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402)

함께 즐겨요

늦은 밤. 강우와 이재원이 오성맨션의 앞쪽으로 서 있었다. 따듯한 봄 날씨의 산뜻한 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토닥이며 지나갔다.

“오늘 진짜 즐거웠다.”

이재원이 약간 취한 듯 비틀거리며 말했다. 강우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길래, 못하는 술 받아먹지 말라니까요.”

“아버님이 주시는데 어떻게 안 받아.”

이재원이 몸을 살짝 떨었다. 추위보다는 취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기분이 좋으셨나 봐요. 집에서는 어지간하면 술을 안 드시는데.”

“같이 좋아해 주셔서 내가 오히려 감사했지.”

뉴스가 나오고 강우 아버지와 어머니는 손뼉을 치며 좋아하셨다. 강우를 마주 보고 미소 짓던 이재원이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곧 이재원에게 축하를 건넸다.

“형 이야기 다 해서 기분 안 나빴어요?”

“아니, 전혀. 나는 그런 말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게 더 부럽다.”

강우가 물끄러미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강우의 시선을 느낀 이재원이 스르륵 고개를 돌려 강우의 시선을 마주했다.

“처음이었어. 내가 뭐를 해냈는데 그렇게 축하받은 거.”

이재원의 얼굴에 씁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침묵하던 이재원이 긴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조금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 사실 어렸을 적에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엄마가 나를 낳고 많이 힘들었나 봐. 좀 크고 나서는 엄마랑 가끔 어디를 가긴 했어. 그런데 주변 시선 때문인지 엄마는 나를 항상 조카라고 하셨지.”

“아···. 그래서 그날도.”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버릇처럼 이모라는 말이 튀어나왔지. 오랜만이셨을 거야.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독립해서 혼자 살았거든.”

“덕분에 형에 대해 더 알게 됐으니까 잘된 거죠.”

“그런가?”

이재원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강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강우야, 고맙다. 덕분에 가족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느꼈어. 그리고 내가 얼마나 엄마를 사랑하는지도 느꼈어.”

“당연하죠. 하나밖에 없는 가족일 텐데.”

“난 반드시 우리 엄마에게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아 줄 거야.”

“.....”

강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원이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나한테 유일한 아군은 바로 너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나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에요.”

그때, 멀리서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재원의 차량이었다.

“그래서 더 무섭다니까? 나중에 크면 뭐가 되려고 그러냐.”

“뭐라고요?”

강우와 이재원이 픽하고 웃었다. 이윽고 고급 세단이 집 앞에 멈춰 섰다.

탁.

문이 열리고 중년 남성이 내렸다. 강우를 향해 살짝 목인사를 한 중년 남성이 이재원에게 다가왔다.

“도련님, 모시겠습니다.”

“아저씨. 쉬고 계셨을 텐데. 미안해요.”

“아닙니다. 대기 중이었습니다.”

이재원이 강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간다. 내일 차 가지러 올게.”

“네, 그래요.”

강우네 집의 주차장에는 이재원의 스포츠카가 주차되어 있었다. 이재원이 차에 올라타자 중년 남성이 운전석에 앉았다.

지이잉.

“간다. 부모님께 오늘 너무 감사했다고 전해줘.”

“네.”

그 말을 끝으로 차량이 부드럽게 출발했다. 잠시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우가 집으로 돌아갔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머니가 한참 주방을 정리 중이셨다. 힐끗 거실을 보자 아버지는 누워 잠들어 계셨고, 강용도 아버지의 배 위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잘 갔니?”

어머니가 주방을 정리하며 물으셨다. 강우가 쓱 다가가 식탁 위에 있는 그릇들을 정리했다.

“네, 잘 갔어요. 형이 오늘 감사했다고 전해달래요.”

“감사는 무슨. 같이 밥 먹은 거 가지고.”

어머니가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어머니는 요리하는 걸 참 좋아하셨다. 그래서 틈만 나면 자식들의 친구들을 불러 맛있는 걸 해주시고는 했다. 물론 기억 속 미래의 일이었다.

‘그동안은 그럴 여유도 없었지.’

달그락. 달그락.

어머니가 설거지를 시작하셨다. 강우가 옆에서 어머니의 말동무가 되어 드렸다.

“재원이가 얼굴에 그늘이 있더라. 네가 정말 동생처럼 살뜰히 챙겨.”

“네, 그럴게요.”

“집에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라고 하고.”

