곧바로 보타스의 개인 타임 로그를 체크했다.
“크흠...”
보타스는 충분히 좋은 랩타임을 유지하고 있었고, 아직 타이어 교체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일찍이 타이어 교체를 하는 게 낫지 않겠나, 테오?”
감독이 선뜻 판단을 내리지 못하자, 전략팀과 회의에 나섰던 라우다가 다가왔다.
“첫 스틴트가 우리 예상보다 빨랐어. 내 생각엔 지금 타이어로 끝까지 버티는 건 쉽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야.”
COTA에선 때에 따라 원 스탑과 투 스탑 전략이 사용된다. 하지만 오늘 레이스 VSC 덕분에 모두가 일찍 첫 타이어를 교체했기에, 파이널 랩까지 또 하나의 타이어가 필요해 보였다.
“페텔만 없다면, 그게 좋을 것 같은데... 페라리가 둘이서 피트 스탑 없이 버티기 작전에 들어간다면, 그걸 뚫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페라리 전략은 뻔하잖나. 서준하가 새 타이어를 장착하고 돌아오는 동안, 페텔은 보타스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압박할 거네. 그 후엔 새 타이어를 장착한 서준하와 다시 배틀을 해야겠지. 차라리 보타스에게 창을 쥐여주는 게 낫지 않겠어?”
이번 시즌 새 타이어를 장착한 서준하의 높은 추월 성공률과 더불어 서준하를 서포트할 페텔의 존재는 메르세데스의 고민을 키웠다.
라우다가 보기엔 일찍 타이어 교체에 들어가 선두 자릴 내주더라도, 후반 추월을 노려보는 것이 나아 보였다.
“아닙니다, 그것보단...”
라우다의 말에 경우의 수를 따져보던 테오. 이제 무언가 결정한 듯한 표정이었다.
“우린 페라리를 보고 대응하는 게 좋겠군요.”
“크흠... 서준하는 분명 언더컷을 노릴 거라고. 50랩을 이후 보타스가 서른 바퀴 넘게 달린 타이어를 가지고 선두 자릴 지켜낼 수 있을까?”
“대응은 곧바로 하면 됩니다. 서준하가 언더컷에 들어가면, 우리도 바로 교체를 노려야지요.”
테오는 결코 선두 자릴 포기하면서까지 상대보다 먼저 타이어 교체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이른 피트 스탑으로 서준하를 앞에 두는 상황만은 가장 피하고 싶었다.
“허허, 만약 서준하가 교체 없이 달린다면?”
“그러지 않을 겁니다. 서준하도 분명 지금 타이어 부담이 있을 테니까요.”
“흠... 그렇게 된다면, 순전히 둘의 타이어 관리 능력이 승패를 가르겠구만... 그렇지만...”
레이스 최후반 상황을 미리 떠올려보는 라우다.
“그건 서준하가 한 수 위야. 동등한 조건으론 보타스는 서준하를 막을 수 없네.”
서준하가 이번 시즌 최고의 드라이버로 주목받는 건 그의 출신 배경이나 최연소 기록 달성 등도 있지만, 무엇보다 뛰어난 드라이빙 테크닉으로 긴 스틴트를 뽑아내는 능력이었다.
라우다의 마지막 말에도 테오도 인정한다는 듯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런데,
“감독님! 41랩 보타스의 랩타임이 조금 더 떨어졌습니다!”
“뭐? 벌써?!”
트랙의 최고점과 최저점의 차이가 무려 40m에 달할 정도로 고저 차가 심한 COTA. 서킷 곳곳 블라인드 코너 덕분에 스티어링과 급감속을 번갈아 쓰므로 타이어 관리가 쉽지 않은 서킷이다.
“프론트 그립이 사라지기 시작했답니다. 어, 어떻게 할까요?!”
“...”
순간, 보타스가 타이어를 관리하며 파이널 랩까지 페이스 유지에 성공하길 바랐던 테오의 생각이 산산이 무너져버렸다. 하지만,
“서준하! 서준하의 랩타임은?”
팀의 분위기가 침체된 사이, 재빠르게 피트 월 상황판으로 다가선 라우다.
“다행입니다! 서준하도 이전 랩보다 떨어졌어요!”
“그래서 현재 격차는?!”
“3.9초! 40랩과 큰 차이 없습니다!”
현재 타이어가 한계점을 드러낸 건 아니지만, 가장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컨디션은 아니었다.
