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402)

걱정하지말고 지금을 즐겨.

다음 날인 크리스마스 당일. 강우는 늦잠을 자고 있었다. 전날 이재원과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들어온 탓이다. 이윽고 잠들어 있던 강우가 꿈틀거렸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 때문이었다.

“아···.”

강우가 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강용이는 이미 일어난 듯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

그리고는 움찔하고 멈추어 서버렸다. 거실에 강용이와 친구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방문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얘들아, 우리 형아야.”

강용이가 달려와 강우를 붙잡았다. 강우가 황급히 눈에 묻은 눈곱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안녕? 강용이 형이야.”

강우가 거실을 쓰윽 훑어보았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거실에서는 크리스마스 맞이 파티가 한창이었다. 벽에는 온갖 장식이 붙어있었다. 거실의 중앙에 놓인 커다란 상에는 피자를 비롯해 온갖 먹을 것들이 가득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아···. 맞다. 크리스마스지.’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강용이가 부른 친구는 모두 열 명 정도였다. 그리고 대부분이 여자아이들이었다. 강우가 속으로 실소를 흘리며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하긴···. 강용이가 이상하게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긴 했지.’

미래의 기억 속에도 마찬가지였다. 강용이는 이상하리만큼 여자와 대화가 잘 통했다. 그런 이유였을까? 강용이는 늘 여러 가지 형태로 여난에 시달리고는 했었다.

“안녕하세요.”

강용이의 친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해왔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탓인지 조금 긴장들 한 표정이었다. 그중에는 기찬우도 있었다.

“그래, 재밌게들 놀다 가라.”

강우가 슬쩍 인사를 받아준 후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윽고 깔끔하게 씻은 강우가 화장실을 나왔다. 강용이와 친구들은 비디오를 보며 놀고들 있었다.

“강우 일어났구나?”

주방에서 어머니가 거실로 나왔다. 앞치마를 메고 있는 어머니의 손에는 과일이 가득 담긴 쟁반이 들려있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강용이 친구들이 많이 왔네요?”

“응, 강용이가 그동안 아파서 잘 놀러 나가지 않았잖아. 그래서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 온 거야.”

“아···.”

강용이는 그동안 바깥 외출을 삼갔다. 추운 날씨 탓이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도 강용이는 겨울을 가장 힘들어했었다. 물론, 그때와는 다른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 했다.

“네, 아버지는요?”

“응, 나갈 준비 중이셔.”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김치 공장에 채워놓을 설비를 위해 아버지는 바쁘실 것이다. 강우가 안방의 문을 노크했다.

“아버지.”

“어, 강우야. 들어와.”

강우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양복을 입은 아버지는 나갈 준비를 거의 끝낸 상태였다.

“오늘은 어디 가세요?”

“어, 설비 업체 몇 군데랑 미팅이 있어.”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휴일인 오늘이었지만, 업체들은 쉴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저도 같이 갈까요?”

“괜찮겠어?”

아버지가 내심 기대감에 차올랐다. 강우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은 약속도 없으니까요. 준비하고 올게요.”

강우가 방으로 돌아가 나갈 준비를 했다. 힐끗 옆을 보니 잘 정리된 게임기들이 보였다. 그동안 강우가 틈틈이 사고 모은 것들이었다. 강우가 게임기들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강용아, 친구들이랑 이거하고 놀아.”

“와?! 진짜?”

강용이가 대번에 밝은 표정이 됐다. 내심 친구들과 게임을 하고 싶었지만, 강우의 허락이 필요했나 보다. 강용이의 친구들이 부러운 듯, 한 표정이 되었다. 특히 기찬우는 강우를 뚫어지게 보며 부러워했다.

“봤지? 우리 형아가 게임기 하게 해줄 거라고 했지?”

강용이의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강우가 피식 웃으며 인텐도 64라는 게임기를 설치해주었다. 그리고 초등학생들이 하기 좋은 와리오 카트라는 게임을 틀어주었다. 평소 친구들과 즐기던 게임이라 패드도 4개나 있었다.

