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안 봤다.
“형아!”
강용이의 목소리에 강우가 눈을 떴다. 강우의 얼굴 위로 강용이의 얼굴이 떠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는 강용이의 머리는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강우가 쓱쓱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 강용아.”
“빨리 일어나 오늘 시험 보러 가잖아.”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아, 깨워주려고 밤잠 설쳤구나?”
“으응···.”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강용이는 굉장히 예민한 스타일이었다. 작은 소리에도 잠에서 깰 만큼 말이다. 그런 강용이가 오늘 강우의 시험 때문에 긴장했나 보다.
“걱정하지 마. 형아, 가서 시험 잘 보고 올 거니까.”
“응, 우리 형아가 1등 할 거야.”
“그래그래.”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쭈욱 기지개를 켰다. 온몸이 날아갈 것 같이 가벼웠다. 강우가 씨익 웃었다. 컨디션도 기분도 최고였다.
달칵.
문을 열고 나가니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우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뜨거운 물로 한참을 씻고 나니 정신이 또렷해졌다. 방으로 간 강우가 가장 편한 옷을 챙겨입었다. 몇 벌 안 되는 옷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편한 옷이었다. 주방으로 나오니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고 계셨다.
“와···.”
보온 도시락에 반찬이 꽉꽉 눌러 담아지고 있었다. 강우가 슬쩍 어머니의 옆으로 다가갔다.
“강우, 아침 먹을래?”
“아니요, 그런데 도시락 반찬 너무 많이 싸주시는 거 아니에요?”
“그래? 긴장돼서 못 먹을 거 같아?”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엄마 아들 긴장하는 거 봤어요?”
“그렇지? 멀쩡하지?”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그때, 안방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나왔다. 아버지는 나갈 채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강우야, 시간 괜찮겠냐?”
강우가 슬쩍 시계를 확인했다. 강우가 수능을 치를 목일 고등학교는 집에서 30분 거리였다.
“이제 나가야겠네요.”
“어머? 그래?”
어머니의 손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딸칵 소리와 함께 도시락이 완성됐다. 강우가 가방 안에 도시락을 넣고 최종점검을 했다.
‘완벽해.’
강우가 가방을 둘러멨다. 어머니가 다가와 강우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아들, 잘할 수 있지? 엄마 믿어.”
“네,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강우가 어머니를 꽉 안아주었다. 그동안 수험생 뒷바라지에 새벽같이 일어나던 어머니였다. 강우의 고등학교 생활은 어머니도 함께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강우야,”
할아버지가 방에서 나오셨다. 그리고는 강우에게 다가와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낡은 가죽끈이 달린 손목시계를 건네주었다.
“이건 할아비가 가장 아끼는 손목시계다. 오늘 가지고 가서 시험 시간 확인하는 데 쓰거라.”
“감사합니다.”
강우가 물끄러미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낡은 가죽끈에는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어있었다. 강우가 시계를 소중히 품에 넣었다. 할아버지의 두 눈에는 장손에 대한 대견함이 가득했다.
“시험 잘 보고 오거라.”
“네, 할아버지.”
아버지는 벌써 현관에 계셨다. 강우가 현관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손을 들어 강우의 머리를 향하다가 멈칫했다. 오늘 하루는 그냥 편하게 놔두고 싶었나 보다.
“아들, 가자.”
“네.”
밖으로 나온 강우가 아버지의 차에 올라탔다. 아들을 위해 아침 일찍 데워놓은 차 안은 따듯했다. 아버지가 강우의 의자를 뒤로 젖혀주었다.
“가는 동안 눈 좀 붙이든지 해.”
“아니에요. 컨디션 좋아요.”
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아들의 수능을 앞두고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평소보다 한산한 도로를 지나 강우와 아버지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목일 고등학교-
학교 건물에 붙어있는 커다란 금속 한자에 강우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기억 속 강우의 첫 수능도 바로 이곳이었다. 교문 앞을 슬쩍 바라보니 수험생들이 속속 입장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차를 교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세웠다.
“강우야, 다 왔다.”
“네, 아버지.”
강우가 안전띠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아버지가 긴장한 표정으로 강우를 향해 말했다.
“아들, 아빠는 성적이 중요한 게 아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알겠지?”
“네, 아버지.”
아버지가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에는 강우를 향한 믿음도 담겨있었다.
“시험 끝날 시간 맞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오늘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네.”
