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요즘은 네가 더 좋아.
연습실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홍인호가 마우스를 바쁘게 움직이며 소리쳤다.
“강용아, 형이 지켜줄게 조금만 기다려!”
“인호 형아, 빨리요!”
강용이는 선수들과 놀기 시작했다. 강용이는 특히 선수들과 같이 팀전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홍인호와 강용이가 한 팀이었고, 뷔욤은 혼자 팀이었다. 뷔욤은 왜 자기는 혼자냐며 연신 투덜거렸다.
“왜 2:1을 하는 겁니까?”
하지만 강용이 때문에 참는다며 게임을 했다. 하지만 억지는 아니었다. 아직 어린 강용이의 본진에는 병력이 몇 없었다.
“재밌다!”
강용이가 잔뜩 신이 나서 게임을 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우가 팀의 주장을 맡은 임요한을 따로 불렀다.
“대회 준비는 잘돼 가지?”
“네, 감독님. 첫 대회 우승은 우리가 차지할 거예요.”
임요한은 자신만만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워했다. 이번에 열리는 스페이스 크래프트 대회는 개인전과 팀전이 같이 열렸다. 미래의 기억보다 훨씬 앞당겨 만들어지는 리그였다. 강우는 이 리그의 성공을 확신했다.
“감독님, 개인전은 저희를 위해 출전 안 하신다고 해도 팀전에는 꼭 나와주셔야 합니다.”
“음···. 알겠어.”
강우는 감독 겸 선수로도 등록해놓은 상태였다. 주장인 임요한과 선수들이 강하게 주장해서였다. 결국, 강우는 플레잉코치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겠네요. 감독님 실력을 보면 말이에요.”
“난 최대한 출전 안 하는 방향으로 하긴 할 거야.”
임요한이 씩 웃으며 강우의 옆을 바라보았다.
“누나 오래 기다렸어요. 이제 데이트하러 가세요. 강용이는 우리가 데리고 있을게요.”
“그래 부탁한다.”
“형아, 잘 놀다 와!”
강용이가 강우와 이나은을 향해 소리쳤다. 얼마나 게임에 집중했는지 모니터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강우와 이나은은 건물을 벗어나 명동 거리로 나왔다.
“이제 제대로 데이트할 수 있겠다.”
“강용이 잘 있겠지?”
“그럼, 아마 신나서 놀고 있을걸?”
강우가 손을 내밀었다. 이나은이 강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강우와 이나은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이대에서 했던 첫 데이트의 느낌이 물씬 재현됐다.
“어디 갈까?”
“강우야, 오늘 옷 좀 사자.”
“옷?”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나은이 강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응, 어머니가 너 옷 좀 사주라고 카드 주셨어.”
“아···. 그래?”
어머니는 참 신기했다. 미대를 나와 세련된 미적 감각을 가졌다. 하지만 아들의 옷은 정말 못 골라주는 편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코디로 이나은을 정한 것이다.
“응, 너도 인터뷰도 있고 또 대회에 감독으로 나가면 옷도 잘 입어야지.”
“그런가···.”
이나은이 앞장서서 강우의 팔을 끌어당겼다. 강우가 ‘어어~’ 하며 끌려갔다. 이나은의 손힘이 제법이었다. 이윽고 강우와 이나은은 유명 스포츠 브랜드 매장에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점원이 강우와 이나은을 맞이했다. 그리고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나은의 외모에 넋이 나간 것이다. 강우가 헛기침하며 슬쩍 앞으로 나섰다. 직원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빠르게 물었다.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그냥 남자친구 옷 좀 보러왔어요.”
이나은이 강우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직원의 얼굴에 진한 부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강우가 왜인지 모르게 우쭐해졌다.
“일단 운동복이랑 운동화 골라보자.”
이나은이 강우를 끌고 매장의 안쪽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마음에 드는 옷을 꺼내 강우에게 내밀었다.
“이거 한번 입어봐.”
“응.”