“우와!”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친구 대부분이 이런 게임을 접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강용이는 나이 차이가 나는 강우 덕분에 항상 또래보다 앞서가는 문화를 즐기고는 했었다.

“강우야, 준비 끝났니?”

안방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나왔다.

“네, 나가요.”

강우와 아버지가 현관문을 나섰다. 닫힌 문안으로 강용이와 친구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아버지가 주차장에서 차를 빼 오셨다. 강우가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띠를 착용했다.

“아버지, 일단 명동에 좀 갈 수 있을까요?”

“명동에?”

“네, 명동에 있는 빌딩을 좀 보러 가고 싶어서요.”

아버지의 표정이 살짝 상기되기 시작했다.

“그래, 어차피 미팅 시간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까. 들렀다 가자.”

“네.”

아버지가 설레는 마음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 * *

잠시 후, 강우와 아버지가 명동에 도착했다. 아버지의 차가 GIC 한국지사가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주차를 끝낸 강우와 아버지가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한산했다. 아버지가 거리를 둘러보며 짧게 탄식했다.

“크리스마스인데 거리가 이렇게까지 텅 비어 있다니. 명동 생활 몇 년 동안 이런 적은 처음이야.”

“그러네요.”

어젯밤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은 정식으로 IMF 관리체제로 돌입했다. 길고 긴 경제 침체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강우는 빌딩을 보러 이곳에 왔다. 기억과는 달라진 현실에 강우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강우야, 빌딩을 보러온 거면 아빠가 꼭 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저도 알아요.”

아버지가 살짝 놀란 눈이 되었다. 강우가 씨익 웃었다.

“할아버지가 옛날에 사업하실 때 쓰시던 건물이죠?”

“맞아. 그걸 어떻게 알았어?”

강우가 빠르게 답했다.

“예전에 할아버지한테 들은 기억이 있어요.”

“그랬구나.”

아버지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강우가 앞장을 섰다.

“네, 일단 거기부터 보러 갈까요?”

“좋지.”

강우와 아버지가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이윽고 강우와 아버지가 5층짜리 빌딩 앞에 도착했다. GIC의 한국지사가 있는 건물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여기가 맞죠?”

“그래, 여기야.”

아버지가 감회에 젖은 얼굴로 빌딩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사업을 하던 빌딩은 이제는 여러 상점이 들어서 있었다.

“위치가 나쁘지는 않네요.”

강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흔히 말하는 명동상권의 안쪽에 있는 건물이었다. 물론 중심부에서 조금은 벗어난 곳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회사건물로 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강우야, 정말 이 빌딩을 살 수 있을까?”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빌딩을 산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 듯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가능해질 거예요.”

“그래?”

아버지가 영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우는 알고 있었다.

‘이 빌딩은 곧 경매에 나올 거니까.’

강우는 차분히 기다렸다가 낙찰을 받을 생각이었다. 준비는 완벽했다.

‘자금도 있고, 경매일로 넘어가는 시기도 알고.’

혹시 자금이 모자란다면 은행의 대출을 이용하면 될 것이다. 물론, IMF 이후 은행들은 대출을 극도로 꺼리게 된다. 하지만 동양 무역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자본금도 튼튼하고 얼마 전 달러를 바꾸면서 거래실적도 높으니까.’

강우가 속으로 굳은 결심을 내렸다. 돈이 얼마가 들던 여기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투자하기 전에 경매가 이루어지니까.’

그러한 이유로 이 빌딩은 총 3번의 유찰을 겪고 헐값에 팔려나간다. 강우가 빌딩을 보며 눈을 빛냈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여기에 동양 무역의 현판을 걸어줄 테니까.’

잠시 상상을 해본 강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이윽고 상념을 마친 강우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역시 빌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 근처 부동산에 한 번 들러보죠.”

“어? 어어 그래.”

