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아, 울지마.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 무렵. 오성맨션의 앞으로 택시 한 대가 들어섰다. 문이 열리고 강우와 강용이가 내렸다.
“아저씨, 트렁크 좀 열어주세요.”
“그래.”
택시의 트렁크가 열리자 강용이가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는 끙끙대며 작은 캐리어 하나를 꺼냈다. 돌아오는 길에 짐이 늘어 구매한 강용이의 캐리어였다.
“강용아, 형아가 할게.”
“아니야. 이건 내가 할 수 있어.”
강우가 씩 웃으며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꺼냈다.
탁.
트렁크를 닫자 택시기사가 차를 출발시켰다. 캐리어 두 개를 양손에 든 강우가 고개를 돌렸다. 며칠 만에 돌아온 집이었다.
덜컥.
문이 열리고 강우가 현관으로 들어섰다. 가족 모두가 자리를 비운 집 안은 고요함에 빠져있었다. 강우가 커다란 캐리어를 두 개를 번쩍 들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강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캐리어를 들고 끙끙대고 있었다.
“형아가 들고 온다니까.”
“나도 들 수 있어.”
강우가 작은 캐리어를 가지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형아, 엄마랑 아빠는 언제 와?”
“좀 늦으실 거야.”
아버지와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집에다 모셔드리러 간 상태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집으로 모셔 오려 했다. 여행의 피로감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으신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극구 거절하셨다. 본인이 머무는 집이 편하시다고 하셨다.
“일단 형아는 짐부터 정리할 테니까. 강용이는 쉬고 있어.”
“나도 도울래.”
강우와 강용이 캐리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강용이의 캐리어였다.
찌이익.
지퍼가 열리는 소리가 나고 작은 캐리어가 양쪽으로 입을 벌렸다. 그곳에는 강용이의 전리품인 미니카와 부품들이 들어있었다.
“으아~ 좋아.”
강용이의 입꼬리가 귀에 걸쳤다. 플라스틱 박스를 품에 안으며 행복해했다.
“그렇게 좋아?”
“응,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어.”
방학이었지만, 초등학생들의 놀이터야 뻔한 시대였다. 피시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로 학교 운동장이나 근처 문방구가 주요 놀이터였다.
“내일 찬우가 나올까?”
“있을 거야. 맨날 자기가 이기니까 하루도 안 빠지고 문방구에서 살아.”
강용이의 두 눈에 전운이 감돌았다. 강우가 픽 웃으며 강용이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강용이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형아, 빨리 정리하고 우리도 쉬자.”
“그래.”
따르릉.
그때, 전화기가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강용이가 벌떡 일어나서는 전화기로 달려갔다.
“여보세요? 아빠? 형아요?”
강용이가 수화기를 내밀었다.
“네, 아버지.”
-강우야, 할아버지가 몸이 좀 편찮으시구나. 아무래도 오늘은 아빠랑 엄마가 여기 있어야 할 거 같다.-
“할아버지 많이 아프세요?”
-모르겠어. 좀 주무시면 괜찮을 거라고 하시네···.-
“알겠어요. 강용이는 제가 잘 보고 있을게요. 걱정하지 말고 있다가 오세요.”
-그래, 우리 장남 든든하다. 저녁은 강용이랑 둘이 시켜 먹어.-
“네.”
통화가 끝나고 강우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형아, 나도 졸리다. 빨리 씻고 자자.”
“욕탕에 물 받아줄까?”
“응!”
강우가 욕탕에 물을 가득 받았다. 뜨거운 수증기가 욕실을 가득 메울 무렵 강용이가 나타났다. 홀딱 벗은 채였다.
“형아도 같이하자.”
“그래.”
강우와 강용이가 욕탕에 들어갔다. 물이 출렁이며 밖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강용이는 제법 컸는지 더는 휘청거리지 않았다.
“으아···. 좋다.”
강우가 긴 탄성을 뱉어냈다. 따듯한 욕조의 물과 익숙한 화장실의 냄새가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콸콸.
수도꼭지가 계속해서 뜨거운 물을 보충해 주었다. 강우와 강용이는 한참을 욕조 속에서 있었다.
“이제 좀 씻자.”
“엉.”
강우와 강용이가 욕탕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열심히 몸에 비누칠하기 시작했다. 강용이의 머리를 감겨주는 것은 형아인 강우의 담당이었다.
“으아아! 눈! 눈!”
강용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강우가 샤워기를 틀어 얼른 비누를 씻겨내 주었다. 강용이가 살겠다는 듯 짧게 한숨을 쉬었다.
“휴···. 살았다.”
이윽고 강우도 샤워를 끝냈다. 화장실의 문을 열자 진한 수증기가 안개처럼 뭉게뭉게 밀려 나왔다. 그리고 양 볼이 벌게진 강용이가 스윽 나타났다.
