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예지몽?(3)
딩동댕동.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다. 반장의 구호에 맞춰 인사가 끝나자 선생이 무료한 표정으로 교실을 나섰다.
“자 다음 시간까지 숙제 까먹지들 말고 해와라.”
15반의 학생들의 우렁찬 대답을 끝으로 선생의 모습이 사라졌다.
드르륵.
책상이 거칠게 밀려나는 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15반의 모든 시선이 강우를 향해 쏟아졌다. 약자인 강우를 향한 시선에는 동정심 혹은 비웃음이 담겨있었다.
“너 이 새끼. 오늘 각오해라!”
박광웅이 거칠게 책상들을 밀치며 강우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이 마치 성난 황소 같았다.
“야, 무슨 일 있었어? 쟤 또 왜 저러는데?”
강우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반갑고도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신원주.’
강우의 기억 속 신원주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물론 지금은 단순한 짝꿍에 불과했다. 하지만 2학년이 되며 또 같은 반이 되었고, 그것이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야 모르지 쟤 저러는게 하루 이틀이냐?”
신원주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방학 전까지만 해도 일진들의 횡포에 두려워하던 강우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 강우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사이 커다란 체격의 박광웅이 씩씩거리며 강우의 코앞에 왔다.
꽉.
가라앉은 화를 끌어올릴 시간이 필요했을까. 박광웅이 강우의 멱살을 잡았다.
“노숙자 새끼가.”
그 순간이었다.
“경고했지. 멱살 잡지 말라고.”
복싱으로 단련된 강우의 주먹이 번개처럼 쏟아져 나갔다.
퍼퍼퍽!
강우의 주먹이 박광웅의 안면과 복부에 작렬했다. 박광웅의 거구가 비틀거리더니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스르륵. 쿵.
“끄어어···.”
박광웅의 고통에 찬 비명이 교실에 퍼져나갔다.
“......”
“......”
교실 안으로 정적이 흘렀다. 강우의 일방적인 당함을 예상했던 모두에게 지금의 사태는 충격 그 자체였다. 강우가 무심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무너져 내린 박광웅의 뒤쪽으로 허준후의 얼굴이 드러났다. 허준후는 믿기지 않는 듯 입을 떡하니 벌린 채였다.
“뭐···. 뭐야?”
강우가 주먹을 툭툭 털었다. 첫 경험의 알싸한 통증이 밀려오며 주먹이 얼얼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쾌감이 온몸에 차올랐다. 자신은 더는 나약하고 겁이 많던 예전의 박강우가 아니었다.
“광웅아!”
“이 새끼가!”
그때, 박광웅을 따르던 일진들이 허준후의 뒤쪽으로 늘어섰다. 교실 안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강우가 저렇게 싸움을 잘했나?”
현실을 인식한 반 친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일진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일진들에게 남은 것은 허세와 겁박뿐이었다.
“비겁하게 기습을 하냐?!”
“너 이제 광웅이한테 죽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거품을 물고 있는 박광웅이 뭘 어쩐단 말인가?
‘그래, 그게 소위 일진이라 말하는 네놈들의 실체지.’
박광웅의 곁에 붙어 약한 아이들을 뜯어먹는 기생충 같은 놈들. 강우의 속에서 은은한 분노가 차올랐다. 기억 속 강우는 고등학교 내내 일진들의 먹잇감이고 노리개였다.
‘그리고 특히나 나를 괴롭힌 새끼가 있지.’
강우의 몸이 허준후를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놀란 허준후가 옆으로 손을 뻗어 의자를 낚아챘다.
“씨발!”
허준후가 의자를 들어 올리는 순간. 강우의 몸이 허준후의 품을 파고들었다.
빠각.
강우의 주먹이 허준후의 안면에 꽂혔다.
우당탕.
허준후가 의자째 뒤로 나가떨어졌다. 허준후의 코와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으···. 으···.”
