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402)

그걸 아직도 믿어요?

강우는 이나은을 집으로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집에는 이재원이 와 있었다. 아버지와 마주 앉은 이재원은 간단한 안주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크…. 아버지, 제가 있었어야 다 모이는 건데요.”

“그러니까 말이야. 큰아들이 없어서 조금 허전했지.”

아버지와 이재원의 옆에는 어머니가 앉아있었다. 어머니는 연신 싱글벙글하였다. 아들의 첫 여자친구가 참 마음에 든 탓이다.

“저도 한 잔 줘요.”

어머니는 평소 잘 하지도 않던 맥주까지 한잔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앞에는 과자봉지가 놓여있었다. 어머니는 맥주를 먹을 때는 꼭 과자와 함께 먹고는 했다. 강우가 슬쩍 주방으로 다가갔다.

“어? 강우 왔냐?”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문 열고 들어오는 것도 몰라요?”

강우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버지가 강우의 몫으로 놓았던 맥주잔을 쓱 내밀었다. 강우가 잔을 받자 아버지가 맥주를 따라주었다.

“아들, 장하다. 나은이가 아주 착하고 예의 바르더구나. 참 예쁘기도 하고.”

강우가 말없이 웃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미 불콰하게 취한 얼굴에는 흐뭇함이 가득했다. 할아버지와 최준과 함께 식사하며 반주를 한 탓이었다.

“할아버지들은요?”

“피곤하시다고 들어가셨지.”

아버지가 닫혀있는 두 개의 방문을 보며 말했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시선을 맞추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자 건배.”

아버지가 잔을 내밀었다. 강우와 어머니 그리고 이재원의 잔이 아버지의 잔으로 다가가 ‘쨍’ 하는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어머니가 맥주를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눈앞에 놓인 과자를 집어 먹었다.

“아들 나가고 할아버지들이 나은이 칭찬을 얼마나 하시던지 참 마음에 드셨나 봐.”

“그래요?”

“응, 아들 엄마는 많은 거 안 바래. 아직은 학생이니까 예쁘게 연애해. 알겠지?”

“네, 엄마.”

어머니가 강우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평소 감정 표현이 그리 크지 않은 어머니였다. 하지만 이렇게 술을 마시고 나면 아낌없이 애정표현을 해주고는 했다. 지금도 강우를 보는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래, 그렇게 매 순간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고 제일 중요한 건 정직해야 하고. 대화도 많이 나누고. 그러다 보면 좋은 인연으로 맺어질 거야.”

“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엄마는 강우가 어떤 선택을 하던 항상 믿으니까.”

어머니의 신뢰가 담긴 말에 강우의 가슴이 찌릿해져 왔다. 이재원이 어머니를 보며 감탄을 했다.

“우리 어머니가 맥주 드시니까 정말 말을 잘하시네요. 이거 저도 칭찬받을 일 생기면 어머니랑 맥주부터 한잔해야겠는데요?”

“우리 재원이도 잘했지. 오늘 뉴스 보고 우리가 얼마나 감동이었다고.”

어머니가 이재원도 푸근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재원이 민망한 듯 볼을 긁적였다.

“그거 다 강우가 저희 아버지한테 말해서 만든 거예요.”

이재원의 말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이야?”

“저번에요. 잠깐 집으로 부르셔서 다녀왔잖아요. 그때 나온 이야기였어요.”

“그래? 아빠랑 엄마는 몰랐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견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말하려고 했는데 깜빡했어요.”

“괜찮아. 그래, 회장님 만나 보니까 어땠어?”

아버지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재원의 친아버지이기도 하니 궁금했다. 강우가 이재원을 힐끗 바라본 뒤 입을 열었다.

“알려진 대로 화끈하시더라고요. 그동안 재원이 형 도와준 거 고맙다고 선물 주신다고 하길래 재단법인 만들어 달라고 했거든요.”

“그랬구나. 그랬어.”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강우를 향해 물었다.

“우리 아들 회장님 만나러 가서 예의 바르게 잘하고 왔지?”

“아이고~ 어머니 걱정할 거 하셔야죠. 우리 아버지가 강우 마음에 든다고 하셨어요. 사실 제 여동생이랑 이어주고 싶다고 하시는 거 제가 여자친구 있다고 간신히 뜯어말렸어요.”

이재원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원이 말을 이어갔다.

