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세션까지 안가도 되겠어 >
강렬한 충돌음에 서준하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시케인을 빠져나가며 탈출 속도를 높일 타이밍. 드라이버는 본능적으로 악셀 대신 브레이크 페달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쾅!
자신의 경주차 뒤편으로 무언가 날아들었고, 묵직한 충격이 서준하를 덮쳤다.
끼이이이이이익.
충격을 받은 경주차는 사정없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카운터 스티어링을 했지만, 머신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페라리카는 빙글빙글 돌아 그래블 근처로 날아가 버렸다.
‘사고다...!’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느낌과 함께 주변 시야로 보이는 부서진 포뮬러카들.
지금 눈앞으로 보이는 사고 규모로 봤을 때, 의식이 있는 것이 천만다행인 상황처럼 느껴졌다.
“아! 서준하! 서준하는 콕핏을 스스로 빠져나오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지금 막누스와 가슬리의 경주차가 미동도 없습니다! 구조대원들이 빨리 도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사고는 심각했다. 5그리드의 가슬리부터 선두 서준하까지, 순위권 경주차 다섯 대 모두 1턴 근처에 멈춰섰다.
다다다다다다.
심각하게 파손된 차량 주변으로 마샬과 구조요원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제프와 충돌하면서 날아간 막누스의 차량이 서준하와 부딪혔고요. 뒤따라오던 차들도 길목이 막혀 속절없이 추돌하고 말았습니다...”
경기가 중단된 사이, 사고 장면이 리플레이됐다.
“흠, 서준하가...”
스크린을 유심히 살피던 중계진들. 경주차 한 대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도 시케인 탈출에서 악셀 대신 브레이크를 밟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정말이군요. 사고가 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상식적으론 받아들이기 힘든 조작과 반응 속도군요.”
분석을 시도하는 중계진의 눈에 띈 건 선두 차량이었다.
만약 충돌 직전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더라면, 가속으로 인해 더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었던 서준하의 페라리카. 마치 충돌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그의 대처는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빨랐다.
“다행히 선수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음, 부디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요...!”
“아, 이런... 막누스! 막누스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리를 저는 선수부터 의식이 없는 선수까지. 사고 드라이버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결국, 메디컬 헬기가 서킷에 나타났고, 사고 선수들이 응급실로 옮겨졌다.
***
“감독님, 메디컬 팀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발목 골절이라네요...”
“골절?! 이런... 그거 말고 다른 데는 괜찮은 거야?”
“네, 다행히 다리 쪽 부상만 있다고 합니다. 어떡하죠... 앞으로 3개월은 꼼짝 못 할 것 같은데요.”
페라리 팀 피트.
응급실로 실려 간 제프의 부상 소식이 전해졌다.
이미 신형 경주차 두 대가 파손된 것에 더해, 드라이버까지 부상을 당하고만 상황. 팀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어! 왔습니다! 준하가 왔습니다!”
사고를 당한 선수들이 응급실로 향했을 때, 서준하는 게러지로 복귀했다.
“정말 괜찮은 거야?”
“보다시피 멀쩡해.”
엄청난 사고 장면에 팀원 모두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서준하는 너무나 멀쩡했다.
리어 바디가 완전히 파손된 페라리카에 비해 드라이버는 발톱 하나 다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코치진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준하 잠깐, 내가 체크 좀 하겠네.”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전반적인 의료 검사가 필요할 터. 팀 닥터 로버트 박사가 그의 몸 이곳저곳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코치진들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어떻습니까, 로버트?”
“천만다행이군요. 지금 딱히 문제가 있는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신체적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검진를 마친 로버트의 말에 그제야 코치진 전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심리적 정서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테니까요.”
“...”
“흐음...”
공도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교통사고에도 후유증을 겪는 것이 우리의 몸이다.
제아무리 수많은 충돌을 경험한 F1 드라이버라도, 이런 대형 사고라면 충분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같은 후유증이 일어날 수 있다. 팀 닥터의 말에 코치진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굳어 버렸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 마시죠, 감독님.”
