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402)

안녕히 주무세요. 아버지.

널찍한 거실에 정적이 흘렀다. 주방에서 돌아오던 정 비서가 흠칫하더니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재원이 깜짝 놀라며 이철금 회장을 바라보았다.

“회장님, 갑자기 그게 무슨···.”

“기다려 봐.”

이철금 회장이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분히 강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강우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대답을 망설일 것조차 없었다.

“지금의 대진을 키운 건 회장님입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대진을 더 크게 만들 사람은 재원이 형뿐일 겁니다.”

이철금 회장이 작게 탄성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래, 맞아. 이 녀석이 나를 닮아서 추진력이 엄청나지 그리고 사업을 보는 감각도 탁월하고 말이야. 첫째는 너무 안정적이기만 하고 둘째 녀석은···.”

이철금 회장이 이재중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머리가 지끈 아픈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넓은 거실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내 자네에게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말씀하십시오.”

“나는 이미 재원이를 내 후계자로 결정지었네.”

폭탄선언에 집 안이 얼어붙었다. 이 층에서는 누군가의 작은 비명도 들려왔다. 강우와 이재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철금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후계자 다툼은 끝났지만, 자네가 지금처럼 재원이 옆에서 도움을 줄 수 있겠나?”

“당연합니다. 재원이 형은 제 가족이니까요.”

강우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 강한 신뢰감에 이철금 회장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강우와 이재원을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능력 있는 조언자를 만들라고 했더니 가족이 생겼군. 다행이야. 그럼 조만간 전략본부실에 자리를 하나 비워놓겠네.”

이재원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라 부르라니까.”

“......”

이재원이 침묵했다. 이윽고 잠깐의 침묵 끝에 이철금 회장이 강우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우리 회사에 옭아매겠다는 생각은 아니네. 강우 군이 하고 싶은 대로 지금처럼 자유롭게 활동하면 되네. 그저 재원이를 옆에서 도와주려면 그럴싸한 직책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부담 갖지 말고 명함 하나 얻었다고 생각하게.”

강우가 씩 웃었다. 이렇게까지 부탁하는 데 거절할 수는 없었다.

“네, 그 정도라면 저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철금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이재원은 강우를 보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 강우야.”

“허허···. 이 녀석이 이게 미안할 일이야?”

이철금 회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대진 그룹의 전략본부실이라면 핵심 중의 핵심 부서였다. 대진 그룹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부서였다.

“형, 무슨 말이에요? 우린 가족이잖아요? 당연히 도와야죠.”

“강우야···.”

이재원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떠올랐다. 이철금 회장이 헛기침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나도 아들이 한 명 더 생겼다고 생각하지.”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강우의 말에 거실의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분위기가 풀리자 정 비서가 다시 주방에서 나왔다.

“회장님, 두 도련님 식사가 준비됐습니다.”

“아 그래?”

이철금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들 먹으러 가자.”

강우와 이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 들어선 강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넓은 주방의 중앙에는 커다란 식탁이 놓여있었다.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는 식탁이었다. 넓은 식당은 마치 중세 시대 귀족 집안의 식당을 보는 듯했다.

“봤지? 내가 이래서 여기서 먹으면 체할 거 같다니까?”

이재원이 강우의 귀에 소곤대듯 말했다. 이철금 회장이 다시 헛기침했다.

“자리에 앉지.”

강우와 이재원이 자리에 앉았다. 주방을 담당하던 인력들이 강우와 이재원의 앞에 놓인 물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고맙습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하자 물을 따르던 여성이 싱긋 웃었다.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했습니다. 맛있는 식사 되세요.”

“네, 잘 먹겠습니다.”

이철금 회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이거 곽 집사가 신경을 많이 썼구먼.”

“네, 회장님. 오늘 특별한 손님이 오신다고 해서 미리 준비해놓은 재료들입니다.”

“좋아. 내가 이래서 곽 집사를 좋아한다니까. 자자 어서들 먹자.”

식사가 시작됐다. 곽 집사라 불린 여성의 말처럼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강우는 담담히 음식을 먹었다. 겉보기는 눈이 휘둥그래질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맛은 어머니가 해준 음식만 못했다. 강우가 힐끗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이재원의 표정에도 어머니의 된장찌개를 그리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식사를 마친 강우가 현관을 나서며 인사했다. 이철금 회장이 강우를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다음에 또 놀러 와라.”

