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402)

오빠가 다 사줄게.

어두운 골목에 전봇대가 있었다. 그 옆에는 전봇대처럼 얼어버린 남재식도 있었다. 전봇대 위에서 조명이 박지혜를 비추고 있었다. 강우가 박광웅과 박지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말 둘이 남매인 게 믿기지가 않는다니까.’

곰 같은 박광웅에게 어찌 저런 예쁜 여동생이 있단 말인가. 볼 때마다 참 신기했다. 강우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강우야, 집에 아무도 없다는데 잠깐 들어갔다가 갈래?”

“어? 아니….”

말을 하려던 강우가 움찔하며 옆을 바라보았다. 굳어있던 남재식이 강우의 옆구리를 푹 찌른 것이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박광웅의 집은 다세대 주택이었다.

“그럼 잠깐만 들어갔다가 갈까? 저 지혜야 오빠들 잠깐 들어갔다가 가도 되지?”

“그럼요. 들어오세요.”

박지혜는 온통 참치김밥에 신경이 쏠려있었다. 박광웅과는 달리 날씬하고 키도 큰 박지혜는 먹는 것을 심히 좋아했다.

끼익.

다세대 주택의 대문이 열리고 안쪽에 작은 마당이 나타났다. 마당에는 온갖 물건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아…. 이거 우리 옆집 거야. 아이들 있는 집이거든.”

“아 그렇구나.”

박광웅의 집은 마당의 옆쪽으로 조금 돌아가면 나오는 1층이었다. 두 가구가 나란히 있는 구조였다.

“누추하지만 들어와라.”

박광웅이 씩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강우가 그런 박광웅을 보며 슬쩍 웃었다. 박광웅은 참 많이 변해있었다.

“오빠들, 잠시만요. 그래도 숙녀가 있는 집이니까 조금 정리만 할게요.”

박지혜가 눈을 찡긋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남재식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강우가 남재식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티 팍팍 낼 거면 그냥 집에 가던가.”

“어어? 내가? 진짜? 아니 내가 뭐?”

남재식이 횡설수설하더니 고개를 푹 떨궜다. 역시 누구를 속이겠냐 싶었다. 강우가 남재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재식아, 잘 들어라. 안에 들어가면 절대 티 내지 말아라. 알겠지?”

“어어.”

강우가 남재식의 등을 팡팡 쳤다.

“긴장 풀고 인마. 그리고 웬만하면 말도 하지 마. 그냥 말하고 싶으면 내가 한 말을 따라만 해 알겠지?”

“어어.”

남재식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마침 안쪽에서 박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 끝! 들어오세요~”

강우와 남재식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집 안에는 박광웅과 박지혜만 있었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은 늦게 돌아오신다고 했다. 좁은 주방 겸 마루에는 자그마한 상이 퍼져 있었다. 한 가족이 모두 모여 밥을 먹을 일이 적다 보니 상도 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집이 좀 좁지?”

박광웅이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며 말했다. 살짝 민망함이 묻어있는 목소리에 강우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야, 좁기는 아늑하고 좋네.”

“좋네.”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남재식을 바라보았다. 남재식은 이제 가부좌를 튼 불상처럼 앉아있었다. 박광웅이 강우와 남재식의 컵에 음료를 따라주었다.

“오빠! 나는?”

“너는 네가 따라 먹어.”

박광웅이 음료를 박지혜의 앞에 놓아주었다. 박지혜가 혀를 삐죽 내밀더니 자신의 컵에 음료를 따랐다. 박광웅이 참치김밥의 포장을 뜯어 박지혜의 앞쪽으로 내밀었다.

“잘 먹겠습니다~”

박지혜가 젓가락을 들더니 참치김밥의 꽁다리부터 집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김밥은 꽁다리부터지.”

“그렇죠?”

박지혜가 싱긋 웃더니 김밥을 와락 삼켰다. 곰 같은 박광웅과는 달리 얼굴도 조막만 한 박지혜였다. 입안 가득 김밥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강우가 슬쩍 옆을 보았다.

“헤헤….”

남재식은 바보처럼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강우가 속으로 픽 웃었다. 그때, 박광웅이 강우에게 말했다.

“우리 부모님이 너 꼭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조금 기다렸다가 뵙고 갈래?”

“어? 부모님이? 그래 뵙고 인사드리고 가지 뭐.”

강우의 말에 남재식이 입을 열었다.

“그래, 뵙고 가지 뭐.”

박광웅이 남재식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매일 집 근처까지만 오고 그냥 갔잖아.”

“어? 어어….”

남재식이 화들짝 놀라 말했다. 강우는 이제야 남재식이 지난 소개팅에서도 실패한 원인을 알았다. 이성 앞에만 있으면 이성과 판단력이 통째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타입. 바로 그게 남재식이었다.

