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402)

그쪽이 아니라 이쪽.

강우가 놀란 눈으로 앞 유리 밖을 바라보았다. 남재식의 집 앞으로 교복을 입은 박지혜가 나타났다. 살짝 망설이는 듯한 박지혜는 발길을 돌리려 하고 있었다.

덜컥.

강우가 문을 열고 내렸다.

“지혜야!”

“어? 강우 오빠?”

박지혜가 강우를 보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살짝 부끄러운 듯 당황했다. 강우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었다.

“여기는 웬일이야?”

“아···. 그게요···.”

박지혜가 남재식의 집 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재식 오빠가 한동안 연락이 안 돼서요. 혹시 무슨 일 있나 해서.”

“아···. 재식이?”

강우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게임개발에 들어가기 전 남재식은 하루가 멀다고 박광웅의 집을 찾아갔다. 항상 먹을 것을 잔뜩 사서 말이다. 그럴 때마다 박지혜는 새침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남재식이 게임개발에 착수하며 상황이 반전됐다.

‘본의 아니게 연락을 끊어버린 꼴이 된 거군.’

그리고 박지혜는 남재식의 근황이 궁금해서 이렇게 찾아온 모양이다.

“재식이 지금 집에 갈아입을 옷 가지러 갔다. 요즘 회사 일로 바쁘거든.”

“아~ 회사 일이 바빴구나.”

박지혜가 안도의 숨을 뱉어냈다. 강우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부여잡았다.

“학교 갔다 오는 거야?”

“네, 방학 보충 학습 갔다 와요.”

“크···. 너도 시작이구나. 대입 준비.”

강우가 얼마 전 일을 떠올리며 몸을 살짝 떨었다. 박지혜도 몸을 살짝 떨며 강우의 느낌에 공감했다.

“힘들어도 어쩔 수 없죠. 지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한다고 했어요.”

“맞아. 힘들어도 딱 1년 반만 참아.”

그때였다. 남재식이 건물의 일 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재식 어머니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들었는지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양손에는 개발실에서 입을 옷이 가득 담긴 가방을 들고 있었다.

“재식 오빠!”

“어? 지혜야?”

박지혜가 왠지 모를 서운함이 담긴 목소리로 남재식을 불렀다. 남재식의 시무룩하던 얼굴에 순식간에 생기가 돌았다.

“오빠! 핸드폰은 왜 꺼져 있어요?”

“핸드폰? 아···. 그게 화장실에 빠트렸어.”

남재식이 머리를 긁적이며 이유를 설명했다. 박지혜가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럼 그렇다고 연락을 해줘야죠. 무슨 일 생겼는지 알고 걱정했잖아요.”

“걱정? 내 걱정을?”

남재식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지혜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네, 오빠 걱정이요. 내가 한 게 아니라 우리 오빠가요.”

“광웅이가? 내 걱정을? 왜? 가끔 찾아와서 밥도 먹고 갔는데?”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남재식의 말에 강우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남재식에게 다가가 가방을 뺏는척하며 발을 지그시 밟았다.

“억···.”

남재식이 헛숨을 들이켜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두 눈빛으로 ‘적당히 해라.’라는 경고를 보냈다. 남재식이 입을 꾹 다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혜야, 저녁 먹었어? 배고프지?”

“저녁 먹었는데도 배고파요.”

박지혜가 혀를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에 남재식이 또 헤벌쭉 웃었다. 강우가 그런 남재식의 옆구리를 툭 찔렀다. 남재식이 움찔하더니 다급히 말했다.

“그···. 그래, 맛있는 거 먹을까? 오빠가 쏠게.”

“정말요? 그럼 간단히 떡볶이에 김밥 사줘요.”

박지혜가 싱긋 웃었다. 남재식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했다. 강우가 슬쩍 자리를 피해주려 했다.

“그럼 나는 먼저 간다.”

“어? 강우야, 왜?”

남재식이 강우를 붙잡았다. 그 간절한 눈빛을 강우가 슬쩍 외면했다.

‘아···. 저 멍청이가.’

강우가 시간을 확인하며 크게 소리쳤다.

“그게 바쁜 일이 있어서 말이야. 빨리 집에 가야 하거든.”

“무슨 소리야. 오늘 우리 사무실에서 밤새 작업하는 거 보다가 간다고 했잖아.”

