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우리 회사 와라.
사라락. 사라락.
회의실에 서류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강우는 회의실에 앉아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앞에는 임요한과 홍인호 그리고 뷔욤이 앉아있었다.
“서류는 꼼꼼히 읽어봐. 그리고 오늘 바로 사인하라는 거 아니야. 집에 가져가서 부모님하고도 상의해보고.”
강우의 말을 듣는 임요한과 홍인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직 어린 나이인 두 사람이 계약의 내용을 잘 알 리는 없었다. 하지만 계약서에 적혀있는 연봉과 제공하는 복지 내용을 보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저희한테 이렇게 월급을 주시겠다는 거예요?”
임요한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홍인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게임을 연습하는 것만으로도 월급을 받는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뷔욤은 어때요?”
뷔욤을 위해 불어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뷔욤이 계약서를 꼼꼼히 확인할 만큼의 영어 실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뷔욤의 얼굴에도 감탄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좋습니다. 그런데 합숙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건 정해진 공간에서 팀원들이 같이 살면서 연습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뷔욤의 얼굴에 호기심이 짙어졌다. 단 며칠 사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빠져들고 있는 뷔욤이었다.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뷔욤은 모국에서 멀리 떨어져 생활하게 되니 힘들 수도 있겠죠.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특별히 신경 쓰겠다고 하시더군요.”
“아…. 어머니가요.”
뷔욤의 표정이 푸근해졌다. 뷔욤은 어제 축제에서 어머니의 손맛과 정에 감동한 상태였다.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신중히 생각하세요. 아, 그리고 계약을 위해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오게 되면 항공편도 우리가 제공할게요.”
“네. 고맙습니다.”
뷔욤의 얼굴에 진심으로 고마운 빛이 떠올랐다. 강우는 자신을 만난 이후로 참 세심하게 이것저것 챙겨주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정 때문에 호의 때문에 계약을 고민하는 것은 아니었다. 계약서를 받기 전에 강우가 보여주었던 E-SPORTS의 장래성에 대한 프레젠테이션 덕분이었다.
“요한이랑 인호도 계약서 가지고 가서 부모님이랑 잘 상의해보고 연락해 주면 좋겠어.”
“네, 알겠어요.”
임요한과 홍인호의 표정은 싱글벙글하였다. 그 표정을 보며 강우가 씩 웃었다.
“그럼, 우리 회사 소개도 좀 할까? 앞으로 유니폼 입고 경기에 나갈 회사인데 뭐 하는지는 알아두면 좋잖아?”
강우의 말에 임요한이 눈을 빛냈다.
“무역회사이고 지금은 일본에 김치 사업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회사죠? 그리고 형은 독립유공자 후손이고요. 대진 그룹이랑 손잡고 여러 좋은 일도 하는 거로 알고 있어요.”
“와? 자세히 아는데?”
임요한이 미소를 지었다.
“모를 수가 없죠. 한동안 TV만 틀면 형이랑 할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동양 무역회사 이야기만 나왔는데요.”
“저도 본 기억이 나요.”
홍인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맞아. 아직은 중소기업 수준이지만, 우리 회사는 점점 규모를 늘려갈 거야. 그런 의미에서 홍보목적으로 프로게임단을 만들고 미리 투자하는 거지. 미래 사업에 대한 투자라고 할까?”
강우의 말에 임요한과 홍인호가 감탄했다. 강우가 자신들과 불과 몇 살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형, 저는 꼭 계약할게요.”
“저도요.”
강우가 씩 웃었다. 미래의 본좌들 중 두 명을 붙잡았다. 이재원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노른자위를 강우가 독식한 것이다. 물론 이재원도 충분히 훌륭한 선수들과 접촉 중이었다.
“그래, 꼭 우리 회사 와라. 내가 연습 상대도 많이 해주고 빌드도 많이 알려줄게.”
임요한과 홍인호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더는 볼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곧 동양 레지스탕스의 선수가 될 것이다.
‘좋네.’
똑똑.
그때, 회의실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덜컥.
