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그렇게 되나요.
강우와 뷔욤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뷔욤의 손에는 기다란 닭꼬치가 들려있었다. 뷔욤의 입에서 조금은 어설픈 영어가 흘러나왔다. 뷔욤은 캐나다 퀘벡 출신이었다. 프랑스계이기에 영어보다는 불어가 익숙했다. 하지만 영어를 아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간단한 의사소통이야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와~ 이거 무슨 음식입니까? 정말 맛있습니다.”
“비둘기 고기입니다.”
강우의 농담 섞인 말에 뷔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자 옆에서 걷고 있던 아버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닭입니다. 닭.”
“아···. 감사합니다.”
뷔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강우의 옆에 착 달라붙어 걷던 강용이가 뷔욤을 보며 어설픈 영어로 물었다.
“맛있어요? 이것도 먹어보세요.”
강용이가 뷔욤에게 컵에 담긴 떡볶이를 내밀었다. 뷔욤이 떡볶이를 받아들더니 하나를 집어먹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
“으아···.”
강우가 재빨리 물을 내밀었다. 뷔욤이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매운 걸 먹는데 괜찮아?”
“네.”
강용이의 멀쩡한 모습에 뷔욤이 탄성을 뱉어냈다. 한국인들은 정말 매운 것을 잘 먹는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자신의 손에 들린 닭꼬치도 살짝 매운맛이 나지 않던가.
“한국인들은 정말 매운맛을 좋아하는군요.”
그때, 아버지가 캠퍼스의 한쪽을 가리켰다. 넓은 잔디밭에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저기가 좋겠다.”
강우 가족이 잔디밭의 한쪽에 돗자리를 깔았다. 아버지가 오전부터 메고 다니던 커다란 배낭을 내려놓았다.
“어디 한번 꺼내 볼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배낭에서 먹을 것을 꺼내기 시작했다. 커다란 배낭에서 도시락통이 끝없이 나왔다. 돗자리 위가 금세 만찬장이 돼버렸다.
“우와~ 맛있겠다.”
강용이가 도시락을 보며 좋다고 소리쳤다. 어머니가 도시락통을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김밥과 유부초밥 그리고 튀김 고로케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이 정도면 다 먹겠죠?”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와 최준의 앞쪽에는 별도로 도시락통이 배달됐다.
딸칵.
도시락통이 열리자 할아버지와 최준을 위한 특별식이 나타났다. 어머니가 정성 들여 만든 전복죽이었다.
“와···.”
어머니의 엄청난 스케일에 뷔욤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강우가 뷔욤을 자신의 옆에 앉혔다. 뷔욤이 음식에 관해 관심을 드러냈다.
“이거 드셔보세요.”
강우가 뷔욤에게 김밥을 권했다. 뷔욤이 김밥을 먹더니 두 눈을 크게 떴다.
“맛있네요.”
“그렇죠? 많이 드세요.”
뷔욤이 살짝 민망한 표정을 하더니 밥을 먹기 시작했다. 따사로운 오월의 햇살을 받으며 강우 가족의 점심 피크닉이 이어졌다. 밥을 먹으며 연신 행복해하는 가족의 모습에 뷔욤이 자신의 집을 떠올리며 그리워했다.
“강우 씨는 참 좋은 가족을 두셨군요.”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잠시 후, 점심을 모두 먹은 강우 가족은 다시 축제를 즐기러 떠났다. 뷔욤은 캠퍼스의 곳곳을 다니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근 주종족을 바꾼 겁니까?”
강우의 질문에 뷔욤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네, 요즘은 사이버 토스로 주로 플레이합니다.”
뷔욤의 주종족은 원래 남재식의 주종족인 크리쳐라는 외계 생명체 종족이었다. 사실 뷔욤은 모든 종족을 다 잘 다루는 랜덤 플레이어라 할 수 있었다. 미래의 기억에서 알려진 대로라면 연습을 게을리하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진짜 재능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거지.’
연습을 게을리한 이유도 간단했다. 스페이스 크레프트라는 리그가 그렇게 장기간 흥행할 줄은 몰랐다는 것이었다. 강우가 뷔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뷔욤을 제대로 연습시키면 어떤 실력을 갖추게 될지도 궁금했다.
“뷔욤 씨는 실력이 뛰어나니 앞으로 프로게이머로서의 장래가 밝을 겁니다. 연습만 조금 열심히 한다면요.”
“연습이요?”
뷔욤이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강우가 자신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 게 신기했다.
“저는 그냥 좋아하는 게임을 즐기면서 상금도 타고 그게 좋아서 게임을 하는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유럽 대회에서 우승 많이 하셨죠?”
“네, 다른 스포츠 대회처럼 상금이 크거나 그렇지는 않지만, 여기저기 다니면서 여행도 하고 돈도 벌고 좋죠.”