허준후가 얼굴을 부여잡았다. 두 손 가득 묻은 피를 확인하더니 울먹거렸다.
“피···. 피 났어.”
강우를 바라보는 일진들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창백해졌다. 강우가 주먹에 묻은 피를 교복에 쓰윽 닦았다.
“내가 언제까지 네놈한테 설설 길 줄 알았냐?”
허준후를 향해 차갑게 쏘아붙인 강우가 일진들을 바라보았다.
“네놈들 일진 놀이에 어울려줄 생각 없다. 앞으로 귀찮게 굴지 마라.”
강우의 말은 부탁이 아니었다. 선언이자 명령이었다.
“어···. 어···.”
“아···. 알겠어.”
일진들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리고는 쓰러져 있는 박광웅과 허준후를 살피기 시작했다. 허준후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악에 받친 소리를 질렀다.
“너, 나중에 봐! 그냥 넘어갈 줄 알아?”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일진들이 기겁하며 박광웅과 허준후를 자리로 끌고 갔다. 자리에 털썩 앉은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문제라도 있어?”
시선을 마주친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개미 떼가 흩어지듯 우르르 흩어진 아이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교실 안으로 묘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그동안 강우에게 잘못한 것은 없는지 생각하며 걱정을 하기도 했다.
“야! 너 진짜 뭐냐?”
강우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원주가 엄지를 척 들고 웃고 있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그래, 너는 이런 놈이었지.’
유쾌하고 사교성 좋은 아이. 자칫 외톨이가 될 뻔한 강우에게 많은 친구를 선물해준 아이가 바로 신원주였다.
“뭐냐 그 엄치 척은.”
“엄지 척? 야 그거 어감 좋네. 그나저나 너 그동안 몰래 체육관이라도 다닌 거야? 복싱? 킥복싱?”
“나? 그냥 지냈는데?”
“에이~ 거짓말.”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강우 스스로조차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체육관 다닐 돈이 어디 있냐?”
“아···. 미안.”
강우의 가정형편은 반 전체에 알려진 바였다. 신원주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말을 마친 강우가 고개를 슬쩍 돌려 일진들이 몰려있는 마지막 분단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허준후는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박광웅은 책상에 엎드린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딩동댕동.
다시 수업 종이 울렸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마침 담임이 들어섰다. 15반의 담임은 국어를 가르치는 남선생이었다. 이제 선생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선생이었다.
“차렷! 인사.”
담임의 시간이 되자 학생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반장의 구령에 맞춰 크게 인사를 했다. 만족스럽게 웃던 담임의 얼굴이 돌연 찌푸려졌다.
“허준후는 어디 갔어?”
담임의 말에 학생들의 시선이 강우를 향했다. 이런 단순한 놈들. 강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박광웅! 너는 수업이 시작됐는데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어?!”
책상에 엎드려 있는 박광웅을 발견한 담임의 불쾌지수가 극에 달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은 일진이 박광웅을 다급히 흔들어 깨웠다. 그 모습에 강우의 입꼬리가 픽하고 올라갔다.
‘어른들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놈들.’
일진들의 모습에 미래에 있던 몇몇 사건들의 기사가 강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교권이 붕괴하고 더욱 대담해진 학생들과 관련된 기사였다. 하지만 90년대인 지금은 달랐다. 선생은 폭군이었고. 공포의 대상이었다.
강우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음. 관련된 사건이나 장소에 접하면 이런 기억들이 떠오르는 건가?’
강우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담임이 박광웅을 다그쳤다.
“박광웅!”
“네···. 으윽···.”
자리에서 일어나던 박광웅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15반이 폭소로 가득 찼다. 그새 무너져버린 박광웅의 위세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박광웅, 너 이리 나와.”
담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담임은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박광웅이 얼굴을 붉혔다.
“빨리 안 튀어나와?!”
