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e here and now <마지막 회> >
경주차의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일어난다.
코리아 그랑프리의 Q1이 한창 진행 중인 지금. 서준하의 페라리카가 지게차에 실려 피트로 돌아왔다.
“여기서 공기가 새는 것 같은데요...”
잠시 후, 엔진 박스를 점검하던 미캐닉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기가 샌다고?”
“뉴매틱 밸브(New-matic valve) 쪽이 맞습니다. 지난번 트러블하고 동일합니다.”
21시즌 몇 번의 엔진 문제가 있었던 페라리 카. 오늘 또다시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며 예선 도중 엔진 블로우가 일어났다.
“비노토, 이건 엔진 교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실린더에 금이 가버렸구만. 허허, 하필 오늘...”
덕분에 서준하는 예선 기록도 만들어보지 못하고 리타이어한 상황. 어제 연습 주행에서 가장 빠른 기록을 냈었기에 팀은 더욱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후...”
이번 라운드는 그의 홈 그랑프리다. 갑작스럽게 터진 사건으로 서준하 역시 당황스럽고 화가 나는 건 마찬가지. 하지만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20번 최후미 그리드.
내일 레이스 스타팅 그리드였다. 제아무리 챔피언 드라이버라도 최후미에서 시작해 포디엄에 오른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터벅터벅.
첫 코리아 그랑프리에서 우승 선물을 안겨주겠다던 팬들과의 약속. 어쩌면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모두에게 우울한 하루를 선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서준하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
일단 평소처럼 레이스 준비를 하기로 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반신욕을 하고 명상에 들어갔다.
몇 분 후.
졸음이 밀려왔고, 서준하는 금세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또...!’
눈앞으로 나타난 23살의 서준하와 11살의 서준하.
환생 직후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꿈을 꿨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에게 다가서려 할 때마다 아이는 사라졌었다.
또 한 번 아이로부터 강렬한 감정을 느낀 서준하. 작고 귀여움을 간직한 자신에게로 다가서는데,
‘...!’
이번에는 달랐다. 아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신기한 마음에 곧장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
휑.
타닥!
갑작스럽게 아이의 앞으로 수천 수백 가지의 장면들이 펼쳐졌다.
정체를 파악하려 몸을 움직이자,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스르르르르륵.
짧지만 강렬했던 그의 과거. 지난 12년 동안의 기억이 담긴 장면들이 엄청난 속도로 리와인드 되기 시작했다.
.
.
.
.
뭔가를 발견한 걸까.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준하가 움직였다.
이번엔 특정 장면들만이 선택적으로 리와인딩 됐고, 수많은 고난에 빠졌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
모든 사건 속 핵심을 이루는 한 가지 생각. 그 복잡한 장면들 속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순간 서준하는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스르르르륵.
과거의 기억들이 사라지고, 어릴 적 서준하가 다시 나타났다.
고카트를 처음 탈 때 지었던 천진난만한 웃음. 아이는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다.
휑.
타닥!
순간 아이가 모습을 감추며 서준하도 눈을 떴다.
.
.
.
얼마나 잠들었던 걸까.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고요에 머물렀다는 느낌을 받으며 잠에서 깼다.
사위는 푸르게 밝아오고 있었고, 심장은 잠잠했다.
[2021년 10월 11일. 06시 45분...]
놀라운 건, 벌써 하루가 지났다는 사실이었다.
어느새 대망의 코리아 그랑프리의 아침. 영암의 해가 서준하를 비추기 시작했다.
***
“서준하 선수에게 청룡장과 부상이 수여됩니다!”
지난 5년간의 커리어와 코리아 그랑프리 유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서준하. 레이스 시작 전, 문체부 장관으로부터 체육훈장 최고 등급인 청룡장을 수여 받았다.
소감을 발표를 위해 단상 위에 올라온 서준하. 서킷에 모인 코리아 GP 조직위와 한국 스폰 기업들 그리고, 객석에 앉은 한국 팬들의 모습이 보였다.
십만여 명의 관중과 더불어 유럽의 여느 서킷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화려한 시설들을 자랑하는 영암 서킷. 지난 8년간 한국의 모터스포츠 산업이 이뤄낸 엄청난 성공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공간에 서준하가 서 있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을 대표해 제가 이 훈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암 서킷 전역으로 그의 수상 소감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제게 홈 그랑프리를 달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갤러리 대다수가 서준하의 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상자의 말 한마디에 엄청난 환호와 박수가 쏟아져 나오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무언가 터져 나올 것만 같이 떨려오는 그의 목소리. 순간 영암 서킷 전역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오늘 영암에서 인생 최고의 레이스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늘 우승하지 못하면, 레이스를 관두겠다고 했던 인터뷰는 농담이 아니었다. 오늘 서준하는 자신의 모터레이싱 인생을 걸고 레이스에 뛰어들기로 다짐했다.