평소 옷을 사는 것이라면 무관심인 강우도 오늘은 순한 양이었다. 이나은이 내미는 옷들을 가지고 순순히 탈의실로 향했다. 강우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우와~ 강우야, 진짜 잘 어울려.”
이나은이 환한 얼굴을 하며 좋아했다. 지금 방문한 브랜드 특유의 삼선이 눈에 띄는 운동복이었다. 키도 키고 덩치도 좋은 강우가 입으니, 마치 운동선수 같았다.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평소에도 잘 꾸미고 다니면 이렇게 인물이 살 텐데.”
이나은이 강우를 살짝 나무랐다. 강우가 씩 웃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미래의 자신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래의 기억 속 강우는 배도 살짝 나온 그런 평범한 아저씨가 되어갔었으니까 말이다.
“이거 전부 사야겠다.”
“전부?”
이나은의 말에 강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자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왜? 어머니가 오늘 날 잡고 옷 사라고 하셨어. 오늘 잔뜩 사서 가자.”
“그···. 그래.”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슬쩍 매장을 둘러보았다. 강우가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한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강우가 고른 옷과 커플로 입을 수 있는 운동복이 걸려있었다. 강우가 슬쩍 옷을 집어 이나은에게 가지고 왔다.
“나은아, 이거.”
“응? 옷 골랐어?”
이나은이 강우가 내민 옷을 발견하고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커플룩이라니 아직 부끄럽기만 한 이나은이었다.
“이것도 계산해 주세요.”
강우는 이나은의 옷도 계산했다. 사는 김에 운동화까지 커플로 맞췄다. 강우가 이나은을 보며 슬쩍 물었다.
“우리 갈아입고 다닐까?”
“응···.”
이나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윽고 강우와 이나은이 각각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검은색 삼선이 들어간 운동복을 맞춰 입은 두 사람은 그야말로 선남선녀였다. 매장 안의 직원들이 탄성을 뱉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운동화까지 갈아 신었다.
“내가 매 줄게.”
이나은의 신발 끈은 강우가 매어주었다.
“그럼 이건 내가 해줄게.”
강우의 신발 끈은 이나은이 매어주었다. 매장의 직원들이 두 커플을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그렇게 변신을 마친 강우와 이나은이 밖으로 나왔다. 일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강우가 살짝 민망해하자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우리 옷 더 보러 가자.”
“어어···.”
이나은은 어느새 커플룩을 즐기는 듯했다. 확실히 미래의 연예인다운 모습이었다. 강우가 슬쩍 명동 거리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미래의 기억만큼 많은 외국인은 없었다. 차라리 지금의 명동 거리가 더 낫다는 생각도 했다. 이나은은 계속해서 강우를 옷가게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것도 잘 어울리고. 이것도···.”
이나은은 정말 거침이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강우를 변신시키겠다는 일념에 불탔다. 강우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나은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
“진짜 많이 샀다.”
마지막 가게를 끝으로 이나은의 강우 변신시키기가 끝났다. 강우의 양손에는 쇼핑백이 가득 들려있었다. 이나은의 손에도 역시나 쇼핑백이 잔뜩 들려있었다.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강우의 옷들이었다.
“우리 배고픈데 뭐 좀 먹을까?”
어느새 시간이 흘러 저녁 시간이었다.
“그래, 나 여기 유명한 분식집 알아. 거기 가자.”
“좋지.”
강우와 이나은이 명동의 아는 사람만 안다는 분식집으로 향했다. 쫄면이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강우와 이나은은 쫄면 두 개와 튀김만두도 시켰다.
“와~ 맛있겠다.”
음식이 나오자 이나은이 잔뜩 상기되기 시작했다. 강우가 쫄면을 잘 비벼서 이나은의 앞에 놓아주었다.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고마워.”
“맛있게 먹어.”
강우가 자신의 쫄면을 비벼서 후루룩 먹기 시작했다. 만두까지 곁들이니 그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
“춘배, 캐스팅됐다며?”
이나은이 강우에게 물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연이긴 한데 비중이 없는 건 아니더라고.”
“그래? 춘배 좋겠다.”