“아~ 시원하다~”
강용이가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어른 흉내를 냈다. 그 순간, 강용이의 코에서 콧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강우가 수건으로 강용이의 몸을 감싸주었다.
“감기 걸린다. 빨리 옷 입어.”
“어. 형아.”
강용이가 옷이 있는 자기 방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야야! 뛰지···.”
“아이코!”
발바닥의 물기 때문에 강용이 미끈하더니 엉덩방아를 찧었다. 강우가 빠르게 다가가 강용이를 일으켜 주었다.
“괜찮아?”
“어어.”
강용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옷 입혀줄까?”
“나 2학년이거든?”
강우가 픽 웃었다. 아직도 엄마 품에서 자면서 말은 잘했다. 강우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강우와 강용이 옷을 갈아입고 거실에 모였다.
“형아, 빨리.”
“어.”
강우가 한쪽에 놓인 엔조이 스테이션의 박스를 가지고 거실에 앉았다. 강용이는 소파로 폴짝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강우가 박스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새것의 냄새가 물신 코를 찔렀다. 강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어디 보자.”
본체를 꺼내고 텔레비전에 연결했다. 강우가 선택한 게임 타이틀은 하이퍼 로봇 대전이었다. 기억 속 강용이 제일 좋아했던 시리즈물이었다. 물론 강우도 좋아했다. 애초에 강용이가 좋아하는 게임은 강우의 취향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으으···. 재밌겠다.”
강용이가 기대감에 찬 소리를 냈다. 강우가 전원을 켜자 익숙한 로고가 떠올랐다. 그 순간, 전화벨 소리가 다시 울렸다.
따르릉.
강우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강우냐? 언제 왔어?-
강우가 픽 웃었다. 이재원의 목소리였다.
“조금 전에요.”
-그래? 밥은 먹었냐? 나 회사 끝나고 밥도 못 먹었는데 어머니 밥 좀 얻어먹으러 가자.-
“집에 엄마 없어요.”
이재원이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됐다.
-아···. 그래?-
“네, 내일 집에 오신다니까 내일 와요. 그럼.”
-그래? 그럼 아버지랑 술 한잔하러 갈까?-
“아버지도 없어요.”
이재원이 화들짝 놀라더니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됐다.
-어? 그럼 너랑 강용이만 집에 있어? 무슨 일 있냐?-
“그건 아니고요.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자고 오신대요.”
-음···. 안 되겠네. 밥 먹지 말고 기다려봐.-
“네?”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전화가 툭 끊어졌다. 강우가 피식 웃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강우가 게임을 시작했다.
“와! 로봇들이다.”
강용이가 게임 화면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잠시 후, 강용이가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형아, 나 배고파.”
“어? 배고파?”
힐끗 시계를 보니 저녁 시간이 지나있었다.
“재원이 형이 먹을 거 사 온대. 조금만 기다려 보자.”
“어? 진짜? 재원이 형 와?”
강용이가 기대감에 차올랐다. 이재원을 참 좋아하는 강용이였다.
그때였다.
딩동. 딩동.
인터폰을 확인한 강우가 피식 웃었다. 참 한결같이 양반은 못 되는 이재원이었다. 덜컥 문을 열자 이재원이 씨익 웃고 있었다. 양손에는 피자 박스가 들려있었다.
“왔어요?”
“피자 사 왔지.”
이재원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강용이가 이재원을 향해 달려와 와락 안겼다.
“재원이 형!”
“아이쿠. 우리 강용이.”
이재원이 강용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강용이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형, 우리 일본 갔다 왔다!”
“그래그래. 잘 놀다 왔어?”
이재원이 강용이를 내려놓았다. 강용이가 소파 옆에 있는 미니카 박스를 자랑했다.
“네! 형아가 미니카도 엄청나게 사줬어.”
“우와? 좋겠네? 그런데 내 선물은?”
이재원의 심각한 표정에 강용이가 움찔했다. 강우가 피식 웃었다.
“애한테 실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무슨 재벌 2세가 선물을 바래요.”
“나도 사람이다.”
강우가 한숨을 푹 쉬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기다려봐요.”
그리고는 가방에서 작은 열쇠고리를 가지고 나왔다.
“자요. 이걸로 만족해요.”
“오? 선물! 자식 그럴 줄 알았다.”
이재원이 열쇠고리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차 키를 꺼내 대번에 연결했다. 강용이가 피자 박스를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우와! 피자에요?”
“어, 우리 강용이 줄라고 사 왔지.”
“재원이 형이 짱이야.”
강우가 교자상을 꺼내 거실의 중앙에 펼쳐 놓았다. 강우가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피곤할 텐데 집에서 쉬지 뭐 하러 왔어요?”
