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402)

변화(2)

강우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언어영역을 순식간에 끝낸 강우는 곧장 다음 영역으로 넘어갔다. 다음 영역은 [수리영역Ⅰ]이었다.

‘후우···. 수학이라.’

강우에게 가장 큰 약점은 수학이었다. 얼마 전 기말고사에서는 수학 0점을 받는 기염을 토해내기도 했었다. 다른 영역 점수가 나쁘지 않은 강우였기에 수학 선생에게 한참이나 혼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잠깐···. 지금 내가 이과를 지원했던가?’

1학년 학기 말은 문과와 이과를 결정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강우가 기억을 되짚자 자신이 이과에 지원했음을 떠올렸다. 기억 속 미래의 강우는 그 결정을 크게 후회했었다. 강우가 잘하는 과목은 언어영역과 사회영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음. 이과라.’

강우의 시선이 힐끗 참고서를 향했다. 지금 강우가 얻은 능력이라면 이과에서도 꼭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의대도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의대.

90년대 아니 미래에도 이과 학생들의 궁극적인 1지망 중 한 곳이 아니던가. 만약 의사가 된다면 부와 명예는 떼 놓은 당상인 것이 90년대의 인식이자 현실이었다.

‘예전의 나도 의대를 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지. 그래서 이과를 지원한 거고.’

물론 그 정도 성적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강우의 생각은 그저 헛된 바람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강우에게는 이제 의대에 가고도 남을 만한 능력이 있었다. 강우가 다시 참고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디 풀어볼까.’

처음은 어려웠다. 수학 공식은 강우에게 외계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문제가 풀려갔다. 참고서 뒤쪽의 해답 노트를 보며 반복 공부를 하자 그 어렵던 수학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탁.

이윽고 수리영역 참고서를 덮은 강우가 긴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어느 수능 만점자의 명언을 떠올렸다.

-참고서 위주로 공부했습니다.-

강우가 피식 웃었다. 아주 빈말은 아니었나 보다.

‘이거 나 정말 괴물이 되어버리는 건가?’

강우가 다른 참고서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늘 지겹고 어렵기만 하던 공부가 이제는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다가왔다.

‘공부라···.’

학교생활에서 주먹보다 무서운 것이 있었다. 바로 성적이다. 성적이 높은 학생은 다른 세상에 사는 존재였다. 늘 선생들의 이쁨과 관심을 받으며 지냈다.

‘지금 내 성적은 반에서 중간보다 아래인 정도.’

강우가 자신의 짐을 보관하는 커다란 가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가방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 보았던 기말고사의 성적표를 찾은 강우가 등수를 확인했다.

28 / 55

55명의 학생 중 28등. 높지도 아주 낮지도 않은 성적이었다. 강우가 성적표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는 힐끗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강우의 어머니는 아들의 공부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고생을 시키는 게 미안해 공부까지 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했었어.’

미래의 강우는 재수까지 하고 지방의 대학을 갔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취직이 잘되지 않았다. 강우는 늘 평범하지조차 못한 어려운 삶을 살았다. 강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단기간에 성적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내가 원했던 대학 졸업장을 손에 넣겠어.’

강우가 졸업하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대학 졸업장은 사회생활의 가장 큰 무기 중 하나였다.

‘이 능력이라면 나와 가족의 삶을 완전히 바꿀 수 있어.’

어두운 원장실에서 꿈을 꾼 이후 강우의 첫 목표가 세워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학생인 강우에게 최고의 선택이자 미래를 위한 준비였다.

‘해보자!’

그렇게 강우의 공부가 이어졌다. 마음가짐이 달라지자 이전과는 달리 공부가 재밌다고 느껴졌다. 강우 자신도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쉬운 걸 왜 그렇게 안 했던 걸까?’

강우가 공부에 집중하자 어린 강용의 학구열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형아! 나도 숙제!”

강용이 자신의 몸통만 한 가방을 들고 강우의 옆쪽에 앉았다.

“끙차.”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든 강용이 강우의 참고서 옆쪽으로 올려놓았다. 공책이 펼쳐지자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적어놓은 글씨들이 보였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만 훗날 어른이 된 강용은 여전히 악필이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왜 웃어 형아?”

