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402)

진짜 나랑 동갑 맞냐고.

딸랑.

가게 문이 열리고 강우가 들어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강우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브라더!!”

멀리서 신원주가 강우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강우가 성큼성큼 다가가 신원주의 옆에 앉았다. 강우의 맞은편에는 김춘배와 남재식 그리고 연정호가 앉아있었다.

“오래 기다렸지?”

“아니. 우리도 여자 친구 데려다주고 이제 왔어.”

김춘배가 안주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오늘은 강우와 친구들끼리 뭉치기로 한 뒤풀이였다.

“축제 잘 즐겼냐?”

“어, 대박이었다. 특히 마지막에 네 공연.”

김춘배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말했다. 강우가 픽 웃으며 김춘배의 입에 뻥튀기를 쑤셔 넣었다. 김춘배가 뻥튀기를 먹으며 콧소리를 냈다.

“오? 맛 좋은데? 네가 먹여줘서 더 그런가?~”

“야! 징그럽게.”

강우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떨었다. 친구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가 신원주의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재원이 형은?”

“형은 더 늦는데.”

이재원은 축제의 마무리와 회사 일로 합류가 늦었다. 강우가 테이블 위를 보며 픽 웃었다. 뻥튀기가 담긴 그릇 하나와 오백 석 잔 그리고 콜라 한 병이 놓여있었다.

“안주도 안 시키고 뭐 했냐?”

“너 올 때까지 기다렸지. 의리.”

연정호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강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실소를 흘렸다. 어쩐지 익숙한 듯한 끝말과 자세였다. 강우가 메뉴판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점원을 불러 이것저것 시키기 시작했다. 주문을 받은 점원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금세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 오백 한 잔 먼저 주세요.”

“네~”

점원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점원이 강우의 몫으로 맥주 500CC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강우가 잔을 들어 마시려 하자 친구들이 난리를 쳤다.

“어어! 건배하고 마셔.”

강우가 픽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남자들끼리 뭉친 것 때문일까? 친구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강우와 친구들의 잔이 부딪치고 강우가 맥주를 단숨에 마셨다.

“크…. 오늘따라 맥주 맛이 좋네.”

강우가 입에 묻은 거품을 닦아냈다. 축제를 끝내고 나니 그야말로 홀가분 그 자체였다. 친구들도 그런 강우의 기분을 알아차렸다.

“고생 많았다.”

“맞아. 사실 부담스러웠을 거야.”

친구들의 위로에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어. 그래도 다들 즐거웠으니까 됐지 뭐.”

“크…. 역시 박강우답네.”

김춘배가 강우를 보며 감탄을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남재식이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런데 강우야. 나 너하고 상담할 일이 좀 생겼어.”

“그래? 무슨 일 있어?”

강우가 마시던 맥주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잡았다. 남재식이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이번 축제에 가서 느낀 건데.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내면 안 될 거 같아서.”

“시간을 흘려보낸다고?”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게임 개발 말이야.”

“아…. 그 이야기였어?”

남재식이 자신의 몫으로 놓인 콜라를 벌컥 마셨다. 그리고는 목이 따가운지 잠시 미간을 좁혔다. 남재식이 점원을 향해 콜라 한 병만 더 달라고 소리쳤다.

“우리 재식이 오늘 과음하는 거 아닌가?”

김춘배의 장난에 남재식이 픽 웃었다. 하지만 이내 강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스페이스 크래프트라는 게임도 그렇고 이번에 너랑 재원이 형이 만든다는 게임 프로리그도 그렇고 말이야. 게임 산업계가 점점 폭발적으로 성장할 거 같은데 한가하게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건 아니라고 본다.”

“맞아. 정확하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산업 시장은 선점의 효과가 가장 중요한 시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말인데 강우야, 지금 개발사를 차려서 바로 게임 개발에 뛰어들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때?”

“음….”

강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남재식이 컴퓨터 공학과를 간 것도 바로 게임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재식은 학교가 끝나고 매일 그리고 주말에도 프로그래밍 학원에 다닐 정도로 열성이었다.

“그런데 게임 개발하는 데 돈 많이 드는 거 아니냐?”

김춘배가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남재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 많이 들지.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아이디어야. 어떤 게임을 만들지가 중요하지. 이상한 아이템으로 개발 시작했다가 엎어지면 그 손해가 어마어마할 테니까.”

강우가 남재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에게는 미래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미래의 기억 속에서 게임을 즐겼던 강우는 앞으로 성공할만한 게임들을 알고 있었다. 물론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과 개발의 영역은 달랐다.