‘하…. 이놈을 어쩌냐?’

강우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박지혜가 참치김밥을 반이나 먹어버렸다. 박광웅이 박지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그 야리야리한 몸에 먹는 건 나보다 더 먹는 거 같아?”

“오빠! 지금 한창 먹을 나이라고. 그리고 나 수험생이잖아. 칼로리 소비가 어마어마하단 말씀!”

박지혜가 배를 쓰다듬으며 반박했다. 박광웅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강우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강용이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박지혜를 향해 물었다.

“지혜야 공부는 안 힘들어?”

“안 힘들어요. 예전보다 훨씬 사정이 좋아졌는데 힘들 이유가 없죠. 고마워요, 강우 오빠. 우리 오빠가 이게 다 오빠 덕분이래요.”

강우가 흠칫하며 박광웅을 바라보았다. 역시 다 알고 있었나 싶었다.

“우리 지혜가 요즘 반에서 전교 1등을 놓치지를 않는다. 지혜도 목표가 서울대야. 강우야, 정말 고맙다. 네가 재원이 형님한테 이야기해줘서 우리 장학금 받게 해준 거 맞지?”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그러자 박지혜가 마구 재잘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강우 오빠, 이재원이라는 분 진짜 잘생겼죠? 실물은 더 잘생겼을 거 같던데. 둘이 그렇게 친하다면서요?”

박지혜가 이재원에게 관심을 드러냈다. 남재식이 바짝 긴장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재원이 형? 성격 진짜 안 좋아. 너 드라마 보면 재벌들 진짜 성격 이상하게 나오지?”

박지혜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랑 똑같아. 성격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강우의 말에 남재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광웅이 고개를 갸웃하며 정말 그랬나 생각했다. 그러자 박지혜가 결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럼 내 백마 탄 왕자님 후보에서 탈락.”

강우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재원이 형, 미안해요. 사람 하나 살린 셈 칩시다.’

이재원이라면 이 사실을 알아도 크게 웃고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강우가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서울대 목표라고 했지? 지혜는 무슨 과 지망하는데?”

강우의 말이 끝나자 남재식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무슨 과 지망하는데?”

박지혜가 킥 하고 웃었다.

“뭐야~ 재식 오빠 이상해.”

그리고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의대요.”

“아…. 의대?”

강우가 감탄의 빛을 떠올렸다. 그리고 박광웅을 보며 슬쩍 웃었다.

“아니 너 같은 놈한테서 어찌 이런 동생이 나왔냐? 기적이네. 기적.”

“뭐?? 유전자 몰빵이다. 왜?”

박광웅이 발끈하며 말했다. 남재식은 자신의 말에 박지혜가 웃은 게 좋았나 보다. 헤벌쭉 웃으며 박지혜에게 음료를 따라주었다.

“역시 나 먹는 거 챙겨주는 건 재식 오빠뿐이야.”

“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만 해. 오빠가 다 사줄게.”

남재식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박지혜가 남재식을 보며 싱긋 웃었다. 남재식의 입꼬리가 또 주체할 수 없이 휘어져 올라갔다. 강우가 박광웅을 슬쩍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눈치를 챌 법도 하건만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부모님은 많이 늦으셔?”

강우의 질문에 박광웅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올 때 되셨어. 왜 가야 해?”

“아니 그냥 많이 늦으시네 싶어서.”

“아버지는 아침에 회사 나가시고 저녁에는 요즘 대리운전인가 하셔. 어머니는 식당 일 나가시고.”

강우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한 질문을 했다 싶었다. 하지만 박광웅은 당당했다.

“그런 표정 하지 마라. 요즘 우리 집,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맞아요. 우리 오빠 사고 안 치고 마음잡고 공부한다고 얼마나 좋아하시는데요. 그리고 집안 사정도 점점 좋아지고 있고요. 일단 대학 등록금 걱정 없어서 얼마나 좋아하시는데요.”

박지혜가 잔뜩 신이 나서 말했다. 강우가 멋쩍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가족의 행복이 단지 환경의 문제가 아님을 겪어보지 않았던가.

‘박강우, 요새 편해졌다고 아주 빠져가지고….’

강우가 속으로 자신을 나무랐다. 그리고는 박광웅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예전의 자신과 겹쳐 보였다. 가족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옆에서 밝게 웃는 박지혜도 마치 강용이 같았다.

“좋다. 행복해 보여서.”

“고맙다. 이게 다 네가 날 깨우쳐 준 덕분이다. 평생 은혜 잊지 않을게.”

“자꾸 그러지 마라. 부끄럽게.”

강우가 괜히 헛기침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참치김밥과 음료를 놓고 한참이나 떠들었다. 그동안 쌓인 이야기가 많은지 박광웅은 강우에게 참 할 말이 많았다.

