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냐?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강우는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각자의 앞에는 캔맥주 하나가 놓여 있었다.
딸칵.
맥주캔 위로 하얀 거품이 빼꼼히 머리를 내밀었다.
후루룩.
아버지가 황급히 맥주캔에 입을 가져다 댔다. 벌컥벌컥 시원하게 맥주를 한 모금 마신 아버지가 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강우를 보며 물었다.
“그래, 아빠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네, 일단 이것 좀 봐주세요.”
강우가 김광일 기자에게 받은 수첩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수첩을 펼쳐 한 곳을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음···.”
아버지가 수첩을 들어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강우가 설명을 보태기 시작했다.
“일단 거기 보면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어요.”
“그래, 김 기자가 참 자세히도 조사했구나.”
김광일 기자는 독립운동가 개인에 대한 조사만 한 것이 아니었다. 임시정부는 물론 독립군 등등 여러 단체에 대해 조사도 했다.
“충칭의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곳이에요.”
“그렇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인 아버지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강우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충칭이 중국 공산당에 점령되던 때 최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그곳에 계셨어요.”
“맞아. 할아버지가 그날 충칭을 벗어나 한국으로 간신히 넘어오셨다고 했어. 어찌 보면 중국을 벗어날 마지막 기회였다고 하시더구나.”
“맞아요. 그리고 최준 할아버지는 분명 그날 친동생인 최경 님에게 그 장부를 맡겼다고 했어요.”
아버지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심각한 생각을 할 때 나오는 아버지의 버릇이었다.
“음···. 그건 최준 어르신도 알고 계셨다고 하더라. 나중에 동생분을 찾으려고 노력을 안 했던 것도 아니고. 동생분이랑 접선하기로 한 곳은 물론 갈만한 곳은 다 찾아봤다고 하던데?”
“네, 그건 저도 아까 들어서 알고 있어요.”
제2차 국공내전이 끝나고는 그야말로 숨죽일 수밖에 없는 세월이었다. 공산화가 되어버린 중국에서 운신하기란 너무 제약이 많았다. 결국, 최준은 한참이 지나서야 동생을 찾기 시작했다.
‘끝끝내 찾지 못해 결국, 죽었다고 결론을 내리신 거지.’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최준은 동생이 임시정부 건물에서 얼마 가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생각지 못한 것이다. 꼭 살아남아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상념에 잠긴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우가 저렇게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는 곧 해답이 나오리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윽고 강우의 입이 열렸다.
“아버지, 최대한 빨리 충칭에 다녀오셔야겠어요.”
갑작스러운 강우의 말에 아버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충칭에?”
“네.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터에 다녀오셔야 해요.”
강우가 눈을 빛냈다.
“충칭이 함락당하던 순간에 공산당은 주변을 이미 포위한 상태였어요.”
“그렇지.”
그 장개석조차 비행기를 타고 간신히 청두로 도망칠 수 있었을 정도였다. 그 당시 시가지는 이미 혼란의 도가니였다.
“다시 한번 충칭의 임시정부터와 그 근처의 건물들을 자세히 조사해볼 필요가 있어요.”
“알겠어. 비행기 편을 알아볼게.”
“저도 갈게요.”
아버지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강우는 아직 학기 중이지 않던가.
“아들도? 학교는? 조금 있으면 중간고사 아니야?”
“맞아요. 중간고사 끝나고 같이 가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장부를 찾기 전에 한국에서 끝내야 할 일도 많았다. 국적회복도 신청해놓은 상황이었고, 혹시 모를 친척들의 연락도 기다려야 했다.
“그래? 알겠어. 아빠도 너랑 같이 가면 든든하지.”
아버지가 두말없이 강우의 말에 답했다. 강우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신뢰가 가득했다. 강우가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그 장부만 찾는다면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지겠죠?”
“그래, 최준 어르신은 물론이고 다른 많은 묻혀있는 항일투사의 행적를 증명할 수 있을 거야.”
강우와 아버지가 서로를 보며 결의를 다졌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강우와 아버지가 아니면 해낼 사람도 없었다.
“그 장부 꼭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아빠는 강우 너를 믿는다.”
