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402)

친구(3)

저녁 시간이 되자 식탁에 원주 가족이 둘러앉았다. 평소와는 달리 원주의 옆으로는 강우가 앉아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원주 부모님의 얼굴에는 흐뭇함이 가득했다.

“강우야,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으렴.”

원주 어머니의 말에 강우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아련히 먼 미래의 기억이 떠올랐다. 원주의 부모님은 강우를 지금처럼 참 좋아했었다.

“잘 먹겠습니다.”

강우가 식탁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린 게 없다는 상치고는 다양한 음식들이 있었다. 특히 한쪽에 놓인 돼지갈비를 보니 어린 강용이 떠올랐다.

‘강용이가 갈비를 참 좋아하는데···.’

강우가 입맛을 다셨다. 여관방에서 김에다 햄이나 먹을 가족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 강우의 표정을 읽은 신원주가 강우의 팔을 툭 하고 쳤다.

“일단, 먹어.”

“어, 그래.”

강우가 그제야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하.’

강우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기억 속 원주 어머니의 음식솜씨 그대로의 맛이 느껴졌다. 강우의 젓가락질이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에 질세라 신원주도 먹는 속도를 올렸다. 원주의 부모님이 흐뭇한 표정으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잘 먹었습니다.”

한창 먹을 나이인 강우와 신원주가 빠르게 음식들을 비웠다. 식사가 끝나자 원주의 아버지가 슬쩍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래, 우리 원주랑 짝꿍이라고?”

원주 아버지의 질문에 강우가 입에 있던 마지막 음식을 삼켰다. 원주 부모님의 시선이 온통 강우를 향해 있었다.

“네, 일 학년 내내 짝이었습니다.”

원주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며 살짝 실소를 흘렸다.

“녀석, 친한 친구가 있으면 진작에 집에도 데리고 오고 그러지.”

원주 아버지의 말에 신원주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 친구 많아. 없어서 안 데리고 온 게 아니야.”

“그래? 우리 아들이 정말 친구가 많아?”

원주의 어머니가 확인하듯 강우를 바라보았다.

“네, 친구 많아요.”

원주 부모님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원주 아버지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부모님은 건강하시고?”

“네, 두 분 다 건강하십니다.”

원주 어머니가 호호 웃으며 슬쩍 말을 얹었다.

“강우가 이리 예의가 바른 걸 보면 부모님께서도 참 좋으신 분이겠어요.”

“그러게. 우리 원주가 좋은 친구를 두었네.”

강우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래, 아버님은 무슨 일을 하시나?”

호구 조사가 정밀검사로 이어지자 신원주가 살짝 당황했다. 어려운 강우 가족의 형편을 알고 있는 신원주였다. 강우가 곤란해질까 걱정한 것이다. 하지만 강우가 식탁 아래로 슬쩍 팔을 뻗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예전이었다면 지금쯤 부끄러움에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겠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우는 지금의 상황들이 부끄럽지 않았다.

“사업을 하시다가 실패하시고 지금은 새로 직장을 알아보고 계십니다.”

강우의 담담한 대답에 원주 부모님의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 차올랐다.

“흠흠···. 그러셨구나.”

강우 아버지가 헛기침하며 화제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하지만 강우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 말이 나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네, 그런데 새 직장을 찾기가 영 쉽지 않네요.”

강우가 준비해 놓은 노트를 빠르게 식탁 위로 올렸다. 노트가 펼쳐지자 강우 아버지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이건···.”

“네, 아버지가 외국계 무역회사를 찾고 계셔서요. 마침 원주가 집에 인터넷이 된다고 해서 온 김에 회사들을 좀 찾아봤습니다.”

원주 아버지가 노트를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온통 영어로 적힌 내용에는 강우가 찾은 회사의 정보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이걸 전부 어디서 찾아낸 거니?”

“야호 검색사이트에서 찾았습니다.”

원주 아버지가 또 놀라는 표정을 했다.

“아무리 인터넷이 있다지만, 이건 찾기 힘든 정보일 텐데. 그리고 야호라면 전부 영어로 된 사이트일 텐데?”

“집안 내력입니다. 다들 언어 쪽에 밝습니다.”

원주 아버지가 살짝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이 두 회사가 한국에 지사를 준비 중인 거 같은데 통 거기에 대한 정보는 찾아볼 수가 없네요”

“음···. 그래?”

원주 아버지의 두 눈에 호기심이 짙어졌다. 강우가 눈을 빛내며 남자답게 말했다.

“아버지의 취업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효자 아들이군.”

원주 아버지가 크게 감탄했다. 원주 어머니가 신원주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들, 친구한테 좀 배워야겠네.”

