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402)

이 아비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라.

다음 날, 강의를 모두 끝낸 강우가 이재원을 만났다. 두 사람은 곧장 이재원의 차로 향했다.

“형이 그동안의 일을 전부 이야기했을 줄 몰랐는데 말이에요.”

“당연한 거 아니야? 내 생각이 아닌 걸 내가 생각했다고 할 만큼 뻔뻔한 사람 아니다.”

이재원이 씩 웃었다. 강우가 그런 이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후계자 싸움하면서도 정정당당한 모습이었다. 역시 사람 하나는 진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재원이 말을 이어갔다.

“회장님이 그러더라고 능력 있는 조력자를 만드는 것도 리더의 역량이라고. 나한테 너라는 존재가 있는 게 행운이고 내 능력인 거지.”

“그런가요···.”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이번 중국 투자 건도 그렇고 미디어 사업진출 건도 그렇고 회장님이 네 안목에 크게 감탄한 눈치더라고.”

“그래서 오늘 어디로 가는 건데요? 그룹 본사로요?”

“아니, 집으로.”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재원이 강우의 어깨를 툭툭 쳐준 후 차에 올라탔다. 강우가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차에 올라탔다. 어찌 됐든 재벌그룹의 회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던가? 옅은 긴장감이 생겨났다.

“간다. 피곤하면 한숨 자라.”

“네?”

강우의 말에 이재원이 말없이 웃었다. 이윽고 이재원의 차가 한남동에 들어섰다.

“강우야, 다 왔어. 일어나.”

“아···. 네.”

강우가 뒤로 젖혔던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차의 앞 유리에는 와이퍼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어? 비 와요?”

“어, 너 잠들고 오기 시작했다.”

강우가 슬쩍 옆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어둑해진 주변이었다. 바닥을 적신 빗물에 가로등과 차량의 불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이윽고 차량의 앞쪽으로 커다란 저택의 정문이 나타났다.

지이잉.

주차장의 셔터가 올라가고 이재원의 차량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차장의 안쪽에는 이미 여러 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그중 한 대의 차량을 확인한 이재원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저 인간은 또 왜 왔지? 귀찮게 됐네.”

“누구요?”

이재원이 주차를 하며 한쪽에 있는 차를 가리켰다. 고가의 스포츠카였다.

“저 차 둘째 형 차야.”

“둘째 형이요? 오늘 같이 만나기로 한 거예요?”

“아니, 요즘 툭하면 아버지 집에 찾아온다고 하더라. 지난번에 건설회사 인수 건 뭉개지고 일선에서 물러나 있잖아.”

“아···.”

주차가 끝나고 이재원과 강우가 차에서 내렸다. 집 쪽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연결된 문을 나서자 정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 비서가 강우와 이재원을 보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정 비서님, 퇴근 안 했어요?”

이재원의 말에 정 비서가 답했다.

“오늘 두 분이 온다고 해서 회장님이 자리를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업무시간도 끝났는데 회장님도 참···.”

“저는 괜찮습니다. 아마 강우 님이 부담스러우실까 봐 저까지 남기신 듯합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괜찮은데 말이죠.”

“역시 대범하십니다.”

정 비서가 강우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강우와 이재원이 계단을 모두 올라갔다. 넓은 정원이 나타나고 크게 지어진 집이 나타났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집의 모습에 강우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여기가 재벌 회장의 집이라 이거지?’

이재원이 강우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들어가자.”

이재원이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안쪽에서 한 명의 남성이 나왔다. 이재원을 확인한 남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재원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형님, 벌써 가십니까?”

“그래, 아버지가 가라더군.”

남성은 이재원이 말한 대진 그룹의 2남이었다. 이름은 이재중이고 나이는 이제 삼십 중반이었다. 이재원과는 딴판으로 생긴 모습에 이철금 회장을 닮아 기골이 장대했다. 이재중이 강우를 힐끗 보더니, 호기심을 드러냈다.

“바로 그 박강우라는 아이냐?”

“네, 제 친동생 같은 아이죠.”