남재식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대쪽 같은 남재식의 반응에 강우가 폭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남재식의 어깨를 강하게 퍽퍽 내리쳤다.

“그래, 같이 가자. 같이 가!”

그 모습을 보던 박지혜가 킥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남재식은 그게 또 좋다며 의기양양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차를 타고 박지혜 집 근처의 분식집으로 향했다.

딸랑.

문이 열리자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학생들 또 왔어? 어머? 지혜도 왔구나.”

남재식과 박지혜가 꾸벅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이곳의 단골이었다. 주인아주머니가 강우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지혜야, 오늘은 오빠는 안 왔네?”

“네, 오빠 집에 있어요.”

아주머니가 강우를 보고는 떠올랐다는 듯했다.

“맞다! 저번에 왔던 그 학생이구나. 이름이 맞아 박강우 학생.”

“안녕하세요.”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박지혜가 주인아주머니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모, 강우 오빠 이름까지 알아요?”

“그럼~ 텔레비전에 그렇게 자주 나오는데 모르면 이상하지.”

며칠 전 청와대 행사에 참석한 것이 또 뉴스에 나온 상태였다. 강우와 대통령의 대화 장면이 큼지막하게 클로즈업된 것이다. 강우의 얼굴 밑으로 친절하게 자막까지 나갔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뭐 줄까? 김밥에 라면?”

주인아주머니가 익숙한 듯 물었다.

“네, 그거랑 라볶이도 주세요. 계란 추가해서요.”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맛있게 만들어 줄게.”

남재식의 계란 추가에 박지혜가 싱글벙글 웃었다. 남재식이 안경을 슬쩍 추켜 올렸다.

“지혜가, 노른자 으깨 먹는 거 좋아하거든.”

“맞아요. 재식 오빠 최고네.”

남재식이 헤벌쭉 입을 벌렸다. 강우가 손을 들어 남재식의 턱을 툭 하고 쳤다. 남재식이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박지혜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뭐에요! 오빠 둘이 있을 때 진짜 웃겨요. 우리 오빠랑 있을 때는 맨날 진지모드인데.”

“광웅이가 쓸데없이 무게를 좀 잡지.”

강우의 말에 박지혜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박광웅의 흉내를 내며 말했다.

“지혜야, 네가 도움받은 거 만큼 꼭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회에 환원을···.”

목소리마저 낮춘 박지혜였다. 강우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주인아주머니가 음식을 가져왔다.

“강우 학생은 텔레비전에서 본 거보다 훨씬 정감이 가고 성격도 좋네. 우리 지혜 좋겠어.”

“네?”

강우가 흠칫하며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남재식은 고개마저 푹 떨궜다. 그 순간이었다.

“이모, 방향이 틀렸어요. 그쪽이 아니라 이쪽.”

박지혜가 남재식을 가리켰다. 박력 넘치는 박지혜의 행동에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박. 광웅이 닮은 거 하나는 확실하네.’

강우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남재식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먹자.”

강우가 젓가락을 두 사람의 앞에 놓아주었다. 박지혜가 에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참 복스럽게도 먹는 박지혜였다. 남재식은 그런 박지혜에게 물도 따라주고 휴지도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오빠.”

박지혜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남재식은 잔뜩 긴장해서는 한동안 말도 제대로 못 했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숨 막히는 식사 시간이 끝났다.

“그럼 가볼게요. 잘 먹었습니다!”

박지혜가 꾸벅 인사를 하더니 황급히 집으로 달려갔다. 남재식이 움찔하며 뒤를 따라가려 하는 걸 강우가 붙잡았다.

“오늘은 그냥 가자.”

“어.”

강우의 말에 남재식이 두말없이 돌아섰다.

* * *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 남재식이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혹가다 히죽 웃는 남재식의 표정은 행복 그 자체였다.

“좋냐?”

“어?”

강우가 남재식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 남재식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강우가 앞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좋냐고.”

“어···. 어···. 좋지.”

분식집에서 있었던 박지혜의 폭탄 발언에 남재식은 한동안 모든 사고기능이 정지했다. 강우도 한참 멍했으니 그럴 만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차로 이동해 남재식의 사무실로 향했다. 달리는 한참을 운전하던 강우가 슬쩍 입을 열었다.

“아직 수험생이니까. 조금 더 기다려줘.”