“그뿐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강우에게 전략지원팀 팀장 자리도 내주셨어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진 그룹의 전략지원팀의 팀장이라면 임원급 자리였다. 특히 아버지가 매우 놀란 눈치였다.

“허…. 회장님이 우리 강우가 마음에 무척 드셨나 보다. 전략지원팀 팀장이라면 전무급인가?”

“네, 아버지.”

이재원의 말에 어머니가 강우를 보며 대견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스무 살에 대학교 1학년인 강우는 그야말로 거침없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우리 아들 정말 대단해. 엄마가 너무 기쁘네.”

어머니가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마치 꿈처럼 일어난 지금까지 모든 일이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어머니의 빈 잔을 채워드렸다.

“엄마, 이제 시작이에요. 아들이 더 크게 멀리 뻗어나가는 거 지켜봐 주세요.”

“그래, 우리 아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야.”

이재원이 흐뭇하게 강우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남들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시작이라는데 우리 강우랑 재원이는 참 대단해.”

그렇게 술자리가 조금 더 이어졌다. 이재원은 오늘 강우네 집에서 자고 간다고 했다. 예전이라면 강용이가 강우와 자고 이재원이 강용이의 방에서 잤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강용이가 부모님과 함께 자고 이재원은 강우의 방에서 자기로 했다.

“그래, 둘이 또 사업 이야기한다고 밤새우지 말고 일찍들 자.”

어머니가 침대 아래에 정성스레 이부자리를 펴주며 말했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강우와 이재원이 알겠다며 절도 있게 대답했다. 역시 집안의 대장은 어머니였다.

“잘 자, 우리 아들들.”

어머니가 방문을 닫고 나갔다. 강우가 침대를 슬그머니 가리켰다.

“형이 침대에서 자요.”

“오케이.”

이재원이 거절도 없이 단번에 침대로 몸을 던졌다. 강우가 픽하고 웃은 뒤 이부자리에 누웠다. 방 안으로 알싸한 술 냄새가 차올랐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술을 마신 탓에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컴컴한 방의 창가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구름에 가렸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나 보다.

“자냐?”

이재원이 슬쩍 몸을 돌리더니 아래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두 눈을 감은 채 답했다.

“네, 잡니다.”

“뭐냐?”

이재원이 실소를 흘렸다. 강우가 눈을 스르륵 뜨더니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왜요? 엄마 말 들었죠? 일찍 자라고.”

“늦게 자도 일찍 일어나면 되지.”

“착한 사람 되기는 글렀네.”

강우와 이재원이 동시에 실소를 흘렸다. 그러자 이재원이 슬쩍 입을 열었다.

“재단법인 말이야. 우리 동호회랑 연계해서 일단 봉사활동이랑 어려운 사람들 장학금 지급하는 거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정말요? 역시 형네 아버지 일 처리 하나는 화끈하네요.”

이재원이 양손을 머리 뒤로 넘겨 팔베개했다. 그리고는 천장을 보며 눈을 빛냈다.

“맞아. 그런데 그거 아냐? 아버지가 그렇게 일 처리를 하는데 내가 속이 시원하더라고. 내가 했어도 저렇게 했겠다 싶은 게….”

이재원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자 강우가 말을 이어받았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거죠?”

“그래.”

이재원의 목소리가 살짝 무거워졌다. 많이 떨쳐냈다고는 했지만, 세월의 응어리가 모두 녹아내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강우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어머니는요? 어제 이야기 들으니까 새 연극 공연 시작한다고 하시던데요?”

“응, 요즘 아주 생기가 넘치셔. 드디어 자기 자리를 찾으신 거지.”

“다행이네요. 사실 좀 걱정했거든요.”

강우의 말에 이재원이 긴 숨을 뱉어냈다. 김세아가 도망치듯 은퇴한 이후 정말 많은 풍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점점 풍문들도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런 김세아가 다시 돌아왔다. 아직은 복귀한 것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탓에 잠잠한 것일지도 몰랐다.

“뭐…. 그룹 쪽에서 그동안 떠돌던 이야기들은 다 잠재워놓았으니까. 그리고 이미 떠도는 소문에 대한 사람들 관심도 사라진 지 오래고.”

“그래도, 어머니는 금세 다시 시선을 끄실 거예요.”

강우는 김세아가 다시 자리를 잡을 것이라 확신했다. 김세아가 가진 연예인으로서의 능력은 그만큼 대단했으니까.