이재원의 말에 이재중이 슬쩍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별다른 말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다만 강우를 스쳐 지나가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이재원의 옆으로 다가갔다.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지금 가면 쓰고 있는 거야.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는 그럭저럭 사람 꼴은 한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이재원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자 널찍한 실내가 나타났다. 이재원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작게 말했다.

“여기는 집은 넓은데 올 때마다 숨이 막혀. 차라리 좁은 우리 집이 훨씬 넓어 보일 정도야.”

“분위기가 조금 무겁기는 하네요.”

정 비서가 강우와 이재원을 거실로 안내했다.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거실로 향했다. 말 그대로 호화저택이었다. 내부에는 온갖 고급스러운 것들로 가득했다.

‘중국에 있는 위씨 가문의 장원만큼 화려하네.’

역시 재벌 회장이 사는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앉아서 기다리고 계시지요.”

정 비서의 안내를 받아 강우가 자리에 앉았다. 이재원이 강우를 보며 씩 웃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회장님 먼저 보고 올 테니까.”

“네.”

이재원과 정 비서가 집안의 계단을 올라 이 층으로 향했다. 혼자 남은 강우가 멀뚱히 앉아있을 때였다. 일 층의 방문이 열리고 두 명의 여성이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딱 보아하니 누군지 알 거 같았다. 분명 이재원이 그렇게 진저리를 치던 이철금 회장의 부인일 것이다.

“그래, 반갑다.”

그 옆에는 강우와 동갑이라는 이재원의 여동생이 있었다. 이재원의 여동생이 강우를 보며 짙은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재원이 오빠한테 말 많이 들었어요.”

“지우야.”

중년 여성이 이재원의 여동생 이지우를 살짝 나무랐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도 계단을 올라 이 층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이 층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이철금 회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강우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철금 회장은 선이 굵고 남자답게 생긴 얼굴이었다. 특히 진한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얼굴에는 혈색이 돌았다.

“오? 자네가 박강우 군이군? 텔레비전에서 본 거보다 훨씬 훤칠하구먼. 남자답게 잘생겼어.”

쩌렁쩌렁한 목소리도 인상적이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박강우입니다.”

이철금 회장이 자연스럽게 거실의 상석에 앉았다. 뒤따라 내려온 이재원이 강우의 옆에 앉았다.

“정 비서, 차 좀 내오지.”

“네, 회장님.”

정 비서가 주방으로 향했다. 이철금 회장이 말없이 강우를 바라보았다. 이곳저곳 자세히 뜯어보는 눈빛이었다. 강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받아냈다. 이윽고 차가 나왔다.

“차 좀 들지.”

“네, 회장님.”

강우가 찻잔을 코에 가져다 댔다. 향긋한 차 냄새에 강우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이철금 회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차향이 좋지 않은가? 나도 자주 마시는 차지. 긴장감을 풀어주고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다네.”

“네, 차향이 정말 좋습니다.”

“하하! 자네가 그렇게 오렌지 주스를 좋아한다고 하던데. 건강을 생각해서 오늘은 그 차를 마시도록 하게.”

강우가 속으로 살짝 놀랐다. 자신의 기호까지 알고 있다니 과연 많은 사람을 다루는 자리에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님, 저희 아직 식사도 못 했습니다.”

이재원의 말에 이철금 회장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녀석···. 아버지라 부르라니까.”

“....”

이재원이 묵묵히 차를 마셨다. 이철금 회장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강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의 내 아내는 두 번째 부인이네. 첫째와 둘째의 친모는 오래전 병으로 죽었지. 그리고 사별하고 혼자였을 때 세아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갑자기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강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재원을 힐끗 바라보니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아마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인 듯했다.

“하지만 세아는 연기를 갈망했고, 주변의 시선도 많았네. 결국, 우리는 헤어졌지. 먼 훗날 이 녀석이 태어났다는 걸 알았고 나도 크게 혼란스러웠네. 하지만 나는 이미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한 상태였지.”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졌다. 그리고는 미래 기억의 파편이 조금 밀려들었다.