“어허. 어린 동생들 둘만 집에 있는데, 이 큰형이 걱정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하?”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이재원이 씨익 웃으며 피자 박스를 열었다. 향긋한 치즈 냄새가 방안에 가득 찼다.
“배고프지? 일단 먹자.”
강용이가 침을 꿀꺽 삼키며 상 앞에 앉았다. 이재원이 피자를 한 조각 뜯어 강용이에게 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강용이가 피자를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이재원이 힐끗 게임기를 바라보았다.
“게임기 샀어?”
“네, 일본 가서 사 왔어요.”
“게임 할 시간이 있냐? 서울대 가야지.”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그러자 강용이가 입안 가득 피자를 오물거리며 말했다.
“우리 형아, 전교 5등 했어요.”
“어? 진짜?”
한동안 바빠 강우의 성적은 확인도 못 한 이재원이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공부에 지장 없을 정도만 하려고요.”
“하긴···. 너 같은 괴물을 쓸데없이 걱정할 필요가 없지.”
피자를 다 먹고 강우는 게임을 시작했다. 이재원과 강용이는 소파에 앉아 게임을 구경했다.
“야. 다음에는 같이하는 게임 좀 사놔 봐.”
“게임 할 시간이 없다며요.?”
이재원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패드도 한 개 더 사놓고.”
“하?”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그때, 문밖으로 귓가를 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강우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밖이 더욱더 소란스러워졌다. 이재원이 베란다로 다가갔다.
“구급차네? 무슨 일 났나?”
“혹시 옆집 아줌마 때문에 그런가?”
이재원이 강우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옆집?”
“네, 옆집에 새댁 아줌마가 사는데 만삭이라고 했거든요.”
강우가 물끄러미 문 쪽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재질의 배란차 창문 너머로 번쩍이는 구급차의 불빛이 보였다.
‘윽···.’
순간,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지더니 기억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맙소사···.’
기억을 떠올린 강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는 강용이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미열이 느껴졌다.
“강용아···.”
미래의 기억 속 강용은 많이 아팠다. 어릴 적 걸린 신장병으로 평생을 고생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 병이 발병한 것은 지금이 아닌 훨씬 오래전이었다.
‘분명 장미여관에 있을 때 발병을 해야 했어.’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 고열에 시달리던 강용이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던 날을 말이다. 그리고 그 후부터였다. 강용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병마와 사투를 벌였다.
‘지금으로서는 어떤 병인인지도 모르는 병이다.’
강우 가족에게 닥쳐온 엄청난 시련이었다. 시작부터 잘못됐었다. 오랜 시간 방치된 강용의 병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의사들도 방법을 찾지 못했었지.’
미지의 병을 두고 의사들이 어떤 방법이 있었겠는가. 의사들은 전지전능한 치유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부터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강용을 간호하기 위해 매달리셨다.
‘아버지가 중국 쪽 물건의 검수에 잠깐 소홀해졌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자식의 병마 앞에 아버지도 어머니도 정신없는 세월을 보낸 것이다. 강우가 가쁜 숨을 정돈했다. 어째서인지 강용은 아직 발병하지 않은 상태였다. 달라진 주변의 환경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동안 강우가 조금씩 관리하던 식단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먼 미래의 기억 속에서 강우 가족에게 한으로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
‘조금 더 일찍 병원을 갔더라면. 고열을 방치하지 않았더라면···.’
강용이의 미래는 바뀌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 강우에게는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강우가 강용이의 몸 이곳저곳을 마구 만졌다.
“아픈 데 없어? 옆구리는 어때?”
강우가 강용의 등 쪽 옆구리를 꽉 눌렀다. 그러자 강용이 깜짝 놀랐다.
“아야! 아파!”
강우의 얼굴이 굳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도 강용은 늘 옆구리를 아파했다.
‘멍청아. 이렇게 중요한걸. 이제야 기억해내면 어쩌자는 거야.’
그동안 오직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달려온 강우였다. 그리고 가족의 행복은 오직 돈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강우의 눈에서 눈물이 뚝 흘렀다.
“강용아, 형이 너무 늦어서 미안해. 빨리 옷 입어. 형이랑 병원에 가자.”
강용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강우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형아, 울지마. 나 이제 안 아플 게.”
강용이가 강우를 꼭 안아주었다. 어린 강용이는 형아가 우는 것이 싫었나 보다.
“강우야, 왜 그래? 강용이가 왜?”
이재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강우가 스윽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형, 지금 병원에 좀 가야겠어요.”
“병원? 이 시간에?”
“네, 응급실로요.”
이재원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나가서 시동 걸어놓을게 준비하고 나와.”
“네.”
이재원이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갔다.
“강용아, 빨리 옷 챙겨입어.”
“으응···.”
강용이가 방으로 들어갔다. 강우가 굳은 얼굴로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달칵 전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랬다. 강우가 떠올린 기억은 강용이의 기억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