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춥네요.
강우가 눈앞의 여자를 힐끗 살폈다. 긴 생머리에 단아한 외모를 가진 여성이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성격이 좋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강우가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순간, 더 자세한 기억이 떠오르려다 흩어졌다.
‘음···.’
강우가 흐릿한 기억을 애써 더듬었다. 하지만 더는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그저 눈앞의 여성이 둘 중 한 명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기억만이 확실했다.
‘그 말은 나와는 크게 인연이 없었던 인물이라는 건데.’
그때, 테이블로 다가온 이재원이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뭐야? 벌써 많이 마신 거야?? 이 술고래들.”
강우가 이재원을 향해 슬쩍 물었다.
“누구예요? 저 사람은?”
이재원이 뒤를 바라보더니 실소를 흘렸다.
“어, 내 후배. 우리 동아리 매니저 한단다.”
강우와 연정호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여학생이 강우와 연정호를 향해 손을 들었다.
“안녕? 경영학과 96학번 채보라야. 오늘부터 동아리 매니저를 맡게 됐어. 잘 부탁해.”
이름을 듣자 지끈거리던 머리가 더욱 아파졌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경영학과 98학번 박강우입니다.”
“어, 반가워. 네 이야기 많이 들었어.”
같은 경영학과이니 직속 선배였다. 이번에는 연정호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법학과 98학번 연정호입니다.”
“그래 안녕? 만나서 반가워.”
강우의 반대편으로 이재원과 채보라가 앉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신원주가 채보라의 옆에 앉았다. 연정호가 신원주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왜 저기 앉아?’
강우가 힐끗 신원주를 바라보았다. 연신 채보라를 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재원이 채보라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라야, 너도 참 대단해. 아니 후배들 나온다는 미팅에는 왜 나가?”
“오빠, 그래봤자 한두 살 차이인데. 뭐가 어때?”
채보라가 당당한 표정으로 답했다.
“거기다가 하필 짝이 된 게 또 원주라니.”
이재원이 재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채보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거기 있는 남자 중에 원주가 제일 멋있던데?”
채보라의 대담한 표현에 신원주가 얼굴을 붉혔다. 처음 보는 친구의 모습에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한편으로 이재원과 채보라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두 분은 엄청 친하신가 봐요?”
강우의 물음에 채보라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이재원의 등을 팍팍 쳤다.
“사람 하나 살리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었는데.”
“무슨 말이야?”
이재원이 몸을 비틀며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채보라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는 매일 혼자만 밥 먹고 사람들이랑은 철벽치고 잘 어울리지도 않았잖아요? 그나마 내가 있으니까 이런저런 정보도 얻고 그랬지. 시험 때 족보도 나 아니었으면 있는지도 몰랐을 거면서.”
“음···. 그건 확실히 그래. 인제 보니 참 고맙네.”
이재원의 말에 채보라가 실소를 흘렸다. 못 본 사이 이재원은 변해도 너무 변해있었다. 그게 달라진 환경 탓인지 아니면 시간이 흐른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채보라의 시선이 강우를 향했다.
“네가 바로 그 박강우구나.”
“그 박강우가 뭐냐. 현상범도 아니고.”
이재원의 핀잔에도 채보라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강우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강우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이재원이 채보라의 얼굴로 팔을 휘휘 저었다.
“그만 좀 뜯어봐라. 강우가 갈비도 아니고 뭐 그렇게 사람을 눈빛으로 뜯어.”
“선배가 그렇게 아끼는 후배라니까 자세히 보는 거예요.”
이재원이 정색을 했다.
“후배 아닌데. 동생이지.”
채보라의 눈빛에 호기심이 짙어졌다. 하지만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강우와 이재원의 관계는 차차 알아가면 되리라 생각했다.
“너희들 술 더 마실 수 있지?”
이재원이 강우와 연정호를 보며 물었다. 연정호가 바로 답했다.
“네, 그럼요.”
강우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살짝 취기가 올라왔지만, 아직 문제없었다. 이재원이 직원을 향해 소리쳤다.
“저기요. 주문 좀 할게요.”