뷔욤이 씩 웃었다. 사실 유럽의 대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시들해진다. 하지만 한국에서 시작된 E-SPORTS 열풍은 곧 세계를 강타할 것이다.
“그 상금이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억 단위를 넘게 된다면 어쩌겠습니까?”
“네? 십만 달러요?”
아직은 어린 나이인 뷔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게임 대회로 억대 상금이라니 아직은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한국의 대기업인 대진 미디어에서 이제 프로리그를 만들 겁니다. 이번 축제에서 열린 대회는 그 시범 격인 대회죠. 앞으로 대회 규모는 물론 상금 규모도 커질 겁니다. 그래서 제가 프로 게임단을 창단하려고 하는 거고요.”
“음···.”
뷔욤의 얼굴에 호기심이 짙어졌다. 강우가 씩 웃었다.
“제가 만들 팀에 프로 선수 계약을 할 예정인 사람들입니다.”
강우가 임요한과 홍인호의 온라인 아이디를 슬쩍 알려주었다. 뷔욤의 얼굴에 호기심이 짙어졌다. 임요한과 홍인호의 아이디는 뷔욤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흥미롭네요.”
“있다가 저한테 자세한 내용이라도 듣고 가세요. 꼭 계약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뷔욤 씨의 인생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겁니다.”
뷔욤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스페이스 크페프트 대회가 끝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강우야, 이제 너 밴드 공연할 차례라고 하지 않았어?”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물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강우의 모습은 가족들에게도 새로운 것이었다.
“네, 이제 슬슬 가서 준비해야 해요.”
강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나은아, 엄마랑 같이 있어.”
“응.”
강우가 뷔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영어로 지금 자신이 공연하러 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뷔욤이 잠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 씨는 서울대 학생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그럼 학생에 가수에 프로게이머에 그리고 사업가입니까?”
말을 하던 뷔욤이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눈앞의 남자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다.
“음···. 따지고 보면 그렇게 되나요.”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뷔욤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울 거 같은데 잠시 제 가족이랑 있으실 수 있죠?”
“네, 마침 저도 밴드 음악 좋아합니다. 멋진 무대 기대할게요.”
강우가 씩 웃었다. 그리고는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강용이가 뷔욤에게 슬쩍 다가와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뷔욤이 고개를 돌려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이거는 안 매워요. 먹어봐요.”
강용이가 양손에 들린 솜사탕 중 하나를 뷔욤에게 내밀었다. 한국인의 정일까 아니면 이 가족이 특이한 걸까? 참 따듯하고 친절한 사람들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뷔욤이 강용이를 보며 귀엽다고 생각했다.
“고마워.”
* * *
지이이잉-
캠퍼스로 기타 소리가 퍼져 나갔다. 축제의 대미를 장식할 밴드 공연이 시작된 것이다. 무대 위에는 따이빙 굴비 본선에 진출한 밴드들의 무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준비됐지?”
무대 아래서 김석현이 강우와 밴드원들을 보며 물었다. 잔뜩 긴장한 모습의 김석현이었다.
“선배님이 더 긴장해 보이는데요?”
강우가 김석현을 보며 말했다. 김석현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오늘 경영학과 밴드부의 역사가 바뀌는 날이니까. 긴장되지.”
“걱정하지 마세요. 순위 매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좋은 무대 하고 내려올게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재원과 얼굴들’의 차례가 되었다. 강우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무대 위로 올라갔다. 밴드원들도 강우의 뒤를 따라왔다. 무대에 오른 밴드원들이 악기 세팅을 하기 시작했다.
-박강우! 박강우!-
-이재원! 이재원!-
서울대생들이 강우와 이재원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처음 서울대 축제를 개혁하겠다고 했을 때 믿는 학생들은 적었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시도가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강우와 이재원이 해낸 것이다.
-안녕하세요! 학우 여러분 이재원과 얼굴들의 뜨거운 가슴 박강우입니다.-
강우의 자기소개에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이재원이 재치 있게 말을 이어받았다.
-이재원과 얼굴들에서 진짜 얼굴인 이재원입니다.-
다시 폭소가 이어졌다.
-저희는 팔다리입니다.-
밴드원들의 소개까지 이어지고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강우가 픽하고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 먼저 이번 축제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나서 정말 기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을 우리 밴드가 장식할 수 있게 열심히 투표해준 학우 여러분들에게도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강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이번 축제 때 벌어들인 수입들은 모두 어려운 결손가정과 불우 이웃들을 위해 사용될 예정입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축제 참여가 큰 변화를 만들어 낼 겁니다. 진짜 존경합니다. 학우 여러분!-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강우가 뒤를 보며 신호를 보냈다. 드럼의 리드를 시작으로 연주가 시작됐다. 강우가 차분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곽창식이 작곡한 신곡이었다. 감미로운 멜로디의 노래가 강우의 목소리를 통해 캠퍼스에 울려 퍼졌다. 노래를 듣는 서울대생들이 하나가 되어 손을 흔들었다. 그 잔잔한 물결에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재원이 강우를 보며 씩 웃었다. 강우도 이재원을 보며 씩 웃었다.