“아~ 엄마!”

신원주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원주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강우가 원주의 아버지를 향해 정중히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 두 회사의 정보를 좀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투덕거리던 신원주와 원주의 어머니가 놀란 눈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이거 우리 아들 친구가 아주 남자답고 대범하구나.”

강우의 직설적인 부탁에 원주 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었다. 기억 속 원주의 아버지는 남자다운 성격이었다. 빙빙 돌리거나 머뭇거리는 것보다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맞았다.

‘부탁하는 김에 제대로 하자.’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신원주의 방으로 뛰어가 가방에서 아버지의 이력서를 꺼내왔다.

“아버지의 이력서입니다.”

강우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이력서를 내밀었다. 원주 아버지의 호기심이 점점 짙어졌다.

“내가 잠깐 봐도 될까?”

“네.”

강우가 이력서를 앞쪽으로 내밀었다. 이력서를 받아든 원주의 아버지가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그리고는 점점 감탄하기 시작했다.

“대단하시구나. 어찌 이런 분이 직장을···. 아니 이런 능력을 갖추셨으니 젊어서부터 사업을 하실 생각을 했겠구나.”

“네.”

강우가 차오르는 씁쓸함을 밀어냈다. 아버지의 사업에 대한 집착은 이상할 정도였다.

“그래, 원주 친구 아버님의 일인데 힘 좀 써보마. 그런데 괜찮을까?”

원주 아버지가 살짝 말끝을 흐렸다. 아마 강우 아버지가 불쾌해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지금은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아닙니다. 아버지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럼, 내가 내일 학교에 나가 좀 알아보마.”

강우가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경영학 교수인 원주의 아버지는 재계에 인맥이 넓었다. 두 회사의 정보를 찾는 것은 물론이고 원주의 아버지를 통해 이력서까지 들어간다면 금상첨화였다.

“그럼 이력서는 필요하실지 모르니 가지고 계셔도 됩니다.”

“그러자꾸나.”

원주 아버지가 이력서를 챙겨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이윽고 서재에서 나온 원주 아버지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뭉치가 들려있었다.

탁.

원주의 아버지가 서류 봉투를 강우의 앞쪽으로 내려놓았다.

“안에 든 내용을 한번 보거라.”

“네.”

강우가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온통 영어로 된 문서들이었다. 원주의 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다.

“방학 동안 시간이 된다면 나를 좀 도와주면 어떨까? 내가 아르바이트비는 섭섭지 않게 주마.”

“아르바이트 말입니까?”

“그래, 미국에 있는 중견기업들을 조사하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해볼 생각이 있니?”

강우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대박이다. 인터넷도 마음껏 사용하고 돈까지 벌 기회.’

그렇지 않아도 돈이 필요한 강우 가족이 아니던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강우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르바이트 제가 하겠습니다.”

* * *

다음 날, 강우가 신원주의 집을 나섰다.

“안녕히 계세요.”

“좀 더 놀다 가도 되는데.”

원주의 어머니가 아쉬운 듯 강우를 붙들었다. 신원주가 실소를 흘렸다.

“엄마, 학교 갈 시간이라고.”

“그래, 잘 다녀오고. 강우 집에 자주 데리고 와.”

신원주의 어머니는 강우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깍듯한 예의범절은 물론이고 인상 또한 귀티가 흘렀다. 그리고 어제 보여준 나이답지 않은 어른스러움도 너무 좋았다.

“강우야, 언제든지 부담 갖지 말고 놀러 와. 알겠지?”

“네, 어머님.”

강우가 호칭까지 바꾸며 부드럽게 웃었다. 원주의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신원주가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와? 넉살 보게?”

“친구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나 다름없지.”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신원주가 강우를 끌어당겼다. 더 놔뒀다가는 아들 자리 빼앗길까 싶었다.

“가자.”

“알겠어”

강우가 마지막으로 원주 어머니를 향해 꾸벅 인사한 뒤 엘리베이터에 탔다.

* * *

-이번에 내리실 역은 부평. 부평역입니다.-

강우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출퇴근 시간을 피한 덕분에 앉아올 수가 있었다. 문이 열리고 내려선 강우가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가방 안에는 원주 어머니가 챙겨준 먹을 것들이 가득했다.

‘빨리 가서 강용이 줘야겠다.’

역사를 벗어나자 널찍한 부평역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먼 미래의 기억과는 다른 듯 비슷한 모습이었다. 강우가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쨍그랑.