터벅터벅.
스타팅 그리드로 다가서는 참가자들. 서준하도 장비 착용을 마치고 페라리카에 올라탔다.
곧이어 포메이션 랩이 시작됐고, 영암 서킷은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와아아아아아아아아!!!”
‘...!!!’
폭발할 듯한 순수한 에너지가 하나의 한 점. 그것은 레이싱카에 올라탄 서준하를 향하고 있었다.
순간 서준하는 자신이 왜 계속 F1에 도전하고 있는지 깨달으며, 전의를 다졌다.
지난밤 서준하는 보았다. 자신은 늘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살아왔다는 걸.
얽히고설킨 기억들 속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Be here and now.
현재에 집중하는 것. 고난에 빠진 그에게 구원은 오직 그뿐이었다.
새로운 삶을 가졌을 때도, 차량 문제로 레이스를 망쳤을 때도.
지금까지의 승리는 오늘, 현재, 지금 레이스에 집중했기에 가능했다.
“2021시즌 영광스러운 코리아 그랑프리가 시작합니다!!!”
두두두두두두둥.
지금 서준하의 할 일은 명확했다. 스티어링 휠을 붙잡으며 경주차가 전하는 떨림에 집중했다.
잠시 후,
출발 신호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라이트 아웃!!!”
신호가 끊어짐과 동시에 서준하의 경주차가 튀어 나갔다.
“서준하의 스타트가 빠른데요...!!!”
클라스가 다른 시프팅 테크닉. 출발과 동시에 20 그리드 서준하가 경주차 세 대를 앞질렀다. 그리고,
파바바바바바.
런오프에 오른 서준하.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첫 코너로 달려가는데,
“...!!!”
“...!!!”
“...!!!”
모두의 눈을 의심케 만드는 스펙터클한 홀샷. 페라리카가 혼란스러운 첫 코너의 안쪽 깊숙이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기가 막힌 인코스 오버테이크! 서준하가 단숨에 14위까지 올라섭니다!!!”
메인 스트레이트에 올라타자, 줄줄이 늘어선 경주차들이 보였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조급할 필요 없다.
하루빨리 경쟁자들을 앞질러야 한다는 생각 따윈 없다. 그저 물 흐르듯 경주차를 움직일 뿐.
“스트레이트 끝에서 레이트 브레이킹!!! 또다시 서준하가 앞차를 추월합니다!!!”
“단, 세 코너 만에 도대체 몇 명을 추월한 건가요?! 지금 벌써 11위입니다. 11위! 와...!”
급감속 구간 이후 순위권 차량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서준하는 변함없이 드라이빙에만 집중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레이스는 치열했지만, 서준하는 평온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어지는 섹터 2에서도 그의 추월쇼는 계속됐다.
.
.
.
.
.
.
이날 F1 사상 또 하나의 깨지기 힘든 기록이 등장했다. 최후미 스타팅 그리드가 가장 먼저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는 놀라운 기록.
21시즌 2라운드 서준하의 홈 그랑프리. 이날이 바로 F1 최다 연승의 시작이었다.
서준하, 그는 F1의 신화였다.
***
화성시에 위치한 대현차의 남양기술연구소. 포뮬러카 한 대가 100만 평 부지의 종합주행시험장을 돌고 있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웅.
끼이이이익.
부우우우우우우우웅.
지금으로부터 2년 전, 2024시즌 F1에 출사표를 던졌던 대현차. 불과 첫 시즌만에 종합 6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달성하며 F1에서의 성공 가능성을 맛봤다.
그 이후로 꾸준한 성적을 내며, 상위권 도약을 위한 드라이버 영입과 신차 개발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테스트 드라이번가 보죠?”
“그런 것 같네. 어우 춥다, 일단 빨리 올라가자.”
테스트 시즌을 맞아 연구소로 출근한 대현 레이싱의 메인 드라이버 양성찬과 그의 매니저 한명호.