‘자금도 그렇고 구현을 해낼 수 있는 개발 능력이 있냐도 중요하니까.’

강우가 상념에서 벗어나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재식아, 개발비는 어떻게 충당하려고?”

“우리 아버지한테 말해 볼 생각이야.”

남재식의 아버지는 건물주였다. 더군다나 저번 IMF 사태 때 경매로 몇 개의 빌딩을 더 사들인 그야말로 부동산 투자의 귀재였다. 즉 남재식이 아버지의 도움을 받는다면 자금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문제는 게임 개발이 아주 생소한 분야라는 것이다. 남재식은 아버지가 선뜻 자금을 내어주실지가 걱정이었다.

“그래서, 나한테 도와 달라는 거지?”

강우가 묻자 남재식이 고개를 끄덕했다.

“어, 네 말이라면 우리 아버지도 신뢰하실 게 분명하니까.”

“가서 아버지 뵙고 말하는 거야 문제없지.”

남재식이 두 손을 불끈 쥐며 좋아했다. 친구들 아버지 사이에서 강우는 신뢰와 믿음직 그 자체였다.

“그런데, 너 막연히 개발에 뛰어드는 건 위험한 거 알지? 생각해 놓은 개발 아이템은 있어?”

“그게 말이야.”

남재식이 멋쩍게 웃으며 몇 가지 아이디어들을 내놓았다. 평소 게임광인 남재식답게 제법 흐름을 읽은 아이디어들이었다. 하지만 친구를 도울 거라면 화끈하게 돕기로 했다.

“재식아, 내가 몇 가지 개발 아이디어를 생각해 놓은 게 있는데.”

“진짜?!”

남재식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앞으로 당겼다. 강우가 자신 이상으로 게임에 조예가 깊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걸 알았다. 강우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일단 아버지부터 설득하고 나서 내가 정리해서 넘겨줄게.”

“고맙다 강우야! 역시 너밖에 없어.”

남재식이 숫제 강우를 안으려는 듯 덤볐다. 강우가 슬쩍 몸을 뒤로 빼며 피했다. 김춘배가 강우를 보며 또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나랑 동갑 맞냐고.”

“맞다고.”

강우가 김춘배를 보며 툭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남재식에게 물었다.

“그래, 그럼 아버지는 언제 찾아뵐까?”

“내일 어때?”

“나 내일은 손님 공항에 데려다줘야 해서 저녁에나 시간이 될 거 같은데?”

“알겠어. 그럼 저녁으로 약속 잡아 놓을게.”

남재식이 싱글벙글했다. 뒤이어 김춘배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강우야, 나도 상담하고 싶은 게 있다.”

“그래?”

강우가 김춘배를 보며 씩 웃었다. 김춘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말이야. 계속 연기를 해야 할지 고민이다.”

“무슨 소리야? 너 연기하는 거 그렇게 좋아하면서.”

방금까지 장난스럽던 김춘배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사실 연극영화과에 간 김춘배는 한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다.

“나 한 학년 선배 중에 진짜 대단한 연기 괴물이 있거든. 생긴 것도 준수하고 그 선배 볼 때마다 자신감이 없어져.”

“그 사람 이름이 뭔데?”

강우가 슬쩍 선배의 이름을 물었다. 김춘배의 일 년 선배라면 중앙대 연극영화과 97학번일 것이었다. 김춘배의 입에서 선배의 이름이 나왔다.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도 연기파로 알려진 인기 배우였다.

“그 선배 연기하는 거 보고 있으면 자괴감이 그냥…. 어휴….”

“음…. 그럴만하지.”

강우의 말에 김춘배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가 속으로 움찔하며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아니, 선배니까 연기를 너보다 잘할 수 있다고.”

“그건 아닌 거 같아. 그래서 고민이야. 뭐랄까 저 사람이 있는 이상 나는 주연 같은 건 꿈도 못 꾸겠구나 싶고.”

가만히 듣고 있던 친구들이 김춘배에게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 자신감 대장 김춘배가 왜 이래?”

“춘배 너도 한 연기 하잖아. 약한 소리 하지 말라고.”

신원주와 연정호가 김춘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남재식도 김춘배에게 슬쩍 콜라를 따라주었다.

“이거 한잔해라 친구야.”

“고맙다. 네가 콜라를 다 나눠주고.”

김춘배가 희미하게 웃었다. 마침 안주가 나오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가 금세 가득 찼다. 강우와 친구들이 일제히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놓인 안주에 무차별 폭격이 이어졌다.

“춘배야, 이거 먹어라.”