“후... 같이 떨어진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계속 더 지켜보자고...”
그나마 다행인 건 추격자도 동일하게 페이스가 떨어지고 있었다. 보타스의 무전 내용에 초조했던 메르세데스 팀의 분위기도 다시 조금씩 가라앉았는데,
“...!”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라우다와 달리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테오 감독.
“움직인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 숨죽이며 피트 월 바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
“헛...!”
갑작스럽게 분주해진 페라리의 게러지. 이 모습을 포착한 테오와 코치진들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맥키...!”
이제 페라리는 새 타이어로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는 듯했다.
새 타이어를 장착한 서준하의 어택을 막기 위해선 그와 동일한 컨디션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준하보다 앞자릴 유지하면서 교체를 하는 것. 테오가 피트 크루 리더에게 사인을 보냈다.
“피트 월, 감독이다. 보타스 이번 랩 타이어 체인지하도록!”
타이어를 들고 부산히 움직이는 페라리의 피트 크루. 그 모습을 재차 확인한 테오가 보타스에게 오더를 내렸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18턴을 빠져 나와 피트 레인으로 들어서는 보타스. 반드시 피트스탑에서 실수가 없어야 하므로 또다시 엄청난 긴장감이 메르세데스 피트에 흘렀다.
“온다...!”
추격자가 보타스와 똑같은 라인을 그리며 피트 레인 근처로 다가서기 시작했는데,
훼에에에에에에에엥.
피트 레인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서준하의 페라리카.
“...!!!”
“...!!!”
메르세데스 팀 전원이 넋 놓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
“이어서 페텔! 페텔...!”
서준하의 뒤를 달려온 페텔의 경주차가 피트 레인 근처로 다가서자, 중계진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훼에에에에에에에에엥.
페라리의 레이싱카가 또 한 번 피트 레인을 지나쳤다.
“아! 페이크였어요! 서준하와 페텔 어느 누구도 피트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모두의 예측에서 벗어난 상황에 중계진이 감탄을 내뱉었다.
“다시 게러지로 복귀하는 피트 크루들!”
“선수들이 거부했던 건 아닌 것 같군요. 아마... 레이스 초반 메르세데스 팀이 썼던 전략과 똑같습니다, 하하.”
태연한 피트 크루의 움직임으로 볼 때, 철저히 의도대로 이루어진 페이크 피트 스탑 전략.
곧바로 메르세데스 피트로 이동한 중계 카메라가 얼굴이 시뻘게진 코치진들의 모습을 포착했다.
“자, 이렇게 되면 보타스가 언더컷을 시도한 셈이 됐고요. 페라리로선 선두가 피트에 들어간 지금, 최대한 랩타임을 단축시켜야 하겠죠.”
“페이크 전략에 당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긴 힘들지만, 메르세데스의 지금 교체 타이밍도 나쁘지 않습니다. 남은 열세 바퀴면 새 타이어로 충분히 뒤집어볼 수 있거든요?”
피트 스탑으로 랩타임 손해를 보지만, 종료까지 시간은 충분했다. 이에 중계진이 페라리 팀의 타임로그를 체크했다.
“또 한 번 피트 레인을 지나치는 페라리카들. 아마 페라리 팀은 교체 없이 끝까지 버텨볼 생각인 것 같은데요.”
보타스가 피트 스탑을 했던 42랩까지 랩타임이 떨어졌던 서준하.
“자, 보시죠. 이번 랩 페텔은 0.6초 가까이 랩타임이 떨어졌고요. 그리고 서준하, 서준하는...”
그의 타임로그를 살피던 중계진이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
“...?! 43랩 1분 38.066초... 직전 랩보다 0.2초 빨라졌습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중계진의 어리둥절해하던 찰나, 또다시 스타트 라인을 통과하는 선두 페라리카.
“...!!!”
주변 경쟁 차량들과 마찬가지로 40바퀴를 넘어서면서 랩타임이 떨어졌던 서준하. 한눈에 봐도 달라진 속도로 서킷을 질주하는데,
띠링.
중계진은 물론, 서킷 모두의 시선이 전광판으로 향했다.
[Fastest lap on lap 44]
-Ferrari No. 50 SEO]
-1분 37.692
보타스의 피트 스탑 이후 갑자기 페이스가 오르며 랩 레코드를 달성했다.
“설마 서준하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 중계진의 시선이 선두 차량에게로 향했다.
< 선수들이 거부했던 건 아닌 것 같군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