버스에 올라탄 강우가 버스 요금을 냈다. 기사가 슬쩍 강우를 보더니, 다음 승객에게 시선을 돌렸다. 버스 안은 한산했다. 강우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가 출발하자 강우가 창문에 머리를 대고 생각에 잠겼다.

‘방학 동안 할 일이 너무 많다.’

일단 아버지의 취업 문제를 마무리해야 했다. 원주 아버지가 도와주신다고 했으니 이제 아버지를 잘 설득할 일만 남았다.

‘오늘 가서 곧장 이야기를 꺼내야겠어.’

또 다른 문제는 당장 현실이었다. 강우 가족에게 남은 돈이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취업을 하게 돼도 첫 월급까지 기간이 있다.’

기억 속의 강우 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공사장을 다녔다. 원래대로 한동냉장에 취업하기 전까지 말이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는 취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한동안 버틸 돈이 필요해.’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곧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섭섭지 않게 돈을 주신다고 했으니까. 당분간은 그 돈으로 버티자.’

그 아르바이트 말고도 방학 동안 돈을 벌 방법은 많았다. 기억 속의 강우는 방학 내내 놀고먹기 바빴다. 어려운 가정사를 회피하듯 말이다.

‘한심한 놈. 뭐라도 했어야지.’

하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강우는 가족을 위해서 하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강우가 내릴 곳이 되었다.

‘아차차.’

삐이이.

급하게 벨을 누르자 기사가 백미러로 슬쩍 강우를 쳐다봤다. 버스가 정류장에 서고 뒷문이 열렸다.

턱.

버스에서 내리자 버스가 급하게 출발을 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작은 슈퍼마켓이 보였다. 강우가 걸음을 옮겨 가게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강우가 인사를 하자 슈퍼마켓을 지키던 주인이 반갑게 웃었다.

“어서 와. 학생.”

강우가 안쪽으로 들어가 과자 몇 봉지를 챙겼다. 모두 강용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옆쪽을 힐끗 보자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컵라면도 보였다. 강우가 슬쩍 컵라면 몇 개를 챙겼다.

“계산이요.”

잠시 후,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온 강우가 건널목에 섰다. 건너편으로 장미여관의 건물이 살짝 보였다. 며칠 지냈다고 익숙한 감정이 들며 마음이 안정되었다.

‘집이라는 게 따로 있나 가족이 모여 있으면 그게 집이지.’

신호등이 보행 신호로 바뀌고 강우가 뛰듯이 건널목을 건넜다.

딸랑.

장미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강우가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쾅. 쾅.

“강용아, 엄마.”

덜컥.

문이 열리고 강우 어머니의 얼굴이 나타났다. 살짝 화가 난듯한 모습이었다.

“아들!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네?”

강우가 살짝 당황했다. 그리고는 아차 싶었다.

‘다시 전화하는 걸 까먹었네.’

그리고 강용이가 자신의 말을 전하는 것도 까먹은 게 분명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친구네 집에서 자고 왔어요. 연락 못 해서 죄송해요.”

“친구?”

강우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새 화가 누그러진 강우의 어머니가 가방을 받아들었다.

“네, 원주네 집에서 자고 오느라 그랬어요.”

“그럼 전화라도 좀 하지.”

순간, 했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한쪽에서 강용이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우가 픽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한다고 생각은 했는데 깜빡했네요.”

“다음부터는 어디 가면 꼭 알려주고 가. 알겠지?”

“네.”

그렇게 별 탈 없이 일이 마무리되었다. 강용이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강우가 강용에게 다가가 슬쩍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요 녀석.”

“헤헤~ 미안해 형아.”

부드럽게 웃은 강우가 먹을 것을 떠올리고는 재빨리 가방을 열었다.

“이거 먹어.”

강우의 가방에서 먹을 것이 잔뜩 쏟아져 나왔다. 강용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와! 바나나!”

원주 어머니가 싸준 것 중에는 과일도 있었다. 강용이 신이 나서 먹을 것을 먹기 시작했다. 동생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니 강우의 기분이 좋아졌다. 힐끗 봉지에 담긴 과자를 바라본 강우가 또다시 약한 거부감을 느꼈다.

‘음. 이건 안 줘도 되겠네.’

강우가 과자를 슬쩍 가방에 다시 담았다. 그렇게 강용에게 먹을 것을 준 강우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빠는요?”

“응.”

강우 어머니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빠는 일당 일 나가셨어.”

강우 어머니의 좋지 못한 표정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동 냉장은요?”

“몰라···. 갑자기 별로라고 하시네.”

어머니의 표정이 좋지 못했지만, 강우는 내심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로써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이 더 쉬워졌다고 생각했다.

‘이제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만 남았다.’

강우가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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