파손된 신차와 제프의 부상. 서준하마저 콕핏을 비우게 된다면, 앞으로 페라리 팀은 테스트 드라이버만으로 시즌을 치러야 하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그런 코치진들의 심경을 파악한 서준하가 나섰다. 하지만,
“음, 아니야. 그래도 당분간은 쉬는 게 좋겠네. 시즌은 이제 시작이니까, 아직 많이 남았네.”
페라리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 서준하. 감독은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았다.
팀이 당장 리드를 잃는 것보다 챔피언 드라이버의 안위가 더욱 중요했으니까.
“그래, 준하. 무리할 필요 없네. 내가 봐도 이번 사고는...”
“아뇨, 쉴 생각 없습니다.”
서준하가 안토니아치의 말을 자르며 나섰다.
이미 사망사고까지 겪으며 다시 F1에 올라온 마당에 오늘 사고는 큰 문제가 되질 않는다. 더군다나 다음 그랑프리는 반드시 출전해야 한다.
“휴식은 다음 그랑프리가 끝나면 생각해보도록 하죠.”
묵직한 분위기 속에서 감독을 바라보며 말을 꺼내는 서준하.
“다음 그랑프리... 아.”
순간 코치진 모두 그 말에 고갤 끄덕였다.
“팬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문제없을 테니 다들 걱정 마세요.”
2013년 이후 8년 만에 재개되는 코리아 그랑프리. 서준하는 오랫동안 바라왔던 한국 팬들의 꿈을 다음 해로 미루고 싶지 않았다.
***
프레스 컨퍼런스를 위해 회견장으로 모여드는 선수들. 21시즌 2라운드 코리아 그랑프리의 공식 일정이 시작이 시작됐다.
찰칵 찰칵.
여느 그랑프리와 다름없이 여전히 한 선수에게만 집중된 F1의 스포트라이트. 특히나 홈 그랑프리에서 그 인기는 거의 유명 뮤지션의 단독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컨퍼런스가 시작됐고,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강팀들의 메인 드라이버들이 개막전의 안타까운 사고를 겪은 상황입니다. 덕분에 이번 시즌 반전을 노리는 선수들이 많은데요. 르노와 레이싱 포인트 팀도 이번 그랑프리 포디엄을 노려볼 수... ”
서준하의 우승을 점치는 언론이 대부분이었지만, 개막전 사고는 다른 경쟁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몇몇 중위권 드라이버들이 우승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런 모습에 서준하의 입가에서 미소가 흘러나왔다.
“개막전에서 서준하 선수를 걱정했던 팬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경주차의 파손 정도로 봤을 때, 그 충격은 심각해 보였는데요. 현재 컨디션은 괜찮으신 건가요?”
많은 F1 팬들이 서준하만을 생각했다. 개막전 레이스의 결과보다는 사고를 겪은 그의 컨디션에 더 관심을 가졌을 정도. 이제 서준하는 F1 팬들이 가장 아끼는 선수가 됐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다시피 저는 괜찮습니다.”
사고 이후 공식 석상에 오를 때마다 밝게 웃었고, 인터뷰에서도 평소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언론과 팬들의 걱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이후에도 그를 걱정하는 질문들은 끊이지 않았다.
“흐음...”
서준하도 한때는 누군가의 열렬한 팬이었다. 이런 팬들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잘 안다.
지금 상황에서 어떤 말로도 팬들의 걱정을 덜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중요한 건,
“평소처럼 서킷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행동뿐이다. 주변의 모든 불안을 잠재우려면 직접 문제가 없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서준하는 인터뷰를 끌지 않으며 승리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
FP1 출전 직전, 서준하가 레이스 장비 착용을 시작했다.
“이거, 그때 말했던 디자인으로 준비했어.”