‘그래 이철금 회장은 사업을 위해 지금의 부인과 결혼을 했었지.’

조금 전 마주쳤던 중년 부인의 집안이 재벌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김세아는 이철금 회장과 헤어지고 나서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이재원은 본의 아니게 혼외자가 돼버린 것이었다.

‘재원이 형······.’

미래의 기억 속 이재원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재원은 달랐다. 강우를 만나고 운명의 곡선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강우가 이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재원의 표정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 나도 변명이라는 거 알고 있다. 그래도 이 아비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라.”

“네···.”

이재원이 짤막하게 답했다. 이철금 회장이 이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긴 숨을 뱉어냈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거 차 향기 때문에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내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군.”

이철금 회장이 정 비서를 향해 말했다.

“주방에 가서 두 사람의 식사를 준비하라고 전해.”

“네, 회장님.”

정 비서가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이철금 회장이 차를 모두 마시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철금 회장의 눈빛이 돌연 날카로워졌다.

“뉴스는 잘 봤네. 어린 나이에도 정말 대단한 일들을 해냈더군.”

“감사합니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철금 회장이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 재원이한테 해준 조언들도 정말 대단했네. 그룹 전략본부실이 왜 있나 싶을 정도야.”

“....”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살짝은 처져 있던 이재원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우리 강우가 대단하긴 합니다. 이번 중국 투자 건도 그렇고 미디어 사업진출 건도 전부 강우 머리에서 나온 거니까요.”

“녀석아. 사업을 한다는 놈이 그렇게 정직해서야 쓰겠어? 가끔은 내가 했소. 다 내 공로요 라고 말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이철금 회장의 말에 이재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직한 게 최고의 무기라고 제 은사님에게 배웠습니다.”

강우의 입꼬리도 슬쩍 올라갔다. 이재원이 말하는 은사는 바로 신철민 교수였다. 이재원에게는 정말 친아버지나 다름없을 정도로 신경 써준 게 바로 신철민 교수였다.

“그래, 정직한 게 최고의 무기지 하지만 수만 명의 운명을 좌지우지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사업가라면 피도 눈물도 없을 때가 있어야 하는 법이야.”

“.....”

이재원이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이철금 회장도 더 설득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이철금 회장이 이번에는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자네가 도와준 덕분에 대진 그룹이 위기도 넘기고 더 성장할 수 있었네. 내 그 보답을 하고 싶은데 말이야. 그런데 조사해보니 자네는 이미 돈은 많더군. 그리고 명예도 충분히 가지고 있고 말이야. 내가 줄 수 있는 게 없더란 말이야.”

이철금 회장의 말에 이재원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를 보며 연신 싱글벙글하였다. 강우가 속으로 픽하고 웃었다.

‘하여간···. 동생 일이라면 사족을 못 써요.’

그때, 이철금 회장의 입에서 충격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오늘 자네를 부른 걸세. 사업가는 받은 게 있으면 꼭 갚아 주어야 하는 법. 어디 한번 이야기해보게. 내가 자네에게 어떤 보답을 해주면 되겠는가?”

“회장님, 그렇게 갑자기 물으시면.”

이재원이 화들짝 놀라 말했다. 이철금 회장이 손을 들어 가만히 있으라 했다. 강우가 이철금 회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제가 원하는 게 하나 있기는 합니다.”

“오? 그런가? 어린 나이에 화끈해서 좋군.”

강우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대진 그룹이 사회적 약자와 국가유공자들을 돕는 재단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이재원이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철금 회장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그래. 역시 듣던 대로 대단해. 생각의 깊이가 다르군. 좋네. 그건 내 재원이에게 일임을 하도록 하지.”

강우와 이재원이 서로를 보며 씨익 웃었다. 이철금 회장이 돌연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강렬한 눈빛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이제 선물을 주었으니 나도 궁금한 걸 하나 묻고 싶네.”

이철금 회장이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자네는 대진 그룹의 후계자로 재원이를 어찌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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