“그렇지 않아도 밥 생각나면 자주 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잘했네.”

어머니가 기분이 좋으신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재원이 어머니 밑에서 혼자 자란 것에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어머니였다. 이윽고 설거지가 끝나고 어머니가 강용을 품에 안으셨다.

“강우야, 아빠 이불 좀 덮어 드려.”

“네.”

어머니가 강용을 안고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강용이 뒤척이며 잠꼬대를 했다.

“으음···. 조이드 좋아.”

강우가 픽하고 웃으며 안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 아버지를 덮어드렸다. 아버지가 몸을 뒤척이시더니 이내 이불을 끌어 앉으셨다.

* * *

다음 날 아침. 거실에 나온 강우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 아버지, 어디 가세요?”

아버지가 거실에서 배낭을 싸고 계셨다. 배낭을 싸고 계시던 아버지가 강우를 보더니 반가워하셨다.

“어, 아빠 산에 좀 갔다 오려고.”

“산이요?”

“응, 다음 주에 마사토가 한국에 온다고 했거든. 그때 같이 등산 가기로 했는데 아빠가 한동안 산을 못 갔잖아. 미리미리 감을 익혀 놔야지.”

아버지의 얼굴로 승부욕이 떠올랐다. 강우가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설마 암벽 등반은 아니겠죠?”

“암벽 등반? 에이~ 아빠 나이가 있는데 이제 못하지.”

아버지가 물끄러미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셨다. 불룩 튀어나온 배에는 세월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허벅지는 아직도 두툼했다. 팔뚝에도 근육이 가득하셨다. 아버지가 잠시 추억에 빠지셨다.

“아빠가 왕년에는 도봉산 날다람쥐였는데 말이야.”

“날다람쥐요?”

강우가 살짝 웃어버렸다. 아버지도 피식하고 웃으셨다. 아버지가 속한 산악회는 그 당시 이름을 날렸던 곳이라고 했다. 도봉산과 설악산 등반 루트 중 아버지가 속한 산악회가 개척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라고도 하셨다.

“너, 아빠 젊었을 적 사진 봤잖아.”

“아···. 그랬었나요.”

“사진이 어디 있더라.”

아버지가 신이 나서 앨범을 찾으려 했다. 때마침 안방에서 나오던 어머니가 앨범의 향방을 알려주셨다.

“그거, 아버님 집에 맡겨 놨잖아요.”

“아···. 그랬지.”

아버지가 살짝 실망하는 표정을 지으셨다. 자신의 왕년을 아들에게 자랑하고 싶으셨다.

“다음에 같이 한번 가요.”

“그래, 꼭 약속하는 거다?”

“네.”

강우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기억 속 미래의 강우는 등산을 참 싫어했다. 틀어진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일지도 몰랐다. 기억 속에도 아버지는 종종 등산을 같이하자고 했지만, 강우는 늘 거절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강우는 달랐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을 줄 아는 강우였다.

“오랜만에 가는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올라갔다가 오세요.”

“응, 알겠어.”

아버지가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버지가 상기된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갔다 올게.”

강우와 어머니가 아버지를 배웅했다. 어린 강용은 어젯밤 늦게 잔 탓에 아직 꿈나라였다.

덜컥.

문이 열리자 현관이 시끄러워졌다.

“어? 재원이구나?”

벨을 누르려던 이재원이 깜짝 놀랐는지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내 아버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아버지, 어디 가세요?”

“등산 가려고. 안에 강우 있다 들어가 봐.”

“네, 다녀오세요.”

이윽고 아버지가 문을 나서시고 이재원이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강우를 불렀다.

“강우야, 나왔다.”

강우가 현관으로 나가자 부스스한 얼굴의 이재원이 씨익 웃고 있었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도 술 안 깼어요?”

“아니, 어제 회장님이랑 술 한잔했다.”

“그래요?”

강우가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재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가 등산을 좋아하시나 봐?”

“네, 젊었을 적에는 암벽 등반도 하셨어요.”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어쩐지 허벅지랑 팔뚝이 장난이 아니시더라.”

“힘도 장사에요. 아직도 냉장고는 혼자 번쩍 드실걸요?”

“으으···. 역시 유전이었어.”

이재원이 강우의 덩치를 위아래로 훑으며 부러워했다. 이재원은 170 중반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였다. 체격도 마른 편이었다. 강용이 연예인이라고 외친 이유가 있었다.

“대신 형은 잘생겼잖아요.”