그렇게 전설로 남을 서울대 축제의 새로운 출발이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강우가 눈 앞에 펼쳐지는 물결을 보고는 기분 좋은 감정을 느꼈다.
‘뭐···. 일단 서울대 축제 바보 탈출은 대성공이네.’
서울대의 미래까지 바꿔놓은 강우였다.
* * *
그날 저녁 강우 가족을 태운 승합차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강우 가족의 집이 있는 아파트 동에 멈춰선 승합차의 뒷문이 열렸다.
“읏차.”
강용이가 땅에 점프하듯 내려섰다. 그 뒤를 어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최준의 차례로 내렸다.
“그럼 우리는 회사에 다녀올게.”
아버지가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네, 잘 다녀와요.”
아버지와 강우가 할아버지와 최준을 향해 인사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들 다녀와라.”
강우가 차를 출발시켰다. 승합차는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도로에 들어섰다. 아버지가 기지개를 크게 켜며 하품을 했다. 오전부터 계속된 나들이에 조금은 피곤해 보였다.
“아들은 안 피곤해?”
“네, 멀쩡해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뒤로 젖혔다.
“아빠 조금만 잘게. 회사 도착하면 깨워줘.”
“네, 주무세요.”
아버지가 금세 잠이 들었다. 강우가 힐끗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많이 피곤하신가 보네.’
그럴 만도 했다. 아버지는 정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본의 김치공장은 그야말로 주문이 폭주하고 있었다. 공격적인 마케팅과 한국의 맛을 고수한 것이 다른 김치들과 차별점이 되었다. 그리고 강우가 고안한 일본인들을 위한 소포장 판매도 주요했다.
‘조금 나중에 지으려던 공장도 짓고 있고. 이제 돈을 쓸어 담을 일만 남은 건가.’
이바라키현에 있는 공장에는 나중을 위해 비워놓았던 부지가 있었다. 밀려드는 주문에 비어있던 부지에도 새 건물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더 좋은 소식도 있었다.
‘일본 남부 지방에도 김치공장을 세울 계획이라고 했지.’
일본에 진출한 김치 사업은 대성공이었다. 그리고 강우는 다음 사업 아이템으로 몇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부우웅.
도로 위를 빠르게 달린 승합차가 곧 명동에 있는 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아버지, 다 왔어요.”
“으음···. 그래?”
아버지가 잠에서 깨어났다. 강우가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아버지도 차에서 내렸다.
“축제 끝나자마자 회사에 와서 어쩌나? 뒤풀이도 있을 텐데.”
“계약만 금세 끝내고 빨리 가봐야죠.”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지금 강우의 핸드폰은 불이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여기저기서 강우를 부르는 통에 난리가 났다. 강우가 회사 건물로 들어섰다.
“이사님!!”
강우가 오랜만에 나타나자 사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잘 지내셨죠?”
강우의 말에 곳곳에서 직원들의 말이 들려왔다.
“이사님, 일이 너무 바빠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이러다가 일본에 있는 돈 저희가 다 쓸어 담겠습니다.”
직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지도 흐뭇하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이 사람들이 강우만 보이고 사장은 보이지도 않는가 보네?”
“앗! 사장님~”
직원들이 아버지를 반겼다.
“오늘 우리 아들이 축제에서 말이야.”
아버지가 강우의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농구대회에서 우승한 것 스페이스 크레프트 대회에서 우승한 것 그리고 밴드 공연까지 강우 자랑을 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상기되어있었다.
“오늘 내가 기분이 너무 좋네. 우리 오늘 회식할까? 아! 물론 참석하고 싶은 사람만 참석!”
직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동양 무역의 회식은 그 분위기도 남달랐다. 술을 먹고 죽자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맛있는 것을 먹고 놀고 싶은 만큼만 놀다 가는 것이 바로 동양 무역의 회식이었다. 그리고 이런 회식 분위기는 강우가 주도해서 만든 것이었다.
“그럼 다들 즐겁게 회식하세요.”
강우의 말에 직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강우는 참석 안 하는지 물었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학교 뒤풀이가 있다고 했다.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금세 이해했다.
“아···. 그리고 오늘 저 찾아온 사람들 있죠?”
강우의 질문에 직원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네, 지금 회의실에서 기다리고들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강우가 씩 웃고는 회의실로 향했다. 문 앞에 선 강우가 짧게 심호흡을 했다. 임요한과 홍인호는 분명 왔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뷔욤이 왔을지는 알 수 없었다.
덜컥.
강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확인한 강우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다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