강우가 씨익 웃고는 교문을 향해 갔다. 교문 앞으로는 학부모들이 간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각자의 종교를 상징하는 물건을 들고 교문을 붙잡고 기도하는 사람도 많았다. 교문을 지나치기 전 강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가 차 안에서 손을 흔들었다. 강우가 고개를 꾸벅하고는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 * *
시험장 안은 유난히 추웠다. 이상하게도 수능 날은 대부분이 그랬다. 교실로 들어선 강우가 수험표를 확인했다. 그리고 지정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자리에 앉자 나무 의자에서 냉기가 올라왔다.
“후우···.”
차가운 냉기와 주변을 감도는 침묵 그리고 팽팽한 긴장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강우가 가방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찌이익.
작게 들리는 가방 여는 소리에도 수험장 안의 시선이 쏠렸다. 강우가 뻘쭘한 표정을 지으며 필통을 꺼냈다. 그리고는 지정된 OMR 펜과 빨간색 볼펜을 꺼냈다.
드르륵.
감독관이 들어오고 보조 감독관도 들어왔다. 두 사람의 손에는 시험지와 OMR카드가 각각 들려있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시험지가 수험생들에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종이 울릴 때까지 대기합니다.”
감독관의 말에 수험생들이 눈을 감았다. 일부 학생들은 슬쩍 시험지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절대 손을 대지는 않았다.
딩동. 딩동.
1교시 언어영역이 시작됐다. 수험생들이 일제히 시험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강우가 짧게 심호흡을 한 뒤 시험지를 내려다보았다.
사락. 사라락.
강우가 거침없이 문제를 풀어나갔다. 잔뜩 집중한 강우의 콧잔등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렇게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생각보다 쉽네.’
강우가 문제를 모두 풀었다. 문제를 푼 강우가 조심스럽게 OMR카드에 마킹을 시작했다. 혹시 밀려 쓰지 않을까 꼼꼼히 마킹을 했다. 그렇게 문제를 모두 풀고 마킹까지 끝냈다. 수험표에 정답을 옮겨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우가 할아버지에게 받은 손목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뭐야. 아직 시간이 남았네.’
잠시 고민하던 강우가 펜을 내려놓고 책상에 엎드렸다. 보조 감독관이 움찔하더니 강우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툭 하고 건드리며 조용히 말했다.
“학생, 벌써 시험을 포기하면 어떡합니까.”
“아···. 그게 아니라 다 풀었습니다.”
보조 감독관이 강우의 OMR카드를 보더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교탁으로 돌아갔다. 강우가 문제를 찍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다 푼 거 맞는데···.’
어쩔 수 없이 강우가 멀뚱히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감독관이 시간을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 5분 남았습니다. 마킹을 끝내지 못한 분은 빨리 마킹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변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어떤 수험생은 우는듯한 표정으로 마킹을 했다.
“선생님! 잘못 마킹했습니다.”
마킹 실수로 창백해진 수험생도 나왔다. 감독관이 빠르게 잘못된 OMR카드를 회수했다. 새 OMR카드를 받은 학생이 절망에 빠진 얼굴로 허겁지겁 마킹을 다시 시작했다.
딩동. 딩동.
언어영역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그만. 그만 멈추세요.”
감독관의 냉정한 지시에 수험생들이 펜을 내려놓았다. 보조 감독관이 빠르게 시험지와 OMR카드를 회수해 갔다.
“으아···.”
“망했다···.”
감독관과 보조 감독관이 나가자 사방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긴장이 풀리고 허탈함이 밀려든 수험생들이 축 늘어져 버렸다. 몇몇 수험생들은 강우를 힐끗 보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강우는 여유 있게 휴식 시간을 보냈다.
딩동. 딩동.
쉬는 시간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제2교시 수리영역 1이 시작됐다. 강우는 또 막힘없이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두 눈을 감은 채 휴식했다. 주변의 시선이 더욱더 안타까워졌다. 수리영역 1이 끝나자 점심시간이었다.
달칵.
강우는 도시락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은 푸짐했다. 강우가 어머니에게 감사하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주변의 학생들은 극도의 긴장감에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저 사람은 뭐지? 자고 먹으러 왔나?”
주변에서 강우를 보며 뾰족한 말을 뱉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
“.....”
너무나 태연한 강우의 행동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됐다. 다른 수험생 중 일부가 헛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강우는 태연해도 너무 태연했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끝나고 시험이 계속됐다.
스윽. 스윽.
강우는 막힘이 없었다. 특히나 수리영역 2는 강우가 가장 자신이 있는 과목들이었다. 특별한 능력을 얻기 전에도 강우를 먹여 살렸던 과목들이었다. 거기다 지금의 뛰어난 기억력까지 있으니 누워서 떡 먹기 수준의 문제였다.