대기실로 나타난 한서윤. 태극기 아래 포효하는 호랑이 한 마리로 디자인된 특별 헬멧을 건넸다.
“오, 실제로 보니까 더 괜찮은데요?”
서준하와 주변 동료들에게도 그리고, 한국 팬 모두에게도 의미 있는 그랑프리. 레이스 장비에도 오늘 레이스를 기념하고픈 그의 마음이 드러났다.
'드디어...!'
국내 팬들과의 오랜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서준하는 늘 말해왔다. 자국 레이서가 홈 서킷을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영암에서 우승한 최초의 한국인 F1 드라이버가 되겠다고.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의 서준하가 특별 헬멧을 착용하고 콕핏에 올라탔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둥.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공식 일정의 시작 직전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던 영암 서킷.
[PIT LANE OPEN]
8년 만에 재개된 코리아 그랑프리. 지난 수년간 한국 팬 모두가 간절히 바라왔던 홈 그랑프리가 시작됐다.
“와...! 한국의 서준하 선수가 피트레인을 빠져나옵니다!!!”
한국인 최초의 F1 드라이버가 가장 먼저 영암 서킷에 등장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레이싱카에 올라탄 기분은 여전히 짜릿했다.
연석을 밟을 때마다 찌릿찌릿한 감촉이 등허리로 전달됐고, 온몸을 꽉 조이는 시트로 상당한 중력 가속도가 느껴졌다.
-슬슬 작동 온도에 도달한다. 이제 조금씩 스피드를 올리도록!
“Copy.”
저속 테크닉을 발휘해야 하는 영암의 섹터 2. 챔피언 드라이버의 물 흐르는 듯한 조작에 페라리카가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코너 진입에서 프론트를 집어넣으며 오버스티어로 방향을 크게 트는 페라리카! 서준하의 주법이 돋보이는 코너링이군요!”
“아! 정말 감동스러운 순간입니다! 영암에서 서준하의 드라이빙을 볼 수 있다니요...!”
연습 주행이었지만, 영암 서킷은 이미 만석에 가까웠다.
노면의 컨디션을 점검하고, 기본기를 다지는 서준하의 워밍업만으로도 중계진과 팬들의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는 페라리 피트.
“괜한 걱정을 했구만, 하하.”
“과연 저런 사고에도 이렇게 멀쩡한 선수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무적이군요. 무적... ”
마싸, 하키넨을 비롯해 많은 선수들이 정신적인 충격으로 전성기를 잃었지만, 서준하는 달랐다.
사고 직후 같은 경험을 반복할 경우, 트라우마나 PTSD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도 그에게 후유증 따윈 없었다.
감독을 비롯한 코치진 모두의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하고,
“두 번째 세션까지 안 가도 되겠어. 마무리 제대로 하라고 전하게.”
예상과 다른 서준하의 주행에 감탄을 내뱉던 비노토 감독이 피트 월로 다가섰다.
“네? 마무리라면...?”
무언가 작정한 보이는 그의 말에 엔지니어들이 되물었다.
“아까 출발 전에 한 말 취소한다고. 그렇게 전하면 알 거네.”
안정감이 느껴지는 페라리카의 모습에 생각이 달라진 감독.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서준하의 연습 주행의 속도를 제한했던 코치진이 새로운 오더를 내렸다. 그리고,
“이번 랩, 서준하의 페라리카가 어딘가 달라졌습니다...!”
“그렇죠, 서준하가 점점 속도를 높이는데요...!”
타이어가 노면에 쫙 달라붙은 지금,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으로 가득한 서준하.
‘됐다...!’
메인 스트레이트에 오르며 엔진 파워를 완전히 개방했다. 그리고,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톱 스피드를 뽑아내는 페라리카!!!”
제트 전투기와 같은 폭발적인 가속으로 앞차들과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F1의 황제가 영암 서킷을 달리고 있습니다!!!”
챔피언 결정전의 피니시 때나 볼 법한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두 번째 세션까지 안가도 되겠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