이나은의 말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강우가 먹는 것을 멈추고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너도 연기하는 거 좋아하는데···.”
“응?”
이나은이 고개를 들고는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작게 탄성을 뱉었다. ‘부럽다.’라는 말이 강우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생각이 든 것이다.
“나은아, 오디션 볼 생각 있으면 내가 밀어줄게. 그 정도는 내가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강우야···.”
이나은이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친구들 도와준다고 오지랖 부리고 다녔는데 생각해보니 제일 중요한 너를 빼먹고 있었네. 미안.”
“아니야. 그런 거.”
이나은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나···. 사실 연기가 참 좋았어. 그런데 요즘은 네가 더 좋아. 그러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어? 어어···.”
강우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얼떨결에 진한 사랑 고백을 해버린 이나은도 고개를 푹 숙였다. 벌겋게 비벼진 쫄면과 이나은의 얼굴이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강우가 그런 이나은을 보며 생각했다.
‘미래의 최고 배우가 되는 나은이인데···.’
자신을 만나고 행여 다른 인생을 살게 될까 걱정 아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미래가 어찌 바뀌든지 간에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었다.
‘나도 나은이를 많이 좋아하고.’
이나은도 강우를 참 좋아했다. 두 사람은 대화도 잘 통하고 성격도 참 잘 맞았다. 욕심일지 모르겠지만, 강우는 이나은을 놓치기는 싫었다.
‘그래···. 처음으로 이기심 한번 부려보자.’
강우가 다짐하고는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네가 내 옆에 있어 주는 게 좋아. 너 유명해지면 사람들이 많이 알아볼 거고. 그러면 좀 불안한 건 사실이야.”
“응? 으응···.”
이나은은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강우가 씩 웃으며 쫄면에 머리를 숙였다.
“먹자.”
“응.”
두 연인의 달달함에 주변의 시선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커플이 아닌 사람들은 짧게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렇게 강우와 이나은이 저녁을 먹고 다시 명동 거리로 나왔다. 이나은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는 길에 선수들 간식 사다 줄까?”
“좋지.”
강우와 이나은은 근처의 전기통닭을 파는 집에 들렀다. 선수들을 줄 영양 닭을 열 마리를 사고 또 근처의 만둣집에서 만두도 샀다. 양손에 더 들 수도 없을 만큼의 짐이었다. 회사 건물 앞에 도착한 강우는 쇼핑백을 일단 승합차에 실었다.
“아버님은 먼저 가셨나 봐.”
“어? 그래?”
아버지의 승용차는 보이지 않았다. 강우가 슬쩍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강용이는 집에 갔나?”
강우와 이나은이 양손 가득 간식을 들고 이 층으로 향했다. 게임단의 숙소에 들어가자 선수들은 맹렬히 연습 중이었다.
“간식들 먹고 하세요.”
이나은의 목소리에 연습실에서 선수들이 일제히 달려 나왔다. 이나은은 선수들 사이에서 감독님의 여신으로 불리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강우가 사 온 간식에 선수들이 잔뜩 상기됐다. 숙소가 명동에 있어서 참 좋은 이유 중 하나가 먹을 게 많다는 것이라며 좋아들 했다. 강우가 그 말에 픽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임요한에게 물었다.
“강용이는?”
“강용이 제 방에서 자고 있어요.”
“어? 그래? 아버지가 안 데리고 가셨어?”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아버지가 퇴근할 때 같이 간다고 했었다.
“아까 들리셨는데 강용이가 기다린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래.”
강우가 임요한과 홍인호가 같이 쓰는 방의 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서 강용이가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강우가 슬쩍 다가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으음···. 형아?”
강용이가 부스스 눈을 떴다. 강우가 씩 웃으며 강용이를 안았다.
“집에 가자.”
“응, 그런데 데이트 잘했어?”
강용이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너 설마 형아랑 누나랑 데이트하라고 자리 비켜준 거냐?”
“아니~ 형들이랑 노는 게 재밌어서.”
강용이가 혀를 삐죽 내밀었다. 그 귀여움에 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내 동생 박강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