도착과 동시에 레이싱카의 배기음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추운 날씨에 못 이겨 재빠르게 연구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와... 저긴 후륜이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쉬운 구간을 저 속도로 안정적으로 도네.”
“저렇게까지 악셀을 밟을 수 있는 건 웬만한 균형 감각으론 불가능한 곳인데... 저런 테크닉을 한국에서 다 보다니.”
연구소 내부 풍경은 평소와 달랐다.
연구원 전원이 메인 홀에 나와 종합주행시험장을 바라보며 감탄을 내뱉고 있었다.
“왜, 뭔데 그래.”
건물로 들어온 두 사람도 서킷을 보기 위해 창 앞으로 다가섰다.
부우우우우우우우웅.
끼이이이익.
“...!!!”
“와...!!!”
같은 차, 다른 느낌. 연구소는 이미 테스팅 주행의 열기로 후끈했다.
전반적으로 흔들림이 강했던 대현의 포뮬러카는 노면에 달라붙은 채 서킷을 질주했다.
“저속 구간에서 저런 스피드를 낸다고?!”
“와... 드라이버의 악셀 컨트롤이 예술적이야. 선회 중에 스로틀만으로 리어에 하중을 걸고 있어...!”
“악셀로 그런 컨트롤이 가능하다고요?”
“가능해. 그러니까 차가 저렇게 안정적이고, 최저 스피드는 높게 유지할 수 있는 거지. 진짜 보통 수준이 아니야...”
마치 이곳을 수천 번 돌아본 것처럼 난이도가 높은 코스를 실수 없이 돌파해 나가는 경주차. 그리고,
“와, 이제 시작이라고?!”
“어! 핫 랩을 달리려는 건가...!”
지금까지의 주행은 워밍업이었던 걸까. 테스팅 차량이 전과 다른 속도로 홈 스트레이트를 출발했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그러네, 윗선들도 다 나와있고...”
서킷 주변으로 보이는 임원진들. 연구소장을 비롯한 사장단 전원이 흐뭇하게 테스팅 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브레이킹 포인트를 세밀하게 바꾸면서도 스피드는 더 빨라졌어! 진짜 월드 클라스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훼에에에에에에엥.
핫 랩을 마친 포뮬러카가 다시 한번 스타트 라인을 통과했다. 그와 동시에 연구소 전원의 시선이 서킷 전광판으로 향하고,
“...!!!”
“...!!!”
1분 24초 572. 기존의 드라이버들보다 10초 이상 빠른 기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20초대 기록에 연구소가 발칵 뒤집어졌다.
“와, 누굴까요...?”
“절대 신인이나 테스트 드라이버는 아니야. 사장단이 이렇게 전부 나올 정도면...”
두두두두두두두둥.
테스트 주행을 마치고 피트로 들어간 포뮬러카. 화제의 주인공이 콕핏에서 내리자 임원진이 그에게 악수를 요청했다.
잠시 후,
터벅터벅.
사장단과 함께 연구소로 걸음을 다가오는 정체 모를 드라이버. 그런데,
“...!”
“...레이스의 신께서 남양까지 오셨구만.”
멀리서 그를 알아본 몇몇 덕분에 연구소가 떠들썩해졌다.
“서준하... 서준하 선수 맞죠?”
남자는 서준하였다.
사장단의 부름으로 대현의 드라이버들이 그의 앞으로 달려 나왔다. 살아있는 전설 앞에 어린 선수들의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근데 서준하가 왜...?”
연구소 직원을 비롯한 대현 레이싱 팀과 인사를 나누는 서준하. 그의 곁으로 비어만 사장이 등장하며 모두를 주목시켰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는데,
“대현 레이싱의 일원으로서 오늘은 정말 영광스러운 날이 아닐 수 없군요.”
슈마허의 기록을 뛰어넘은 드라이버이자, 통산 8회 월드 챔피언에 빛나는 F1 사상 최고의 드라이버 서준하.
“앞으로 서준하 선수는 대현 레이싱과 함께 할 겁니다...!”
전설의 챔피언 드라이버가 대현 레이싱 팀으로 이적한다는 사실이 공표되자, 연구소 전체가 뒤집어졌다. 그리고,
“...반갑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할 때, 서준하가 나섰다.
“이번엔 대현 레이싱과 함께 포디엄에 오르고 싶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자국팀을 F1 정상으로 끌고 가겠다는 그의 오랜 꿈. F1의 황제가 새로운 도전을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환생한 F1 레이서> 완-
< Be here and now <마지막 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