강우와 아버지가 근처의 부동산에 들렀다. 그리고는 빌딩에 대한 정보를 이것저것 물었다. 역시나 좋지 못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 건물 공실이 많아진 지 한참이나 됐어요. 솔직히 상가 임대하실 거라면 저는 말리고 싶습니다. 세입자 중에 보증금 못 받게 생긴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거든요.”

부동산 중개업자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정도라면 상황이 매우 심각한 게 분명했다. 역시나 미래의 기억대로였다. 강우와 아버지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부동산을 나왔다. 아버지의 얼굴이 더욱 상기되었다.

“아버지, 어젯밤에 제가 했던 이야기 기억하시죠?”

“부동산 경매 매물들이 쏟아져 나올 거라는 거?”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빌딩도 곧 경매로 넘어갈 예감이 드네요.”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진짜 신기하네. 타이밍이 어떻게 이렇게 딱 맞아떨어지지? 마치 우리가 사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말이야.”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미래의 기억 속 아버지가 알려줬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강우와 아버지가 GIC 한국지사가 있는 빌딩으로 돌아왔다. 강우와 아버지가 다시 차를 몰고 빌딩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설비회사들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이윽고 아버지의 차는 서울을 벗어났다.

“어디부터 가는 거예요?”

“일단 냉장 설비부터 알아봐야 할 거 같아.”

현재 일본의 김치는 일본 전통 채소절임 중 하나인 아사즈케라는 음식과 비슷한 방법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한국과는 다른 기후와 배추 종자의 차이로 일본에서는 김치가 잘 발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일본인들은 대부분 겉절이와 같은 형태의 김치를 선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 전통의 맛으로 경쟁한다.’

그러기 위한 핵심 중 하나가 김치의 발효에 있었다. 현재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김치와는 달리 한국 김치 본연의 맛으로 승부를 보려고 하고 있었다. 단가가 높은 한국산 배추를 고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강우는 확신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김치의 맛을 보고 나면 절대 헤어나올 수 없을 거다.’

또 해야 할 것이 있었다. 바로 ISO(국제표준화기구) 9002 품질인증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것 또한 아버지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이제부터 진짜 할 일이 많아지겠어. 아버지 혼자 감당되려나.’

강우가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아버지, 이제 동양 무역도 직원을 뽑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

심각한 취업난에 시달리고 있는 대한민국이었다. 훌륭한 인재들이 취업을 못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조건을 조금 좋게 하면 좋은 인재들을 많이 뽑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겠지. 조만간 취업 광고를 한번 내봐야겠어.”

“네, 저도 대학 가고 나면 틈틈이 일을 도울게요.”

고등학교와는 달리 대학교는 시간적 여유가 많이 생길 것이다. 강우는 학업과 병행에 아버지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힐끗 강우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강우야,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강우가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말을 이어갔다.

“아빠랑 엄마는 지금도 충분해. 네 덕분에 더 좋은 집으로 이사도 가고 법인도 탄탄대로고.”

“네.”

아버지가 한쪽 손으로 강우의 손을 잡았다.

“아빠가 회사도 열심히 다니고 있고. 또 김치 사업도 잘 진행되고 있잖아. 걱정하지 말고 지금을 즐겨. 대학 생활도 그렇고 젊은 시절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순간들이니까.”

“그래도 지금이 정말 중요한 순간이니까요. 지금 사업의 기초를 튼튼히 해놓아야 해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IMF는 위기지만 기회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 점을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

“아빠도 알고 있어. 그래도 아빠가 너를 믿어 줬으니까 이제는 너도 아빠를 믿어줘.”

강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역시 충분히 능력이 있었다.

“그럼요. 저는 항상 아빠를 믿어요.”

“고맙다.”

그렇게 한동안 강우와 아버지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사업 이야기도 나누었고, 이사를 할 집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미래의 기억 속과는 너무나도 다른 부자의 관계였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대화가 끊어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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