“흠흠···. 내가 좀 생겼지.”

강우가 피식 웃었다. 대화가 길어질 듯싶어지자 강우가 이재원에게 안으로 들어오라 권했다. 이재원이 기다렸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 있던 어머니가 이재원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와요. 하루 만에 또 보내.”

“앞으로 틈만 나면 찾아올 생각입니다.”

이재원의 넉살에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나야 좋지.”

강우가 이재원을 거실로 안내했다. 두 사람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어제 어떻게 됐어요?”

“난리 났지. 큰형이랑 둘째 형이 집에 오자마자 나 잡아먹겠다고. 어휴~”

이재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강우가 눈을 빛냈다.

“아버지 반응은요?”

“뭐···. 신 교수님까지 나서서 잔뜩 겁을 주니까 한발 물러서기는 하셨지. 원래 회장님이 가방끈이 짧아서 배운 사람 말이라면 껌뻑 죽어.”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철금 회장은 상고 출신이었다. 맨몸으로 신화를 이룩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늘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인물이었다.

‘문제는 불도저처럼 밀고 가는 건 좋은데 지뢰까지 다 밟고 지나갈 위험이 있다는 거지.’

한동안은 문제가 없었다. 한국 경제가 호황이었으니까.

“다행이네요. 그래도 난 진짜 해낼 줄 몰랐는데.”

“뭐? 이놈이? 나는 진짜 네 말만 믿고 도박을 했는데.”

“농담이에요 농담.”

이재원이 긴 숨을 뱉어냈다. 그동안의 긴장감이 모두 사라진듯한 표정이었다.

“나보고 마음에 드는 곳 한곳 고르라던데.”

“마음에 드는 곳이요?”

“대단한 건 아니고 회장님이 원래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마인드라. 계열사 중에 한 군데로 출근하라는 거지.”

“학교는요?”

“휴학해야지. 지금은 공부보다 먼저 내 능력을 입증할 때야.”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자. 나 당분간 바빠질 거 같아.”

“형, 이왕이면 대진 미디어 쪽으로 생각해봐요.”

이재원의 눈에 이채가 떴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원이 주방의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어머니, 저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또 된장찌개 먹으러 오겠습니다.”

“왜? 밥 먹고 가지?”

주방에 있던 어머니가 이재원의 말에 답하셨다.

“아닙니다! 오늘은 그냥 가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꼭 놀러와.”

“네, 어머니.”

이재원이 강우의 어깨를 툭 쳤다.

“나 진짜 간다.”

“네.”

몸을 돌리던 이재원이 아차 싶은지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강우야, 내일 학교에 가서 놀라지 마라.”

“네?”

강우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사이 이재원이 손을 흔들며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이윽고 스포츠카의 엔진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멀어져갔다.

‘뭐를 놀라지 말라는 거야?’

강우가 고개를 영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밖의 소란스러움 때문인지 강용이 눈을 비비며 안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양손에는 조이드 장난감을 든 채였다,

“재원이 형, 왔어?”

“응, 왔다가 금세 갔어.”

강용의 얼굴에 작은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 * *

월요일 아침. 교실 문이 열리고 강우가 들어섰다. 얼굴 가득한 피로감은 일요일 내내 강용과 놀아준 덕분이었다.

“흐암···.”

작게 하품을 한 강우가 자리에 앉았다. 신원주 역시 주말 내내 무엇을 했는지 꾸벅 졸고 있었다.

“야.”

강우가 툭하고 치자 신원주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고 담임이 들어섰다.

“박강우!”

담임이 강우의 이름을 힘주어 불렀다. 강우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잘 먹으마.”

“네?”

강우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 순간 열린 교실의 문으로 주번이 들어섰다. 주번들은 양손에 빨간색 모자가 그려진 피자 박스를 잔뜩 들고 있었다.

“강우야, 잘 먹을게.”

“강우 멋지다!”

반 친구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순간, 전교생의 인원을 묻던 이재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장난기 가득한 어제의 얼굴도 떠올랐다.

“마···. 맙소사.”

강우의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교실의 상단에 달린 스피커에서 교감 선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교감입니다. 오늘은 2학년 1반. 박강우 학생의 사촌 형께서 박강우 군의 반 1등을 기념해 2학년 여러분에게 간식을 제공했습니다. 다들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고 열심히 공부를···.-

빠르게 다가가 박스를 확인한 강우가 비틀거렸다.

-경축. 내 동생 박강우 2-1반 1등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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