“으으···.”
“아아···.”
하지만 주변으로는 탄식이 가득했다. 문제를 보며 머리를 쥐어뜯는 사람들과 다급함에 문제를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조용히 해주세요.”
감독관의 제제에도 동요는 계속됐다. 3교시가 끝나자 수험생들은 아예 포기한듯한 표정도 지었다. 하지만 시간은 자비 없이 흘러갔다.
딩동. 딩동.
잠시 후, 마지막 시험 시간인 외국어 영역이 시작됐다. 영어 문제야말로 강우에게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한글을 읽는 수준으로 독해를 해나갔고, 문법 역시 완벽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어 능력까지 이어받은 상태니 쉬울 수밖에.’
강우는 순식간에 문제를 풀고 마킹까지 끝냈다. 역시나 감독관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딩동. 딩동.
마지막 종소리가 울리고 3년이란 고난의 시간이 담긴 짧은 수능시험이 끝났다. 오늘을 위해 달려온 수험생들의 탄식과 허탈한 한숨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모두 수고들 하셨습니다.”
감독관이 수험장 밖으로 나갔다. 강우가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수험생들의 얼굴에는 허탈함과 절망감이 떠올라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수험생 대부분이 시험을 망쳤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강우는 예외였다. 준비한 만큼 그리고 목표한 만큼의 결과를 이루어 냈다.
‘빨리 가채점해보고 싶은데.’
가방을 챙긴 강우가 수험장을 벗어났다.
* * *
“혀···. 형아다!”
추운 겨울 교문 앞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강용이가 서 있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온 강우가 환하게 웃었다.
“다녀왔습니다.”
가족들이 강우를 둘러싸고 마주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에는 후련함이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대견함이 떠올라있었다. 강용이는 코를 훌쩍거리며 상기되어 있었다.
“짜장면 먹으러 가요!”
역시 외식이 기대됐나 보다. 오늘의 메뉴도 할아버지와 강용이가 좋아하는 중식이었다. 강우 가족은 아버지의 차를 타고 단골 중식집으로 갔다. 수능이 끝난 날답게 중식집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아이고, 사장님 오셨습니까?”
중식집 주인이 아버지를 보고는 반가워했다. 아버지가 씨익 웃었다.
“방 하나 내주십시오. 오늘 우리 아들이 수능을 아주 잘 봤다고 해서 제대로 먹고 갈 생각입니다.”
중식집 주인이 강우를 보더니 환한 표정을 지었다. 워낙 단골인 만큼 안면이 있었다.
“강우 학생, 고생 많았어. 축하해. 오늘은 아저씨가 탕수육 서비스해줄게.”
“감사합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강용이는 잔뜩 신이 났다.
“탕수육!”
강우 가족이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특실로 들어왔다. 아버지가 메뉴판을 보더니 정말 거하게 시키셨다.
“짜장면 5개에 유산슬이랑 깐풍기 대자리 그리고 고량주도 한 병 주세요.”
탕수육은 서비스라 시키지 않았다. 종업원이 밝아진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할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흐뭇하게 웃으셨다.
“고생했다. 이제 당분간은 실컷 쉬어라.”
“네, 할아버지.”
아버지가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답안지는 적어왔지?”
“네.”
강우가 가방에서 수험표를 꺼내며 답했다. 어머니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봤어? 점수 잘 나올 거 같아?”
“가채점해봐야 알 것 같아요.”
강용이는 나무젓가락을 비비며 마냥 즐거웠다.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름의 긴장이 풀리자 요의가 느껴진 것이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강우가 특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중식집의 화장실은 밖으로 나가 건물의 2층이었다. 강우가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누군가를 마주치고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어···?”
강우와 마주친 상대방도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강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박광웅?”
눈앞에 마주친 인물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박광웅이었다. 바로 강우와 싸움박질을 했던 일진 말이다. 두꺼운 잠바에 헬멧을 쓴 박광웅의 한쪽 손에는 은색 철가방이 들려있었다. 박광웅이 크게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
강우의 시선이 박광우의 철가방을 향했다. 그곳에는 수거해온 그릇들이 담겨있었다.
“너···. 수능 안 봤냐?”
강우의 질문에 박광웅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안 봤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고 중식집 주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광웅아! 뭐 하냐? 배달 밀렸어.”
박광웅이 몸을 획 하고 돌려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강우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
강우에게는 홀가분하기만 한 오늘이 또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일상의 하루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