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402)

그래, 좋은 계획이네

“다녀오겠습니다!”

강우가 현관을 바삐 나섰다. 어머니가 빠르게 다가와 강우를 붙잡았다.

“아들! 이거 가지고 나가야지.”

“네?”

현관을 나서려던 강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빠르게 다가와 강우의 손에 도시락통을 들려주었다.

“친구들이랑 같이 먹어. 알겠지?”

“네.”

강우가 도시락통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소풍 가는 날인 것처럼 푸짐한 양이었다. 어머니가 강우의 옷매무새를 만져주었다.

“가서 원서접수 잘하고 와.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알겠지?”

“네, 엄마.”

강우가 씨익 웃었다. 오늘은 98학년도 대학 입시 ‘나’ 전형 군의 원서접수 마지막 날이었다. 강우는 오늘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시원서를 접수하러 가기로 했다. 현관을 벗어나 오성맨션을 나서자 신원주와 연정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냐?”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통을 스윽 들자 신원주가 반색했다.

“어? 어머니 표 도시락이구나?”

“어.”

연정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신원주가 연정호를 보며 슬쩍 웃었다.

“정호 오늘 운이 좋네. 강우네 어머니 음식솜씨가 끝내주시거든.”

“그래?”

연정호의 얼굴로 옅은 기대감이 차올랐다. 신원주가 메고 있던 가방을 풀었다. 큼지막한 가방은 도시락통이 담길만해 보였다.

“일단 여기다 담아가자.”

신원주가 가방에 도시락통을 넣었다. 묵직해진 가방만큼 든든함을 느낀 신원주가 씨익 웃었다. 이윽고 강우와 친구들이 버스를 타고 당산역에 도착했다.

덜컹. 덜컹.

지하철이 한참을 달려 서울대입구역에 도착했다. 강우와 친구들이 빠르게 내려 역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대 입구에 도착했다.

“사람 많네.”

강우의 말대로였다. 서울대 입구에는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강우와 친구들이 안쪽으로 향했다. 곳곳에 원서접수처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였다. 강우와 친구들이 안내를 따라 원서 접수장인 서울대 체육관에 도착했다.

“장난 아니네. 이건 무슨 첩보 작전도 아니고.”

신원주가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접수장의 곳곳으로 원서를 들고 있는 학부모들이 보였다. 체육관 위에 붙은 접수 현황판을 확인하며 눈치작전이 한창이었다. 핸드폰까지 동원해 통화하고 있었다.

“올해가 눈치작전이 엄청나다더니.”

연정호도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것이 98년 대입 원서 접수장의 흔한 풍경이었다. 작년과 비교해 평균 20점 이상이 올라버린 수능점수였다. 더군다나 ‘가’ ~ ‘라’ 전형으로 원서접수가 나뉘어 있었다.

‘입학원서가 몰리는 곳은 고득점자도 탈락하는 예도 생겼고, 정원미달은 말도 안 되는 점수로 합격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

하지만 강우와 연정호 그리고 신원주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강우는 수능 만점자였고, 연정호는 397점이라는 고득점자였다. 신원주도 신문학과를 지원하기에는 충분한 점수였다.

“일단 빨리 접수부터 하자.”

강우와 친구들이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의 한쪽으로는 서울대생들이 잔뜩 나와 자신들의 학과를 홍보하고 후배가 될지도 모르는 수험생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강우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일단 저쪽으로 가자.”

강우와 친구들이 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셋이 둘러앉아 서로의 것을 확인하며 꼼꼼히 해주었다. 이윽고 원서 작성이 끝났다. 강우와 친구들이 접수창구로 다가갔다. 그리고 차례대로 원서를 접수했다.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체육관을 벗어난 강우가 크게 숨을 뱉어냈다. 원서까지 접수하고 나니 후련함이 밀려들었다. 신원주와 연정호도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진짜 대입 준비도 끝이네.”

연정호의 표정은 특히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정호야, 고생 많았다.”

강우가 연정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연정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자! 우울한 분위기 그만 연출하고, 배고픈데 도시락이나 먹자.”

신원주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으며 파고들었다. 강우와 연정호가 피식 웃었다. 원서접수를 하느라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강우와 친구들이 서울대 캠퍼스 안의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방학 기간이라 그런지 캠퍼스의 안쪽은 한산했다.

“기대들 하시라.”

신원주가 가방에서 강우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통을 꺼냈다. 강우가 어이가 없어 픽 웃었다.

“그거 우리 엄마가 싸준 거거든?”

“나도 알거든?”

신원주가 도시락을 개봉했다. 총 삼단으로 이루어진 도시락이 하나씩 분리되기 시작했다. 연정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어머니가 다 싸신 거라고?”