아버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맥주캔을 강우에게 내밀었다. 강우가 맥주캔을 두 손으로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캔에 툭 하고 부딪혔다.
* * *
다음 날. 햇살이 창창한 캠퍼스의 한 곳에 강우와 이재원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살랑이는 봄바람이 강우와 이재원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우···. 속이 쓰리네. 오늘 점심은 해장할만한 거로 해야겠어.”
“내가 예전부터 말했죠. 못 이기는 술 적당히 마시라고.”
이재원의 퉁퉁 부은 얼굴을 보며 강우가 말했다. 이재원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놈의 잔소리. 형한테 그러기 있음?”
“네, 있음.”
이재원이 실소를 흘렸다. 그때, 멀리서 채보라가 달려왔다.
“강우야! 재원 선배!”
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에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앞에 도착한 채보라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어, 엄청난 일이 벌어졌어.”
채보라가 숨을 고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동아리방 생겼어. 그것도 엄청 넓은 곳으로.”
“네? 벌써요?”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동아리방 신청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허가가 떨어졌단 말인가. 채보라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운영처에서 연락이 왔어. 동아리방 배정됐다고 당장 오늘부터 사용할 수 있대.”
“잘됐네요. 그렇지 않아도 매번 밖에서 모이는 것도 불편했는데.”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이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라야, 동아리원 선별은 끝났지?”
“네, 선배.”
“좋아, 그럼 오늘 다 동방으로 모이라고 해. 첫 대면식부터 하자.”
이재원의 말에 채보라가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알겠어요.”
채보라가 떠나가자 강우가 이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형이죠?”
이재원이 슬그머니 먼 산을 바라보았다.
“내가 뭐?”
“형이, 학교에 또 무슨 수를 쓴 거죠? 예를 들면 동아리 발전기금이라든지.”
“어? 너 어떻게 알았냐?”
이재원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강우가 씨익 웃었다.
“형이 어제 다 말해줬잖아요. 잔뜩 취해서.”
“아···.”
이재원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씨익 웃으면서 이재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요, 해장이나 하게.”
“어어···.”
강우와 이재원은 밖으로 나가 해장을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각자의 강의실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날 오후, 모든 강의를 끝마친 강우와 이재원이 동아리방에 도착했다.
“와~ 대박! 이렇게 좋은 동아리방을 줬다고? 우리 같은 신생 동아리에?”
동아리방으로 들어서며 이재원이 탄성을 뱉어냈다. 안쪽에는 채보라와 신원주가 동아리방을 청소 중이었다.
“선배, 왔어요? 어때요? 좋죠?”
“어, 좋네.”
이번에는 신원주가 살짝 들뜬 목소리를 냈다.
“형, 동아리 회비 걷으면 일단 필요한 물건들도 좀 사고 그래야겠어요.”
“그래, 그건 총무인 네가 알아서 해야지.”
신원주가 맡겨만 달라며 엄지를 척 하고 들었다. 강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정호는요?”
“정호, 오늘은 못 온다던데?”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과에 모임이라도 있나 싶었다. 이윽고 강우와 이재원도 동아리방 정리에 합류했다. 기본 집기만 조금 있는 동아리방이었다. 정리도 금세 끝났다. 채보라가 신원주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것저것 살 것 많네. 원주야, 우리 주말에 동아리방에 필요한 거 사러 같이 가자.”
“응, 그래.”
어느새 말도 편하게 하는 두 연인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 됐다. 이재원이 양팔을 마구 쓸어내리며 볼멘소리를 냈다.
“아우~ 이래서 CC가 공공의 적이라는 거야. 둘만 좋아 죽네 죽어.”
채보라가 이재원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이재원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어디 보자~ 동방에 필요한 게···.”
강우가 그 모습에 픽하고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똑똑.
동아리방의 문을 누군가가 노크했다. 모두의 시선이 문을 향해 쏟아졌다.
“왔다.”
이재원의 말이 끝나자 동아리방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두의 입에서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가 좀 늦었죠?”
연정호가 민망한 표정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신원주가 대번에 달려가 연정호의 목을 휘감았다.
“뭐야? 못 온다며?”
“아···. 교수님하고 상담이 조금 일찍 끝나서.”