덜컥.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박광웅의 부모님이 동시에 들어왔다. 강우와 남재식이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남재식입니다!”

남재식이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현관을 들어서던 박광웅의 부모님이 남재식을 보며 반가워했다.

“네가 재식이구나. 반갑다.”

“어머? 재식아.”

이윽고 두 사람이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광웅이 친구 박강우입니다.”

광웅 부모님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마치 엄청난 손님이라도 온 듯 호들갑을 떨었다.

“네가 강우구나! 정말 반갑다.”

“어머?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보다 더 훤칠하네?”

광웅 부모님이 두 사람을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강우와 남재식이 자리에 앉았다. 광웅 어머니가 상 위에 차려진 참치김밥을 보더니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장정이 넷인데 김밥 하나 가지고 배들이 차겠어. 잠깐만 기다려봐.”

“엄마, 왜 장정이 넷이야?”

박지혜가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 광웅 어머니가 뒤도 안 돌아보며 말했다.

“너 요즘 먹는 양이면 장정이지. 웬만한 남자 저리 가라잖아.”

“엄마!”

박지혜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에 남재식은 또 헤벌쭉했다. 광웅 아버지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여보, 나 먼저 씻고 나올게.”

광웅 어머니는 주방에서 라면을 꺼내 끓이기 시작했다.

“다들 라면에 계란 넣지?”

“엄마, 계란 세 개!”

박지혜의 말에 광웅 어머니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박지혜를 향해 살짝 눈치를 줬다. 박지혜는 ‘왜?’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야, 우리 또 라면 먹어야 하는 거냐?”

남재식이 강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강우가 남재식에게 작게 속삭였다.

“난 괜찮아. 아직 더 먹을 수 있거든.”

“으…. 너는 먹는 거도 잘하네.”

남재식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잘 끓여진 라면이 상의 중앙에 놓였다. 광웅 아버지는 씻고 나오셔서 상의 한쪽에 앉았다. 광웅 어머니가 각자의 앞에 접시와 수저를 놓아주었다.

“엄마는 안 먹어?”

“응, 엄마는 생각 없어.”

광웅 어머니가 강우의 옆에 앉았다. 강우가 움찔하며 광웅 어머니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광웅 어머니가 라면을 크게 덜어서는 강우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강우, 많이 먹어라.”

“감사합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옆에 있던 남재식이 질 수 없다는 듯 접시를 내밀었다. 광웅 어머니가 남재식의 그릇에도 라면을 잔뜩 덜어주었다.

“엄마 나는?”

“가시나, 너는 네가 덜어 먹어.”

광웅 어머니의 장난 섞인 타박에 박지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러자 박광웅이 라면을 덜어주었다.

“빨리 먹어.”

“칫…. 강우 오빠가 오니까 우리 둘이 찬밥이야.”

박광웅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찬밥은 나인 거 같은데.”

광웅 아버지가 라면을 직접 덜며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라면을 먹는 내내 광웅 부모님은 강우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강우에게 참 궁금한 것도 많은가 보다. 강우는 예의 바르게 대답을 했다. 라면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아유~ 우리 강우는 먹는 것도 참 복스럽네.”

광웅 어머니는 강우가 참 마음에 드신 듯했다.

“재식이는 배부르니? 그럼 남겨도 돼.”

“아…. 아닙니다! 저도 엄청 잘 먹습니다.”

남재식이 결연한 눈빛으로 라면을 후루룩 먹었다. 강우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사랑에 빠진 자는 하고자 하면 못할 게 없었다.

또 한바탕 야식의 폭풍이 지나갔다. 강우의 위도 더는 빈자리가 없었다. 박광웅과 박지혜도 배를 문지르며 포만감을 드러냈다. 남재식은 약간 창백한 표정이었다.

“어머니, 잘 먹었습니다.”

“그래, 귀한 손님이 왔는데 대접할 게 많이 없네.”

광웅 어머니의 말에 강우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진짜 맛있게 먹었습니다.”

“강우는 참 바르게 컸구나. 우리 광웅이 친구인 게 참 다행이야.”

광웅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말했다. 박지혜가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강우 오빠 만나고 나서 개과천선했죠.”

“그래, 강우야, 정말 고맙다.”

광웅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광웅 어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졌는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아빠, 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효도할게요.”

박광웅이 부모님을 향해 다짐하듯 말했다. 그 모습이 왜인지 몇 년 전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강우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떤 상황이든지 가족이 뭉쳐있는 거 만큼 행복하고 든든한 건 없지.’

강우가 박광웅의 가족을 쓱 훑어보았다. 그리고 하루를 열심히 사는 그들의 인생이 진심으로 잘되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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