담임이 버럭 소리쳤다. 박광웅이 비 맞은 쥐새끼처럼 앞으로 끌려나갔다.
짜악!
담임의 귀싸대기가 단번에 박광웅의 얼굴을 후려쳤다. 박광웅이 살짝 비틀거리더니 자세를 바로잡았다.
“너 이 새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어? 너 얼굴이 이게 뭐야?!”
담임이 박광웅의 얼굴이 부어있음을 발견했다. 박광웅이 흠칫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의외의 대답이라 생각하겠지만, 당연한 대답이었다. 박광웅의 입으로 강우에게 얻어맞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게 일진들의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얼굴이 이렇게 퉁퉁 부었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너 또 싸움박질했지?”
“.....”
박광웅이 침묵하자 담임이 반 전체를 살폈다.
“그리고 허준후 이놈은 또 어딨어?”
“주···. 준후요?”
박광웅이 고개를 숙인 채 허준후의 자리를 확인했다. 비어있는 자리를 확인한 박광웅이 강우를 힐끗 보았다.
“모르겠습니다.”
“하···. 이 새끼들이 이제 학기 말이라고 대놓고 이런다 이거지?”
담임이 손에 차인 금속 시계를 풀었다. 담임의 저 행동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찼다는 신호였다. 학생들이 숨을 죽이고 침묵했다.
“주···. 준후는 양호실에 갔습니다!”
참다못한 일진 한 명이 손을 들며 소리쳤다. 담임의 시선이 그 일진을 향했다.
“양호실? 왜?”
“그···. 그게.”
일진이 강우의 눈치를 살폈다. 담임의 시선이 강우를 향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박강우는 왜?”
“강우가 준후를 때렸습니다.”
이실직고한 일진이 강우를 보며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담임이 강우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박강우, 너 이리 나와.”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담임을 향해 걸어갔다. 강우가 다가오자 박광웅이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담임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너네 싸웠냐?”
몇 가지 상황만으로 쉬는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을 눈치챈 담임이었다.
‘어른이 그 정도 눈치가 없는 게 말이 안 되지.’
강우가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일 년 내내 괴롭힘을 당한 강우였다. 때로는 얻어맞고 얼굴이 부은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은 억울함에 눈물을 흘려 눈물 자국이 남은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마주친 담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강우를 대했다.
‘몰랐던 게 아니고 모른 척했던 건가?’
괴롭힘을 당할 때는 모른 척하더니 싸움을 하고 나니 싸웠냐며 추궁을 했다. 후자보다 전자가 더 불편한 진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싸운 게 아니라 제가 일방적으로 팼습니다.”
강우의 말에 학생들의 얼굴에 경악이 차올랐다. 불과 며칠 만에 강우는 완전 딴사람이 되어있었다.
“뭐?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담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등교하자마자 시비를 걸고 괴롭히길래 제가 패줬습니다. 준후는 저한테 맞아서 양호실 간 거고요. 광웅이도 저한테 맞아서 얼굴이 부은 겁니다.”
담임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박광웅은 수치심에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15반의 아이들이 곧 담임에게 불꽃 귀싸대기를 맞을 강우를 떠올렸다. 하지만 담임의 반응은 아이들의 예상 밖이었다.
“너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찾아와.”
“네.
담임의 말이 끝나자 강우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박광웅, 너도 점심시간에 허준후 데리고 교무실로 와.”
“네, 선생님.”
두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아이들이 긴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됐다. 담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담담히 수업을 진행했다.
“오늘 수업은.”
이제 곧 끝날 학기였지만, 담임은 융통성이 없었다. 하지만 수업에 집중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틈만 나면 강우를 힐끗거렸다.
‘음.?’
한편 수업을 바라보는 강우의 얼굴은 기이한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이게 뭐지?’
강우의 머릿속으로 담임의 수업내용이 너무나도 선명히 기억됐다. 평소 머리가 좋은 강우였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강우가 눈을 빛내며 칠판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