“아마 본인이 싫어하실 거야. 그냥 연극판에서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하시더라고.”

강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저한테 좋은 생각 있어요.”

“생각?”

이재원이 눈을 빛냈다. 또 도깨비방망이 같은 강우의 입이 열리고 있었다.

“대진 미디어 소속으로 종합 엔터테인먼트 부서를 하나 만들죠. 연예인들도 본격적으로 키우고 아이돌 그룹도 만들고 어머니도 형네 회사에서 매니지먼트 해주고요.”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

이재원이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또 영화감독도 스카우트해서 영화도 만들고요. 아, 멀티플렉스 사업에도 진출하고요.”

“멀티플렉스? 아~ 얼마 전에 강변에 개관했다던 그 상영관?”

아직 한국에는 멀티플렉스라는 개념이 희박했다. 얼마 전 이나은과의 종로 데이트 때처럼 개별 상호를 가진 일반 극장들의 시대였다. 하지만 강우는 미래의 기억으로 잘 알고 있었다. 영화관 사업은 멀티플렉스의 독주체제로 간다는 것을 말이다.

‘세일제당이 SJ라는 법인으로 먼저 뛰어들었고, 다른 대기업들도 앞다투어 뛰어든다. 조금 늦으면 그때는 승부를 볼 수 없을 거야.’

강우가 눈을 빛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앞으로 문화 산업은 점점 개별이 아닌 복합적이고 서로 상호보완적인 형태로 흘러갈 거예요. 단순하게 영화, 음악, 연예계 이렇게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 돼요. 그 모든 걸 하나로 묶어서 종합적으로 관리하고 투자할 필요가 있어요.”

강우의 말에 이재원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도저히 누워서 들을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강우의 입에서는 그야말로 새로운 개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우야, 너는 자다가도 그런 생각이 마구 떠올라? 진짜 외계인이냐?”

“그걸 아직도 믿어요?”

강우가 픽하고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재원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회사에 직함 주고 붙잡아 두길 잘했어. 다른 곳에서 너 알아보고 채가면 어쩔 뻔했냐.”

“내가 무슨 물건입니까?”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 맞지. 아주 걸출한 국보급 물건.”

연신 감탄성을 뱉어내던 이재원이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회사는 언제 올 거야? 전략지원팀 사람들이 너 궁금하다고 난리야. 천재 중의 천재 사업 전략가라고 소문이 자자하거든.”

“천재는 무슨요…. 나보다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소리야. 나는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그 말을 끝으로 이재원이 다시 자리에 벌러덩 누웠다. 강우도 몸을 누였다.

“회사 언제 갈까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월요일 어때?”

“네, 그러죠.”

이재원이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좀 미안하긴 한데.”

“미안하다고요?”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재원이 강우의 회사를 언급했다.

“동양 무역 말이야. 나 도와주느라 시간 없어서 신경 못 쓰는 거 아니야?”

이재원의 말에 강우가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별걱정을 다 하네요. 회사가 얼마나 잘 돌아가는데요.”

“그래?”

“네, 아버지랑 마사토 아저씨가 있잖아요. 직원들도 유능하고요. 걱정할 거 없어요.”

강우의 말대로였다. 동양 무역은 그야말로 승승장구 중이었다. 먼저 일본의 김치 사업은 점점 반응이 오고 있었다. 납품을 원하는 백화점이 점점 늘어났고, 기무라에게 소개받은 유통회사를 통해 일본 전역에 김치를 퍼트리고 있었다.

‘마사토 아저씨가 엄청 바쁘다고 그러셨는데.’

매출도 폭발적인 성장세였다. 동양 무역은 일본의 김치시장을 선점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앞으로 몇 배는 커질 김치시장에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이제 다른 식품 수출도 슬슬 준비해야겠는걸.’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 끄는 한국산 식품들을 강우는 모두 알고 있었다. 미래의 기억 속 한류라 불리는 것들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동양 무역은 쭉쭉 뻗어나가고 있었다.

“아 맞다. 그리고 저번에 뉴스 나가고요 우리 회사에 후원금 보내준 분들이 많거든요. 좋은 일에 써달라고요. 그거 재단에….”

강우가 말을 멈추고 몸을 슬쩍 일으켜 침대를 확인했다. 이재원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얼굴 가득 평온해 보이는 이재원의 모습에 강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좋네. 다들 행복해지고.’

강우가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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