“네.”

이철금 회장은 짧은 시간 강우에게 흠뻑 빠져버렸다. 식사 내내 나누었던 사업 이야기에서 강우의 진가를 알아버렸다. 강우의 사업에 대한 비전과 전략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미래의 기억을 아는 강우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것이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이재원도 강우를 따라나섰다. 이철금 회장의 얼굴에 아쉬움이 짙어졌다.

“넌 자고 가지 그러냐.”

“다음에요. 오늘은 강우도 집에 데려다줘야 하고요.”

“그래 알겠다.”

강우가 현관을 나섰다. 이재원이 뒤를 따라 현관을 나서다 멈칫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고 어색하게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버지.”

그 말을 끝으로 이재원이 후다닥 강우의 뒤를 따랐다. 잠시 멍하던 이철금 회장의 얼굴에 스르륵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리고는 이재원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녀석···.”

이윽고 주차장에 강우와 이재원이 나타났다.

“타라. 데려다줄게.”

“네.”

강우와 이재원이 차에 올라탔다. 강우가 힐끗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이재원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후련함이 떠올라 있었다.

부우웅.

이재원의 차가 주차장을 벗어나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강우는 오전 일찍 강의를 끝냈다. 강의를 끝낸 강우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한쪽에 집에서 끌고 나온 승용차가 있었다. 강우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는 창문을 내렸다. 산뜻한 봄바람이 밀려들었다.

“바람 좋다~”

강우가 시동을 끄고는 의자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두 눈을 감고 밀려오는 봄바람을 만끽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주차장의 한쪽에서 연정호가 뛰어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연정호가 곧 강우의 차를 발견했다.

“강우야!”

깜빡 잠이 들었던 강우가 눈을 스르륵 떴다. 고개를 슬쩍 돌린 강우가 피식 웃어버렸다. 유독 옷차림에 신경 쓴 연정호가 달려오고 있었다. 강우가 의자를 원위치로 올렸다.

“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연정호가 멋쩍게 웃었다.

“강의 하나 쨌다.”

“어···. 어? 네가 강의를 쨌다고?”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연정호가 누구던가? 고등학교 내내 책상과 혼연일체가 되었던 극한의 공붓벌레였다. 그런 연정호가 강의를 빠졌다고 하니 놀랄 만도 했다.

“괜찮아. 어차피 교양이라 한 번쯤 빠져도. 그리고 동기가 대출해주기로 했다.”

“그러냐.”

강우가 픽 웃었다. 그리고 조수석 쪽을 툭툭 쳤다. 연정호가 조수석 쪽으로 와서 차에 탔다. 강우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

“안전띠 매라.”

“어어.”

이 시기의 운전자들은 안전띠 매는 것을 소홀히 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래의 기억이 있는 강우는 이런 면에서는 칼 같았다. 연정호가 안전띠를 매자 강우가 차를 출발시켰다.

부우웅.

차는 빠르게 서울대를 벗어났다. 연정호도 창문을 내리고 봄바람을 만끽했다. 강우가 핸드폰을 꺼내 연정호에게 내밀었다.

“춘배한테 전화해라. 우리 출발했다고.”

“어어.”

연정호가 강우의 핸드폰을 받아 김춘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지금 출발했고, 금세 도착한다는 대화를 나누었다. 통화를 마친 연정호가 다시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그렇게 좋냐?”

“어, 중간고사 기간에 학교도 멀고 집도 멀어서 자주 못 봤거든.”

“민정이 집이 어딘데?”

조민정은 연정호가 미팅에서 만났던 여학생의 이름이었다. 지금은 서로 교제를 하는 중이었다. 역시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다니는 조민정이었다. 안성캠퍼스에 학교가 있어 연정호도 자주 못 만나고 있다.

“뚝섬.”

“아···. 멀다 멀어. 나은이랑 통학 거리가 크게 차이 안 나네.”

“어, 민정이도 통학하느라 매일 죽을 맛이라더라.”

강우는 곧장 안성으로 향했다. 오늘은 강우와 김춘배 그리고 연정호까지 세 커플의 데이트가 있는 날이었다.