문이 열리고 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이사님, 사장님이 이야기 끝났으면 회의에 들어오시면 어떻겠냐고 하십니다.”
“아…. 알겠어요. 지금 마무리 중이니까 금세 갈게요.”
“네, 이사님.”
직원이 조심히 문을 닫고 나갔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두 사람은 그만 돌아가고.”
임요한과 홍인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가 뷔욤을 바라보았다. 원래 오늘 출국 예정인 뷔욤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일정변경으로 하룻밤 머물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집에 재울 수도 없고.’
어리다고는 하지만 외국인인 뷔욤이었다. 강우의 집에서 하룻밤 자는 것에 부담을 느낄 게 분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강우가 생각났다는 듯 회의실에 있는 전화기에 다가갔다.
뚜르르. 뚜르르.
몇 번의 신호가 가고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우가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총지배인님, 저 박강우입니다.”
-박 이사님! 잘 지내셨습니까?-
최준이 머물렀던 강남 호텔의 총지배인이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제 손님 한 분 묵으려고 합니다. 좋은 방으로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당연하죠. 역시 스위트 룸을 준비하면 될까요?-
총지배인은 화끈했다. 강우와 최준 덕분에 얻은 홍보 효과로 투숙객의 숫자는 물론이고 호텔의 위상마저 올라갔으니 당연했다.
“네, 오늘 하룻밤만 부탁드립니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시 투숙하실 손님분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강우가 뷔욤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총지배인이 특별히 신경 쓰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강우가 뷔욤을 보며 말했다.
“숙소 잡았습니다. 제가 바쁘니까 숙소까지는 직원을 한 명 붙여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강우가 씩 웃었다.
“내일 공항까지는 제가 데려다줄게요. 호텔에서 봅시다.”
“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강우가 회의실을 나갔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임요한과 홍인호 그리고 뷔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두 한국인과 한국어를 모르는 한 명의 캐나다인의 화려한 바디랭귀지로였다.
‘하…. 저 세 사람을 한 팀에 모아 놓을 수 있다니.’
강우가 살짝 몸을 떨었다. 회의실의 안쪽에는 아버지와 회사의 임원급들이 모여있었다. 강우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금 늦었습니다.”
“그래, 이쪽으로 와서 앉아.”
아버지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강우가 아버지의 옆에 앉았다. 황규범 부장과 강종민 과장 그리고 김지숙 과장이 강우를 보며 반가운 눈빛을 했다. 강우도 부드럽게 웃어주며 반가운 표시를 했다.
“자 그럼 강우도 왔으니까. 이제 회의를 시작해 보자고.”
아버지의 말과 함께 회의실의 불이 꺼졌다. 먼저 김지숙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90년대 초반 일본의 내수 김치 수요량은 약 8만 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동양 무역이 일본에 김치 공장을 짓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친 결과 98년 상반기인 현재까지 동양 무역이 판매한 양은 약 만이천 톤입니다.”
김지숙 과장의 말에 강우의 눈이 빛을 냈다. 아직 상반기인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판매량이었다. 일본에서 판매하는 김치의 단가가 kg당 1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약 천이백만 불의 매출을 기록한 것이었다.
‘이 중에 원자잿값이랑 유통에 들어간 비용 그리고 인건비 등을 빼더라도 엄청난 이익이 남겠는데?’
강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런 강우를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강우가 예견한 대로 일본의 김치 시장은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본사의 성공에는 생산하는 모든 재료의 한국산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일본 본토에서 생산한다는 것이 주요했습니다. 물론 강우 이사님이 제안한 다양한 소포장 전략도 일본인들을 공략하는데 주요했습니다.”
김지숙 과장이 강우를 보며 대단하다는 눈빛을 했다. 회의실에 있는 임원들 모두 같은 생각을 하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김지숙 과장에게 물었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에서는 아직 답이 없나?”
한국은 96년부터 국제식품규격위원회에 김치의 규격 신청도 해 놓은 상태였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의 규격을 받는다면 김치의 세계 수출에 탄력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네, 관련 부처에 문의해 보았는데요, 아직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알겠어. 이 부분은 계속 신경을 써서 확인해줘.”