“어, 우리 엄마 손이 좀 크다.”

맨 아래 통에는 어머니가 직접 튀긴 돈가스가 가지런히 들어있었다. 두 번째 통을 열자 정성스레 만든 김밥이 있었다. 마지막 통에는 미니 샌드위치와 과일이 있었다.

“진짜 강우 어머니 솜씨는 알아주셔야 해.”

신원주가 입맛을 다셨다. 세 사람이 먹기에 차고도 넘치는 양이었다. 물론 맛은 말할 것도 없었다.

“먹자.”

센스 있게 식기도 여유롭게 준비해준 어머니였다. 강우가 돈가스를 집어 한입에 삼켰다. 조금 식었지만, 역시 맛은 끝내줬다. 연정호가 조심스럽게 돈가스를 먹었다.

“와···. 맛있네.”

그리고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강우가 씨익 웃더니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이거 먹어봐. 우리 엄마 특제 샐러드가 들어가서 엄청 맛있다.”

“어, 고마워.”

연정호가 샌드위치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와 친구들은 한창 먹을 나이였다. 많아 보이던 음식들이 순식간에 동이 나버렸다.

“잠깐만 기다려봐.”

신원주가 목이 말랐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근처의 음료 자판기를 향해 달려갔다. 불룩 차오른 배를 두들기던 연정호가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좋겠다. 어머니가 음식도 잘하시고.”

“우리 엄마가 음식하고 누구 밥해 먹이고 그런 거 엄청나게 좋아하시거든. 나중에 집에 한번 놀러 와라.”

연정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학금을 받으며 금전적인 압박에서 벗어난 연정호는 많이 변해있었다.

“그런데 강우 너는 남은 방학 동안 뭐할 거야?”

“나? 그동안 밀린 게임도 좀하고 아버지 따라서 중국도 갈 거 같고.”

사업도 도와야 한다라고 말하려던 강우가 말을 삼켰다. 지금을 즐기라던 아버지의 말에 스르륵 미소가 번져나갔다. 할아버지가 주신 기회를 강우는 배로 불렸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의 시간이었다. 강우는 아버지의 능력을 믿었다. 미래의 기억 속 아버지는 능력이 부족했던 게 아니었다.

‘그저 상황이 아버지를 절벽 끝으로 몰아세웠을 뿐이었으니까.’

이제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강우라는 날개를 달았다. 아버지의 능력으로 어디까지 날아오를지 강우는 한동안 옆에서 믿고 바라볼 생각이었다.

‘그래, 조금은 여유 있게. 하지만 잡아야 할 걸 놓치지 말고. 그렇게 지내면 충분하겠지.’

강우가 상념에서 벗어났다. 연정호가 강우를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강우가 물었다.

“정호, 너는 방학 동안 뭐 하려고?”

“난 아르바이트해야지.”

연정호는 대진 그룹에서 장학금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생활의 모든 부분을 채워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좋은 계획이네.”

“대학 생활 시작하면 또 어머니한테 부담을 드려야 하잖아. 짧은 시간이지만,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다. 그리고 동생들한테 좀 사주고 싶은 것들도 있고.”

고등학교 내내 오직 오늘을 위해 달려온 연정호였다. 힘든 가정상황에서도 이를 악물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의 희생 덕분이었다. 강우가 연정호를 보며 감탄한 표정이 되었다. 연정호는 알아갈수록 생각이 깊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우가 넌지시 물었다.

“생각해 놓은 일자리는 있어?”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긴 한데. 자리 찾는데 영 쉽지는 않네.”

연정호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IMF가 오며 취업난이 심해지자 역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로 많은 사람이 몰렸다. 거기다가 실직자들도 늘어나면서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그러게, 서울대라도 합격하고 나면 과외라도 하면 될 텐데.”

강우의 말에 연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생각은 하고 있다.”

“그럼 대진 그룹에 아르바이트 자리 찾아달라고 한번 물어보던지.”

“에이~ 그런 거까지 알아봐 줄까?”

연정호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었다. 강우가 씨익 웃었다.

“그럼 알아봐 줄걸? 아마도?”

“그래?”

연정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때, 신원주가 양손에 음료를 들고 돌아왔다.

“오래 기다렸지? 잔돈이 없어서 조금 시간이 걸렸다.”

신원주가 음료 캔을 나누어 주었다. 딸칵하는 소리가 들리고 세 남자의 목젖이 꿀렁거렸다. 음료를 모두 마신 강우가 도시락을 정리했다.

“이제 슬슬 가자.”

강우의 말에 신원주가 연정호를 바라보았다.