“벌써 다 왔네.”

잠시 후, 차량이 안성에 도착했다. 강우는 근처의 꽃집에 들러 꽃을 세 다발 샀다. 연정호가 꽃다발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세 개나 샀어?”

“하나는 네 거다.”

“아···. 그럼 하나는 강우 네 거고 나머지 하나는?”

“하나는 춘배 거.”

“와···. 너 진짜 대박이다.”

연정호가 미처 생각 못 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별일 아니라는 듯 씩 웃었다.

“여자들은 작은 정성에 감동하는 거야. 큰 거 하나로 때우려고 하지 말고 세세하게 작은 것부터 잘 챙겨주라고.”

“어···.”

연정호가 한 수 배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강우의 차가 안성캠퍼스에 도착했다. 캠퍼스 안에도 봄기운은 완연했다. 강우가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다.

탁. 탁.

강우와 연정호가 차에서 내렸다. 강우가 캠퍼스를 쓱 둘러보며 감탄했다. 지방 캠퍼스 중에 순위권을 다투는 시설의 안성캠퍼스였다.

“도서관 웅장하네.”

특히 한쪽으로 보이는 도서관 건물에 시선이 갔다. 연정호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긴 해도 캠퍼스가 이쁘니까 학교 다닐 맛은 나겠다.”

“그러게.”

대화를 마친 강우가 김춘배에게 전화해 위치를 알려주었다.

“강우야!”

잠시 후, 김춘배가 손을 마구 흔들며 다가왔다. 김춘배의 옆에는 이나은과 조민정 그리고 김혜지가 있었다.

“강우야.”

이나은이 강우에게 달려왔다. 강우가 좋아하는 원피스를 입은 이나은은 정말 예뻤다. 강우의 얼굴에 스르륵 미소가 번져나갔다. 이나은의 얼굴에도 살짝 홍조가 떠올랐다.

“잘 지냈어?”

“응.”

“아···. 잠깐만.”

강우가 차에서 꽃다발을 꺼냈다. 그리고 이나은을 향해 내밀었다. 이나은이 손을 들어 입을 막더니 꽃다발을 받았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연정호가 이때다 싶어 꽃다발을 꺼냈다.

“민정아.”

“어머? 정호 너도 사 왔어?”

연정호의 성격을 아는 조민정이 살짝 놀라며 꽃다발을 받았다. 김춘배가 살짝 당황했다. 그러자 강우가 씩 웃었다.

“나은아 잠깐만.”

강우가 차에서 나머지 꽃다발을 꺼냈다. 그리고는 김춘배를 향해 내밀었다.

“네가 사 오라고 한 거 여기 있다.”

“아···. 아?”

김춘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연정호가 슬쩍 김춘배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아아! 맞다.”

김춘배가 꽃을 받아 김혜지에게 주었다. 김혜지가 싱긋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이나은이 강우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참 배려심이 많은 아이라는 걸 다시 느꼈다.

“그럼 오늘 합동 데이트 코스는 춘배가 정하는 건가?”

연정호의 말에 여학생들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합동 데이트라니 어감이 참 이상했다. 하지만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일단 이동해야 하니까 차에 타자.”

강우와 일행이 차에 올라탔다. 앞자리에는 강우와 연정호가 앉았다. 뒷자리에는 여학생 세 명이 앉았다. 그러자 차가 꽉 차 버렸다. 마지막으로 타려던 김춘배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디에 타?”

연정호가 창문을 내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 강우는 운전해야 하고 나는 여기 지리를 모르고 그렇다고 여자애들을 걸어오라고 할 수는 없잖아.”

“아···. 맞네.”

김춘배가 머리를 긁적이며 김혜지를 바라보았다. 애처로운 김춘배의 표정에 김혜지가 차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자 조민정이 손을 뻗어 김혜지를 막았다.

“혜지야, 저거 연기야. 춘배 연기 실력 잘 알지?”

“아···. 그런가?”

김혜지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춘배야, 조금 이따가 보자.”

그 말을 끝으로 강우가 차를 출발시켰다. 혼자남은 김춘배가 차를 향해 소리쳤다.

“야야! 어디 가는지 말은 해주고 가야지!!”

멀어져 가는 차를 보며 김춘배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터벅터벅 캠퍼스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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