“네, 사장님.”
김지숙 과장이 보고를 마치고는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가 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우 이사는 뭐 할 말 없어?”
강우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제 김치 시장은 안정적으로 흘러가니까요. 다음 아이템을 조금 구상해 봤으면 해요.”
회의실 안의 이목이 강우에게 쏠렸다. 강우의 입에서 또 어떤 아이템이 튀어나올까 싶었다. 강우가 슬쩍 입을 열었다.
“다음으로 제가 생각하는 사업 아이템은 김입니다.”
“김?”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김이라니 엄청나게 대단한 사업 아이템은 아닌 거 같았다. 하지만 강우는 미래의 기억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일단 현재 한국에서 생산되는 김은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그 소비량이 줄어드는 추세죠. 제가 김의 수출과 생산의 대상으로 잡은 국가는 중국입니다.”
아버지가 탄성을 뱉어냈다. 사실 얼마 전부터 중국의 김 소비량이 심상치 않았다.
“좋은 생각이네. 그럼 역시 한국에서 김을 생산하는 업체를 알아봐야겠구나.”
“네, 그것도 그렇고요. 우리는 중국 쪽에서도 생산할 수 있잖아요?”
아버지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중국에 기반이 있으니 강우의 말대로 손쉬운 일이었다.
“좋아. 내가 곧 중국에 들어가니까. 중국 쪽은 내가 맡아서 진행하지. 한국 쪽 업체는 강 과장이 맡아서 접촉해주고.”
“네, 사장님.”
강종민 과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일본의 일로 바쁜 김지숙 과장과는 달리 아직 새로운 아이템을 찾는 데 주력하고 있던 강종민 과장의 팀이었다. 새로운 일거리가 나타나니 의욕이 마구 샘솟았다.
“그러면, 다음은….”
그렇게 한참이나 회의가 진행됐다. 강우가 전략을 세우면 아버지가 업무의 디테일을 잡아주었다. 그야말로 부자가 환상의 콤비였다.
“고생했다. 아들.”
“네, 아버지도요.”
회의가 모두 끝나고 강우와 아버지가 단둘이 남았다.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대견해했다.
“김 아이템은 진짜 좋은 생각인 거 같다. 그리고 김으로 만든 과자? 그것도 새로운 생각이고.”
“김은 아무래도 반찬이라는 느낌이 강하잖아요? 김으로 만든 과자는 그런 김의 판매 확장성을 늘려줄 아이템이 될 거예요.”
강우의 말대로였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동남아의 한 국가는 틈새시장인 김 과자 시장을 선점해서 큰 이익을 내기도 했었다. 강우는 그 시장도 가져올 생각이었다.
“그래, 김치 사업으로 나는 이익이 제법 되니까 김 사업 진행하는 데 문제 될 거는 없을 거야.”
“네, 아 그리고 아버지 중국은 언제 들어가세요?”
“최준 어르신 서훈 문제 매듭짓고 넘어갈 생각이야.”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최준의 서훈과 할아버지의 서훈 재심사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중국에 가시면 한동안 계실 거죠?”
“그래야지. 지금 중요한 시기인데 한참 자리를 비웠으니까.”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품에서 메모장을 꺼내 들어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제가 틈틈이 정리한 중국 투자리스트에요.”
“그래?”
아버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는 메모장을 조심히 넘겼다. 아버지의 눈이 빛을 냈다.
“다들 들어본 적이 없는 회사구나.”
“지금 서서히 커가는 회사들이에요. 거기에 투자를 할 수 있으면 최대한 많이 투자해주세요.”
“그래, 알겠다.”
아버지가 메모장을 품에 넣었다. 강우의 말이라면 일단 믿고 가는 것이 남는 것이었다. 강우가 힐끗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뒤풀이 있다고 했지?”
“네.”
“그래, 빨리 가서 친구들이랑 즐겁게 놀다 와.”
아버지는 역시 강우가 대학생답게 놀 때가 좋은가 보다. 연신 싱글벙글하였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잘 놀다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