“오늘 춘배랑 재식이 만나는데 같이 갈래?”

“오늘?”

연정호가 고민에 빠졌다. 늘 공부와 집밖에 모르던 연정호였다. 단 하루의 외출도 어색함과 미안함이 드는 것이다. 연정호의 갈등이 깊어졌다.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어린 동생들도 눈에 밟혔다.

“아···. 나는 아무래도 안 될 거 같은데.”

연정호가 아쉬움을 삼키며 거절의 뜻을 밝혔다. 그러자 신원주가 연정호의 목을 팔로 감쌌다.

“인마, 당분간은 좀 쉬고 놀고 하는 거지.”

“잠···. 잠깐만. 이것 좀 놓고 말해.”

신원주가 팔에 힘을 더욱더 주며 말했다.

“그래서 갈 거야, 안 갈 거야?!”

“아아! 가. 간다고!”

연정호가 바둥거리며 간다고 말했다. 강우가 피식 웃으며 신원주의 팔을 잡아 헤드록을 풀었다. 신원주가 벌게진 얼굴로 버텼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우! 괴물.”

“그놈의 헤드록.”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정호가 벌게진 귀를 만지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정호야. 너무 무리하지 마. 지금은 좀 즐겨도 돼.”

강우가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연정호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루쯤은 상관없겠지.”

“오케이. 정호도 합류.”

신원주가 대번에 좋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연정호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강우가 주변을 쓰윽 둘러보았다. 원서접수 마감이 한참 남은 서울대 체육관 앞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 * *

늦은 저녁 강우와 신원주 그리고 연정호가 목동 사거리에 나타났다. 연정호는 강우를 보며 연신 미안한 표정이었다.

“강우야, 미안하다.”

“뭐가?”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연정호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동생들이 좀 짓궂어서.”

“아···. 괜찮아. 내 동생도 만만치 않거든.”

원서접수를 마친 강우와 친구들은 연정호의 집을 들렀다. 아무래도 보호자 없이 집에 있을 동생들을 걱정한 연정호를 위해서였다. 강우는 연정호의 집을 들르며 먹을 것을 잔뜩 사 갔다. 신원주도 돈을 보탰다.

“동생들 좋아하는 거 보니까 나도 좋더라.”

연정호가 흐뭇하게 웃었다. 강우가 그런 연정호를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가정사를 들키기 싫어 늘 혼자였던 연정호였다. 한때는 강우에게 질투심을 드러내며 쏘아붙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연정호는 달랐다.

“다음에 우리 집 올 때 동생들도 데리고 와.”

“동생들까지?”

연정호가 놀란 듯한 표정이 됐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생이랑 나이대도 비슷하던데 친구 하면 좋지. 너랑 나처럼.”

“아···. 그런가···.”

연정호가 살짝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강우와 신원주 그리고 연정호가 오늘의 집결 장소에 도착했다. 목동 사거리에 있는 유명 패스트푸드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김춘배와 남재식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강우야, 여기다!”

김춘배가 손을 흔들며 강우를 반겼다. 강우가 김춘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신원주와 연정호도 뒤를 따랐다.

“원서접수들은 잘하고 왔냐?”

김춘배의 옆자리에 앉은 강우가 물었다. 김춘배가 씨익 웃었다,

“어, 잘하고 왔지.”

김춘배는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원서를 넣었다.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해 공부한 탓에 수능점수가 제법 나온 결과였다.

“재식이 너는?”

강우가 이번에는 남재식에게 물었다.

“나도 잘 지원하고 왔다. 여기저기 원서 넣느라 전쟁통이긴 했지만.”

남재식은 원서를 여러 군데 접수했다. 오늘 있었던 눈치작전의 당사자 중 한 명이었다. 원서를 접수한 곳은 국민대, 한양대 그리고 한림대였다. 선택한 학과는 모두 달랐다. 그래서인지 남재식의 얼굴에서 걱정스러움이 조금 느껴졌다.

“잘될 거야. 걱정하지 마.”

강우의 말에 남재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의 말은 늘 현실로 이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김춘배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새해까지 이제 5시간 남짓 남았네.”

그리고 강우와 친구들은 모두 성인이 될 것이다. 성인이 된 강우와 친구들의 첫 계획은 간단했다.

“다들 준비해 왔지?”

강우의 말에 친구들이 눈을 빛냈다. 그리고는 품에서 각자의 주민등록증을 꺼내 들었다. 미래의 기억과는 다른 종이 재질에 코팅이 된 것이었다. 강우가 묘한 기분을 느끼며 씨익 웃었다.

“오케이. 오늘 제대로 달려보자. 오늘은 내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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