연정호가 절대 양보하지 못한다던 치킨의 다리를 김춘배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신원주는 슬쩍 찍어 먹는 소금을 김춘배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강우가 그런 친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식들 조급한가 보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강우의 행보 하나하나가 너무 튀는 면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자신의 나이에 맞게 잘 해내 가고 있었다. 강우가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래의 기억이 있으니 친구들을 도울 수 있는 만큼은 도와야겠지.’

강우가 결심을 내리고는 김춘배에게 말했다.

“춘배야, 너 그러지 말고 오디션 좀 보러 다닐래?”

“오디션? 무슨 오디션?”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영화나 연극 같은 거 말이야.”

“음….”

김춘배가 턱을 쓰다듬으며 침음성을 뱉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아직 학생이라고 오디션 보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네 실력이면 충분히 출연 가능한 곳이 많을 거야.”

“그럴까?”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 대진 미디어에서 엔터 사업부 만든 거 알지? 그쪽 통해서 내가 몇 군데 오디션 넣어볼게.”

“가…. 강우야.”

김춘배가 감동한 표정이 되었다. 강우가 안주를 쓱 집어 먹었다.

“자존감은 누가 세워주는 게 아니야. 나 스스로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 거니까. 오디션을 해보면 네가 얼마나 대단한 연기자의 자질을 가졌는지 알게 될 거야.”

“.....”

김춘배가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려 맥주잔을 들어 벌컥 마셨다. 강우가 점원에게 맥주를 더 달라고 주문했다. 그리고는 다시 김춘배를 보았다.

“너 기억나지 우리 둘이 오디션 보러 갔을 때.”

“기억나지.”

김춘배가 피식 웃었다. 어찌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 있겠는가. 다만 학교에 들어오고 별 성과를 내지 못하며 기획사를 나왔지만 말이다.

“그때, 나는 딱 눈치챘지. 아 이놈이 대배우가 될 상이로구나 하고.”

“.....”

김춘배가 씩 웃었다. 그때, 점원이 주문한 맥주를 가져다주었다.

“오백 네 잔 나왔습니다.”

강우가 김춘배의 앞에 맥주를 쓱 밀어주었다.

“걱정하지 말고 오디션 봐.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

“그래, 고맙다.”

그 순간, 강우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김성현 매니저님은 계속 연락해?”

김성현 매니저는 강우와 김춘배를 노래방에서 캐스팅했던 나인 엔터테인먼트의 직원이었다. 김춘배가 기획사를 나올 때 연기자 사업부가 폐지됐고, 김성현 매니저도 회사를 나온 것으로 들었다.

“성현이 형? 그럼 연락하지 어제도 연락 왔었어.”

“그래? 요즘은 뭐 하신데?”

김춘배가 긴 숨을 뱉어냈다.

“알잖냐. 나인 엔터 연기자 사업부 폐지될 때 회사에 들이박았다가 잘린 거. 그때 이후로 다른 기획사에 들어가려고 알아봤는데 다들 안 받아준다더라.”

“음…. 그래?”

강우가 눈을 빛냈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나한테 연락처 좀 줘봐.”

강우의 말에 김춘배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강우가 나서려나 생각한 것이다. 김춘배가 자신의 핸드폰에서 연락처를 찾아 강우에게 내밀었다. 강우가 번호를 저장했다.

“강우야, 잘 부탁한다. 성현이 형 진짜 좋은 사람이야.”

김춘배가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마. 마침 좋은 자리 하나 있으니까.”

딸랑.

때마침 가게의 문이 열리고 이재원이 들어섰다. 강우가 이재원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여기요.”

“어, 강우야.”

이재원이 강우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강우가 마시던 오백 잔을 들어 벌컥 마셨다.

“크…. 목말라 죽는 줄 알았네.”

강우가 이재원의 앞에 슬쩍 포크를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슬쩍 물었다.

“형, 엔터 사업부 팀장 자리 아직 못 구했죠?”

“어, 이게 아무래도 이쪽에 경험이 많은 사람을 앉혀야 하는데 다른 기획사들 견제가 심하네.”

그럴 만도 했다. 대기업이 엔터 사업에 뛰어들었으니 다른 기획사들의 신경이 곤두섰을 것이다.

“잘됐네요. 마침 적임자를 찾았거든요.”

“그래? 잘됐네.”

이재원은 더 묻지도 않았다. 강우가 찾은 사람이니 어련하겠나 싶었을 것이다. 그만큼 강우에 대한 믿음이 강한 이재원이었다. 강우가 김춘배를 보며 씩 웃었다. 김춘배가 강우를 보며 엄지를 ‘척’하고 들었다.

“역시 내 친구 강우. 네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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