“어, 아니야. 숙제가 뭐야?”

“받아쓰기 열 번.”

강용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연필을 쥐었다. 가만히 있던 강우 어머니가 국어 교과서를 들고는 강용이 받아쓸 문장을 읽어주었다.

“철수와 미애는···.”

강용의 팔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에게 받아쓰기는 매우 힘든 숙제였다. 강용의 콧잔등으로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끙끙대며 받아쓰기를 하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자식.’

그런 두 아들을 바라보는 강우 어머니의 눈가가 촉촉해져 갔다. 며칠 사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큰아들의 모습은 놀랍기만 했다. 어른스러워지고 하지 않던 공부까지 하고 있었다. 내심 걱정하던 교우관계도 처음 친구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비록 환경은 어려웠지만, 저런 아들들이라면 미래가 밝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90년대는 아직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였으니까 말이다.

* * *

탕탕탕.

늦은 밤, 201호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강우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어린 강용은 엄마 품에서 자고 있었다. 강우의 어머니가 잠에서 깨어나 부스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들, 아빠 오셨나 보다.”

“네.”

강우가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갔다. 강우의 어머니는 품에 잠든 강용이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구세요?”

“아빠다.”

문밖으로 들리는 강우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옅은 취기가 묻어있었다.

달칵.

문이 열리자 알싸한 술 냄새가 강우의 코를 찔렀다. 그리고 뒤를 이어 고소한 튀김 냄새가 밀려왔다. 강우의 시선이 스르륵 냄새의 근원지로 향했다.

“치킨 사 왔다.”

강우 아버지가 양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를 강우의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검은 비닐봉지 사이로 치킨 기름이 먹은 종이 포장지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강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으음···. 치킨?”

치킨이라는 단어에 어린 강용도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막내아들이 깨어나자 강우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우리 막둥이 일어났어?”

강용이 아버지의 양손에 들린 것을 보고는 빠르게 달려갔다.

“아빠, 이거 뭐예요?”

“열어봐.”

강용이 다급히 봉지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튀김 음식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강용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강용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강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우와~ 치킨! 아빠, 최고!”

“그래, 우리 막내 많이 먹어라.”

강용이 아버지의 손에서 봉지를 받아들었다. 강우 어머니가 그사이 밥상을 펼쳐놓았다. 강용이 밥상으로 달려가서는 치킨 봉지를 거칠게 벗겼다.

찍.

갈색의 종이 포장지가 비명을 지르자 치킨의 영롱한 자태가 드러났다. 먼 미래에 흔히 옛날 치킨이라 부르는 시장표 치킨이었다. 강용이 대번에 다리를 큼지막하게 뜯어냈다.

“잘 먹겠습니다.”

강용이 닭 다리를 크게 베어 물었다. 강용의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리고는 열심히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아들, 너도 와서 좀 먹어.”

“네, 엄마.”

강우가 강용의 맞은편으로 앉았다. 아버지가 흐뭇한 표정을 짓더니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왔다.

“수고했어요. 나갔던 일은 잘됐어요?”

강우 어머니가 몸을 일으켜 강우 아버지의 양복 상의를 벗기며 물었다. 강우 아버지가 강우를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면접 보고 왔어.”

“진짜요?”

강우 어머니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강우 역시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면접? 벌써?’

그때, 강우의 눈앞으로 큼지막한 닭 다리가 나타났다. 닭 다리 너머로 불안한 표정의 강용이 보였다.

“형아도 빨리 먹어. 안 그러면 내가 다 먹는다?”

“난 닭 다리 안 먹으니까 너 다 먹어.”

강우의 말에 강용의 얼굴에서 불안감이 싹 사라졌다. 강용은 닭 다리를 매우 좋아했다.

“지···. 진짜지?”

고개를 끄덕인 강우가 닭의 가슴 부위를 크게 뜯어냈다. 그리고는 강용을 향해 살짝 흔들었다.

“영양은 닭가슴살에 제일 많거든.”

“난 가슴살 싫어.”

강용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피식 웃은 강우가 치킨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는 부모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가락 시장에 있는 회사인데 조건이 아주 좋아.”