“그래야지. 공부하는데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

나이 차이는 두 살이었지만, 남재식은 대학생이었고, 박지혜는 이제 고등학생이었다. 어느 정도 박지혜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안심하고 기다려줄 때였다. 더군다나 남재식에게는 커다란 산이 남아있었다.

“광웅이한테는 말했냐? 지혜 좋아한다고?”

강우의 질문에 남재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여동생을 생각하는 박광웅의 마음은 대단했다. 늘 박지혜 자랑을 입에 달고 살만큼 말이다. 박지혜는 박광웅의 보물이자 희망이었다. 그런 박지혜이니 누구와 만난다 해도 쉽게 허락할지 의문이었다.

“나중에 말할까? 지혜 수능 보고 나면.”

“광웅이 성격에 빨리 말해주는 게 낫지.”

“하아···. 조금 걱정이다. 광웅이가 좋게 봐주려나.”

남재식의 말에 강우가 씩 웃었다.

“왜? 네가 뭐가 어때서? 어엿한 게임 개발회사 사장님에···. 어? 어?”

“됐다. 두 번 죽이냐?”

남재식이 강우의 팔을 쓱 밀어냈다. 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야. 농담. 아무튼, 둘이 좋으면 그거면 됐지. 광웅이도 분명히 너 좋아할 거야. 걱정하지 말고. 일단 지금처럼만 옆에서 잘 챙겨주고 그래.”

“응, 그래야지.”

남재식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남재식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친구에게 찾아온 핑크빛 바람이 부디 잘 이루어졌으면 했다. 이윽고 강우의 차량이 남재식의 사무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강우야, 짐 좀 들어줘.”

“어.”

주차를 끝낸 강우가 트렁크에서 짐을 꺼냈다. 그리고 남재식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어?”

사무실에 들어간 남재식이 흠칫했다. 불과 몇 시간 전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사무실의 모습이었다. 강우가 멍한 남재식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너무 지저분해서 내가 업체 좀 불렀다. 개발도 좋은 환경에서 해야지.”

“깨끗하니까 다른 곳 같네.”

남재식도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리고 또 하나 좀비처럼 컴퓨터에 늘어져 있던 개발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직원들은 다 어디 갔냐?”

남재식이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무언가 조치를 한 게 분명했다. 강우가 씩 웃었다.

“한동안 집에도 못 가고 다들 고생했잖아. 하루 집에 가서 쉬다오라고 했다. 가족들이랑 외식하라고 식사권도 준비했지.”

남재식이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역시 박강우.”

강우가 씩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남재식은 가지고 온 짐들을 풀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강우가 그런 남재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 도와주냐?”

남재식이 허리를 두들기며 물었다.

“이 정도면 도울 만큼 돕지 않았냐?”

“아···. 맞네.”

남재식이 군말 없이 짐을 정리했다. 이윽고 짐 정리를 끝낸 남재식이 강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강우가 슬쩍 물었다.

“이제 슬슬 이사도 하자. 반지하는 아닌 것 같아. 이제 더 큰 곳으로 이사가야지.”

“그런가? 나는 괜찮은데.”

남재식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게임 런칭하면 그냥 개발부서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고. 고객 대응팀도 있어야 하고 게임 내부에서 관리해줄 게임 매니저들도 뽑아야 하고.”

“게임 매니저라···.”

남재식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GM은 Game Manager는 아직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은 개념이었다. 아니 온라인 게임이 소수인 지금은 대부분 개발자가 GM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게임도 서비스업이라 생각했다. 이용자들의 불편이나 피드백을 받기 위한 전문 인력이 필요했다.

“일단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고 생각하자. 나중에 회사 커지면 어차피 만들어야 하는 부서니까. 미리미리 대비하자고.”

“그래, 강우, 네 말이 맞겠지.”

남재식도 강우의 말이라면 만사 오케이였다. 강우가 씩 웃었다.

“그럼 그건 내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너는 게임개발 마무리에 전념해줘.”

“걱정하지 마.”

남재식이 눈을 빛냈다. 역시 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사람이 달라지는 남재식이었다. 그때, 강우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재식아. 너 정말 핸드폰 변기에 빠트렸냐?”

“어? 아니. 사실은 일에 집중하느라 몇 번 못 받았다.”

남재식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강우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뭐. 어찌 됐든 통했으면 됐지. 잘했네.”

“흐흐···.”

남재식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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