이재원의 시선이 스윽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안주 부실한 거 봐라. 난 안주 없으면 술 못 마시겠더라.”
직원이 다가오자 이재원이 맥주와 안주를 잔뜩 시켰다. 잠시 후, 맥주가 나오고 안주가 나오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떻게 친해진 거야?”
참 궁금한 것도 많은 채보라였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알게 됐어요. 그러다 친해졌고요.”
강우의 답변에 채보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르바이트? 재원 선배가?”
“아니 그런 아르바이트 말고. 삼 년 전에 기억 안 나? 신 교수님이 하던 미국 중견기업 조사 프로젝트.”
“아~ 그거요? 강우가 그걸 했다고요? 그때는 고등학생이었을 텐데?”
채보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우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영어를 제법 했지만, 프로젝트에 참가할 정도가 아니었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었던 강우가 그 아르바이트를 했다니 놀랄 만도 했다.
“너 강우가 영어를 얼마나 잘하는지 아냐? 원어민들도 울고 갈 실력이라고.”
“정말요? 와···. 전체 수석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더니. 강우 너 대단하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이재원이 점점 강우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괴물이 영어만 잘하는 게 아니야. 중국어랑 일본어도 원어민 뺨치게 잘한다고.”
“와···.”
채보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서울대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는 어떻게 알고 지원한 거야?”
“아···. 그게 신철민 교수님이 제 친구 아버지시거든요. 그래서 하게 됐어요.”
채보라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눈치채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잠깐, 너 이름이 신원주라고 했지? 어디 보자. 어? 정말 교수님이랑 닮았네! 교수님 닮아서 인물이 훤해.”
채보라가 신원주의 얼굴을 해부하듯 들여다보았다. 신원주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채보라가 질문을 퍼부었다.
“신 교수님 아들 맞지? 나 들은 거 같아 교수님 아들 이번에 서울대 입학했다고.”
“.....”
신원주가 멍한 표정으로 채보라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신원주의 시선에 채보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우···. 저 멍청이가.’
답답함에 속으로 가슴을 치던 강우가 테이블 아래로 신원주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신원주가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우리 아빠가 신철민 교수님이에요.”
신원주의 답을 들은 채보라가 몸을 신원주에게로 돌렸다. 조금 더 밀착된 거리에 신원주가 헛숨을 들이켰다.
“와···. 신기하네. 어떻게 아빠는 서울대 교수고 아들은 또 서울대생이지? 이런 경우 흔치 않은데.”
“그런가요···.”
신원주가 멋쩍게 웃었다. 얼굴은 이미 터질 듯 붉어져 있었다. 몇 잔이고 비워버린 맥주가 아니라면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떠올라있었다.
‘이걸 술이 살려주네.’
강우가 피식 웃었다. 사실 신원주는 강우와 비슷했다. 이성에게는 큰 관심이 없었다. 더군다나 대인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신원주라 더욱 그랬다.
‘그나마 매일 보는 친구들이나 평범하게 지내지.’
그런 신원주의 이런 모습은 정말이지 새롭기도 했고, 재밌기도 했다. 그렇게 한동안 채보라는 신원주를 향해 이것저것 물었다.
“아···. 외동아들이구나. 취미는 뭐야?”
“게···. 게임 좋아해요.”
“아~ 게임···.”
채보라가 풍선 바람 빠지는 듯한 숨을 뱉어냈다. 신원주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그런데 이제는 안 해요. 고등학생 때는 할 게 별로 없어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한 거예요.”
“무슨 소리야? 게임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면서.”
눈치가 없는 연정호의 말에 신원주가 살짝 당황했다. 강우가 연정호의 옆구리를 퍽하고 찔렀다.
“아! 왜?”
연정호가 강우를 보며 의아해했다. 강우가 어금니를 살짝 깨물며 웃었다. 그리고 연정호를 향해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아차 싶은 연정호가 벌컥 술을 마셨다.
“풉···. 뭐야 너희 진짜 친하구나?”
“네, 저희 다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같은 반도 했었고요.”
채보라가 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희 보통 인연이 아니네. 대단하다.”