“가락 시장이요? 머네요.”

강우의 가족이 지내는 곳은 인천이었다. 가락 시장까지는 제법 먼 출근길일 것이다.

“멀기는 해도 일호선 타고 가면 되니까.”

강우가 1호선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시절의 1호선은 지옥철 그 자체였다. 푸쉬맨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래도 힘들 텐데. 다른 회사는 면접 안 보게요?”

강우 아버지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글쎄···. 다른 회사들은 조건이 전부 별로라서 말이야.”

“그래요?”

아버지의 표정을 읽은 강우는 느낄 수 있었다. 강우의 아버지는 아직 사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게 분명했다.

“고민 중이야. 얼마 안 되는 보증금이라도 마련해야 집이라도 구해 이사할 테니 말이야.”

“이···. 이사요?”

강우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강우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애들 고생시킬 수는 없으니까. 강우는 이제 수험생이기도 하고.”

“그렇죠.”

강우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얼굴이 미안함이 가득 차올랐다. 강우가 애써 모른 척 닭가슴살을 뜯어 먹었다.

“그러면 정말 좋겠어요. 그런데 면접을 본 회사 이름이 뭐예요?”

“있어. 한동냉장이라고 큰 회사는 아닌데 사장이 돈이 많아. 이번에 해외무역 부서를 만들었는데 거기 부장으로 오라고 하더라고. 내가 제법 마음에 들었나 봐.”

툭.

강우가 손에 들고 있던 치킨을 떨어트렸다. 멍한 표정을 짓는 강우의 머릿속으로 미래의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한동냉장.

기억이 알려주었다. 한동냉장은 지금으로부터 일 년 뒤 강우의 아버지가 취직하는 회사였다. 강우의 아버지는 이 회사에 해외무역 담당 이사로 취직했었다.

‘한동냉장이라니.’

강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려 일 년이나 앞당겨진 일이었다. 하지만 운명처럼 똑같이 일이 흐르고 있었다. 강우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이러지···.’

기억을 떠올려 보려 해도 자꾸 먼지처럼 흩어지기만 했다. 그때, 강우 어머니의 목소리가 강우의 상념을 깨웠다.

“아들, 왜 그래?”

“아···. 아니에요. 갑자기 숙제 안 한 게 생각이 나서요.”

강우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강우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럼 어떡하니. 지금이라도 빨리해.”

“아니에요. 내일 5교시 숙제에요. 점심시간에 빨리하면 돼요.”

강우의 말에 아버지가 한마디 거들었다.

“숙제는 잊어먹지 말고 미리미리 해야지.”

“네.”

강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락 시장이면 너무 멀지 않아요?”

“멀지. 그래도 돈 버는 게 쉬운 일이 어딨어.”

그 말을 끝으로 강우 아버지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곧이어 샤워기가 틀어지고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늦었다. 내일 학교 가야지 빨리 먹고 자.”

강우 어머니가 밥상을 정리하며 두 아들을 재촉했다. 강용이 화들짝 놀라며 먹는 속도를 올렸다. 강우는 묘한 기분에 영 입맛이 없었다. 이윽고 치킨이 앙상한 뼈만 남겨놓은 채 사라졌다.

“으아~ 배불러.”

강용이 배를 부여잡으며 포만감을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화장실의 문이 열렸다.

달칵.

강우 아버지가 씻고 나와서는 한쪽 자리에 누웠다. 강우 어머니가 정리를 서두르더니 강우와 강용에게 말했다.

“이 닦고 와.”

강우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어른이 돼서나 지금이나 자기 전 양치는 귀찮은 강우였다.

“내가 먼저!”

강용은 대번에 화장실로 달려갔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깔끔함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강용이었다. 이윽고 잠잘 준비를 마친 강우 가족이 잠자리에 들었다. 작은 여관방에 옹기종기 몸을 부대자 이불 안으로 금세 온기가 차올랐다.

“.......”

잠시 후, 통 잠을 못 이루며 뒤척거리던 강우가 결국 마지막으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헉···.”

강우가 헛숨을 뱉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가득한 강우의 얼굴은 창백했다. 강우가 고개를 스르륵 돌리자 곤히 잠든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강우의 두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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