연정호가 스윽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곧이어 정말 새 동아리원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패기 넘치는 98학번들이 먼저 도착했다. 이번에 뽑힌 열 명이 한꺼번에 같이 왔다. 남자 일곱 명에 여자가 세 명이었다. 과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래, 반갑다. 나는 부회장 이재원이야. 여기는 우리 동아리 회장 박강우.”
선배인 이재원이 새내기들을 맞이해주었다. 이재원을 바라보는 새내기들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이번에는 강우가 동기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안녕? 박강우야. 만나서 반갑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강우를 바라보는 동기들의 표정은 더욱 상기되어 있었다.
“반가워! 우리도 잘 부탁해.”
그다음은 채보라의 차례였다.
“안녕? 96학번 채보라야. 동아리 매니저를 맡고 있어. 앞으로 잘 지내보자?”
“네! 선배님.”
그다음은 신원주와 연정호가 나서서 인사를 건넸다. 신입 동아리원들이 반갑게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이윽고 나머지 동아리원들이 속속 도착했다. 모두 97학번 이상인 선배 동아리원들이었다. 남자 다섯에 여자 다섯 명이었다. 강우와 SLAM의 임원들은 방금과 같이 인사를 나누었다.
“자~ 모두 모였으니까. 우리 동아리 회장이 먼저 한마디 하자.”
이재원이 강우의 등을 쓰윽 밀어냈다. 강우가 앞으로 나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동아리방이 가득 차 있었다.
“SLAM에 가입해 주신 선배님들과 동기들 반갑습니다. 가입하면서 들었겠지만, 우리 동아리는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입니다. 하지만 농구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강우가 잠시 말을 멈췄다. 이미 설명을 들어 알고 있는 동아리원들이 얼굴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독립운동가분들과 후손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할 예정입니다. 물론 다른 유공자분들을 위한 봉사활동으로도 점점 영역을 넓혀갈 생각입니다. 앞으로 같이 운동하고 좋은 일도 같이하는 동아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강우의 말이 끝나자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강우, 멋지다!”
“농구도 좋지만, 나는 봉사활동도 대찬성!”
동아리원들의 젊은 에너지가 동아리방을 가득 채웠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일단 자원봉사는 곧 떠날 예정입니다. 그리고 농구 연습은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점심시간에 체육관을 대관했습니다.”
사방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체육관을 대관하다니 스케일이 남달랐다. 모두 이재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농구 동아리로의 첫 번째 목표는 5월에 있는 체육대회에서 우승하는 겁니다.”
강우의 말에 몇몇 동아리원들이 눈을 빛냈다. 모두 농구를 좋아해 지원한 남자 동아리원들이었다. 그때, 이재원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박수 소리가 끊기자 이재원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전에 동아리 엠티도 떠날 예정이야.”
강우가 이재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강우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강우의 의아한 시선에 이재원이 씨익 웃었다.
“일정은 4월 중간고사가 끝나고. 장소는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터를 방문할 예정이야.”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동아리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과 엠티를 해외로 떠나는 동아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규모에 대한 설렘과 비용에 대한 걱정이 반씩 섞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재원의 클래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비용은 걱정 안 해도 돼. 동아리원들은 그냥 정해진 동아리 회비만 내면 끝이야.”
“형, 그게 무슨 말이에요?”
궁금함을 참지 못한 강우가 물었다. 이재원이 특유의 멋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나머지는 대진 미디어에서 후원할 예정이야. 단 우리 동아리에서 임시정부를 답사하는 과정은 모두 영상물로 제작될 예정이지. 그 영상은 잊혀진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널리 알리는 데 사용될 거고. 모두 거기에만 동의해준다면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할 수 있다.”
이재원의 말이 끝나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박! 미쳤다!”
“와! 나 이 동아리 가입한 게 올해 가장 잘한 일인 거 같아!”
동아리원들의 얼굴은 흥분으로 터질 듯했다. 멍한 표정의 강우를 향해 이재원이 엄지를 척 하고 들었다. 마치 나 잘했지라는 표정에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나 충칭 가는 건 어디서 들었어요?”
“어, 오늘 아버지한테 들었다.”
“그럼 이걸 하루 만에 결정했다고요?”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누구냐?”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역시 못 말리는 대단한 형 이재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