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보면 굶기는 줄 알겠다.
경기가 끝나고 강우와 선수들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에서 승합차 한 대가 나왔다. 강우가 선수단을 위해 준비한 차량이었다. 겉에는 동양 레지스탕스를 상징하는 태극과 별을 합쳐놓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강우가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태극기의 중앙에 있는 태극을 모티브로 제작한 것이었다.
“강우야!”
그때, 한쪽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강용이가 나타났다. 강우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아버지, 엄마!”
아버지와 어머니가 강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강용이는 그새 강우의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형아!!”
강용이가 나타나자 선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선수단의 공식 귀염둥이이자 마스코트 같은 강용이었다.
“강용아!”
강우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강용이가 선수들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 오늘 이긴 거 축하해요. 잘했어요. 우리 형들.”
강용이의 진지한 표정에 선수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강용이를 향해 무차별적인 애정 공세를 펼쳤다.
“아야야!”
강용이가 선수들의 애정이 어린 손길에 엄살을 부렸다. 선수들은 그런 강용이가 너무 귀여웠다. 그 모습을 보던 강우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강우야.”
그때, 이나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우의 시선이 대번에 이나은을 향했다.
“나은아? 오늘 못 온다더니 왔어?”
“응, 조금 전에 막 왔어.”
이나은이 품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강우에게 내밀었다.
“오늘 첫 승리 한 거 축하해.”
“고마워.”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강우의 뒤쪽에 있던 선수들이 ‘오오~’ 하며 두 사람에게 환호성을 질렀다. 강우가 뒤를 돌아보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선수들이 후다닥 차에 올라탔다.
“다들 밥 안 먹었죠?”
아침부터 진행된 개관식과 시범경기가 끝난 주변은 조금 어둑해져 있었다. 강우의 질문에 아버지가 답을 했다.
“그럼 아직 안 먹었지.”
“선수들이랑 회식할 겸 같이 가서 식사하고 들어가요.”
“그래, 그러자. 마침 할아버지들도 오늘 약속이 있다고 나가셨어.”
간만에 외식을 한다는 말에 어머니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럼 아빠는 가서 차 빼 올게.”
“네.”
아버지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강우가 선수들이 타고 있는 대형 승합차의 문을 열었다.
드르륵.
강우의 얼굴이 나타나자 선수들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감독님, 오늘 소고기 먹는 겁니까?”
강우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 먹자 한우로다가.”
선수들이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강우가 운전석에 앉아있는 팀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우리 회사 근처에 자주 가던 고깃집 있죠? 거기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때, 강용이가 후다닥 달려와 승합차의 뒤에 올라탔다.
“나는 형들이랑 갈래.”
“그래. 알겠어.”
강용이가 선수들 사이로 몸을 날리듯 뛰어 들어갔다.
“강용아!”
선수들이 강용이를 반기며 서로 옆에 앉으라고 난리였다. 강용이가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뷔욤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뷔욤이 슬쩍 강용이를 보더니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부우웅.
운전석에 앉은 팀 매니저가 차를 출발시켰다. 이윽고 아버지가 자가용을 가지고 주차장에서 나왔다.
빵.
아버지가 작게 클랙슨을 울려 신호를 보냈다. 강우와 어머니 그리고 이나은이 자가용에 탔다.
“아버지 회사 근처 자주 가는 고깃집 있죠? 거기로 다 갔어요.”
“오케이. 출발한다.”
아버지가 자가용을 출발시켰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와 이나은은 수다 삼매경이었다. 서로의 손을 꼭 붙잡은 채였다.
“나은아, 요즘 세아랑 연기 연습하는 건 어때? 재미있어?”
“네, 선배님한테 정말 많이 배우고 있어요.”
이나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요즘 이나은은 김세아가 출연하는 연극 극단원들과 함께 연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종종 연극무대에도 오르고 있다고 했다. 비중은 없었지만, 이나은에게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래, 엄마는 우리 나은이가 자기 하고 싶은 일은 꼭 했으면 좋겠어. 우리 강우랑 예쁘게 만나는 것도 좋지만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야.”
“네, 어머니.”
어머니의 응원에 이나은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그런 이나은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이나은은 연기와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이라 생각했다.
‘언제든지 연기를 하겠다고 하면 그때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줘야겠네.’
강우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용산역이 보이자 살짝 머리가 아파져 왔다. 그리고 미래의 기억 속 용산역의 모습이 지금의 용산역 위로 겹쳐 떠올랐다.
‘아···. 그렇지. 지금쯤이었구나. 이제 곧 용산역의 민자개발 이야기가 나오겠군.’
미래의 기억대로라면 한 기업이 철도청과 협력해 용산역에 커다란 복합쇼핑몰을 세운다. 그 쇼핑몰은 훨씬 더 나중에 다시 개발되고 용산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된다. 강우의 머릿속으로 청사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저곳을 우리가 개발해서 영화관도 만들고 E-SPORTS 전용 경기장도 만들고 하면 되겠군.’
강우는 용산을 대한민국 문화산업의 메카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강우 가족이 탄 차가 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인 회사 건물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건물의 주차장을 보니 선수단이 이용하는 대형 승합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자 내리자.”