강우와 친구들이 씨익 웃었다. 그 뒤로 신원주는 횡설수설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신원주와 채보라는 한참을 대화를 나누었다. 강우가 힐끗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음···.’
이재원도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의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었다. 강우가 입을 열었다.
“일단 동아리를 만들 거면 이름부터 정해야죠.”
모두의 시선이 강우를 향해 쏟아졌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이름 좋은 거 뭐 없을까요?”
강우의 말이 끝나자 채보라가 단번에 입을 열었다.
“동아리 이름은 SLAM이 어때?”
“오? 좋은데. SLAM?”
이재원이 대번에 좋다며 눈을 크게 떴다. 연정호도 안경을 추켜올리며 동의했다.
“이름 좋네. 나도 찬성.”
채보라가 신이 나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래 농구 광팬이야. 농구 대잔치도 자주 보러 가고. 얼마 전에 읽은 만화책 이름에서 따와 봤어.”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 역시 그 만화책의 광팬이었다. 미래의 기억 속이나 현재나 말이다.
“좋네요. 동아리 이름은 SLAM으로 결정.”
채보라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다들 농구는 잘하지? 나는 특히 그 만화책 주인공 참 좋아해.”
“그 까까머리에 리바운드만 잘하는 놈?”
이재원도 아는지 대번에 주인공을 언급했다. 채보라가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강우를 보며 물었다.
“재원 선배 말이 네가 농구 엄청 잘한다고 하던데 진짜야?”
“네, 잘해요.”
이재원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잘한다고 하면 진짜 잘하는 건데. 살짝 화가 난다. 이 만능괴물.”
“맞습니다. 선배님.”
연정호가 맥주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보라가 연정호를 보더니 살짝 망설였다. 그러자 연정호가 제 발이 저린 듯 이실직고했다.
“저는 몸치입니다. 기대하지 말아 주세요.”
“어···. 알았어.”
마지막으로 채보라가 신원주를 바라보았다. 신원주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바운드를 지배하는 사람이 게임을 지배한다. 리바운드는 제가 정말 잘합니다.”
유명 만화책의 대사를 흉내 내는 신원주의 말에 채보라의 웃음이 빵 터졌다. 배까지 잡으며 정말 즐거워했다.
“아! 뭐야! 너 정말 웃겨.”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강우와 이재원 그리고 연정호가 스르륵 신원주를 바라보았다. 신원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왜?’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긴장이 풀린 신원주가 점점 활기를 더해갔다. 그 모습을 강우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 *
늦은 밤. 강우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오늘 있었던 술자리를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특히 신원주의 생소한 모습에 더욱 그랬다. 강우가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농구 하려면 농구화도 사야 하고 농구 유니폼도 사야 하고.’
상념에 빠져있던 강우가 슬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술김에 훌쩍 점프를 뛰었다.
부웅.
생각보다 높은 점프력에 강우의 입꼬리가 휘어져 올라갔다. 바뀐 신체 능력은 강우에게 엄청난 점프력도 선사해 주었다. 강우가 슛을 쏘는 자세를 잡으며 휙휙 움직였다.
“아···.”
그때, 강우가 부끄러움에 탄식을 뱉어냈다. 아파트 단지 앞쪽에서 몇 명의 사람이 강우를 보고 있었다. 얼굴 가득한 웃음을 보아하니 강우가 하는 행동을 모두 본듯했다. 갑자기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강우가 헛기침했다.
“흠흠···. 날씨가 춥네요.”
완연한 봄바람이 강우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뻘쭘해진 강우가 걸음을 재촉했다. 아파트 입구를 들어가 빠르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탁탁’ 눌렀다.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강우가 빠르게 안으로 몸을 숨겼다. 강우가 엘리베이터에 등을 기대며 짧게 숨을 뱉어냈다.
띵.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강우가 곧장 집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현관을 들어선 강우가 거실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어? 아버지?”
아버지가 거실에 앉아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의 옆에는 강용이가 껌딱지처럼 붙어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가 너무나 반가웠나 보다.
“오? 우리 장남 왔구나!”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강우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