아버지도 주차를 끝냈다. 강우와 어머니 그리고 이나은이 차례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회식 장소인 근처의 고깃집으로 향했다. 고깃집에 도착하니 선수들이 모두 강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뭘 기다렸어. 배고픈데 빨리 먹지. 다음부터는 나 기다리지 말고들 먹어.”
“네, 감독님!”
우렁찬 목소리로 답하는 선수들을 보며 강우가 픽 웃었다. 그리고는 주문을 했다. 고생한 선수들을 위해 강우가 선택한 것은 한우 꽃등심이었다.
“오오오!”
특별 메뉴에 선수들의 얼굴이 크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외국인인 뷔욤은 눈을 빛내며 불판을 바라보았다. 뷔욤의 옆에는 강용이가 앉아있었다. 한국 음식에 서툰 뷔욤의 공식 도우미가 바로 강용이었다.
“뷔욤, 이거 먹어요.”
강용이는 서툴지만, 영어를 이용해 뷔욤과 소통했다. 요즘 들어 부쩍 영어 실력이 늘고 있는 강용이었다.
지글. 지글.
고기가 익어가고 선수들의 식성이 대폭발했다. 미성년자가 대부분인 선수단의 특성상 술이 없는 회식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에 작게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는 한잔하실래요?”
“아니다. 있다가 집에 가서 맥주나 한잔하지 뭐.”
강우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들은 정말 잘 먹었다. 고기가 조금 익기가 무섭게 불판 위에서 사라졌다.
“천천히들 먹어. 누가 보면 굶기는 줄 알겠다.”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창 먹을 나이인 선수들을 위해 강우가 가장 신경 쓰는 게 먹을 것이었다.
“강우야, 그런데 아까 직원들한테 듣자 하니 청와대에서 비서관이 나왔다고 하던데?”
“네, 대통령님이 저를 좀 보자고 하신대요.”
강우의 말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이 부른다는 것도 놀랍고 담담한 강우의 표정도 놀라웠다.
“진짜? 왜?”
어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음···. 아마 물어볼 게 있으실 거 같은데요?”
강우의 답을 들은 어머니가 더는 묻지 않았다. 강우가 잘 익은 고기를 어머니와 이나은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많이 드세요. 많이 먹어 나은아.”
어머니와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강우가 흐뭇하게 웃었다.
“잘 먹었습니다!”
선수들이 불룩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강우에게 말했다.
“오늘 진짜 고생들 많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정식 리그 개막하니까 다들 연습 많이 하는 거 잊지 말고.”
선수들이 일제히 알았다고 답했다. 그리고 팀 매니저와 함께 숙소인 회사 건물로 들어갔다.
“우리도 집에 가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슬쩍 당겼다. 강용이도 말없이 자가용에 올라탔다.
“강우야, 우리 먼저 갈 테니까 나은이랑 데이트하다가 와.”
어머니가 그 말을 끝으로 자가용에 탔다. 아버지가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다. 조금 있다가 집에서 보자.”
“네, 들어갈 때 맥주 사서 들어갈게요.”
“좋지~”
아버지가 씩 웃었다. 이윽고 세 사람을 태운 자가용이 주차장을 벗어났다. 강우가 이나은이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가자.”
“응.”
* * *
덜컥.
늦은 밤. 현관문이 열리고 강우가 들어왔다. 양손에는 병맥주와 간단한 안주가 든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강우가 주방에 봉지를 내려놓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는 강용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강우를 기다리다가 잤는지 머리맡에는 책이 놓여있었다. 강우가 조심스럽게 책을 들었다. 책 표지를 보니 강용이가 요즘 빠져있는 판타지 소설이었다. 원래는 강우가 좋아하는 장르 소설이었는데, 형을 따라 읽다 보니 제법 흥미를 붙인 상태였다.
‘그래, 많이 읽어라. 그래야 나중에 도움이 되겠지.’
강우가 책을 한쪽에 놓고는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우가 조심히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인기척을 느낀 아버지가 나와 있었다. 강우가 사 온 맥주와 안주를 먹기 좋게 세팅하고 있었다.
“아들, 한잔해야지?”
“네, 아버지.”
강우가 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버지가 숟가락으로 맥주를 땄다. ‘뻥~’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거품이 올라왔다.
“받아라.”
“네.”
강우가 두 손을 잔을 내밀었다. 강우의 잔이 금세 황금색으로 차올랐다. 이번에는 강우가 아버지의 잔을 따라주었다. 잔을 받은 아버지가 강우가 들고 있는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두 부자가 단숨에 맥주 한 잔을 비워냈다.
“나은이는 잘 들어갔어?”
“네, 집에 들어가는 거까지 보고 왔어요.”
“그래 잘했어.”
아버지가 강우가 사 온 땅콩을 입에 한 움큼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청와대는 언제 가는 거야?”
“그쪽에서 연락한다고 했어요.”
“한바탕 또 난리 나겠네. 우리 아들.”
“이번에는 언론에 안 알리고 다녀왔으면 해요.”
강우의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이나은과의 데이트에서도 알아보는 사람들로 인해 제법 곤란을 겪었었다. 자신은 상관없지만, 이나은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래, 청와대에 네가 먼저 부탁을 해봐.”
“네.”
다시 강우와 아버지의 잔이 가득 찼다. 강우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버지 김 사업은 잘돼 가요?”
“응, 걱정하지 마라. 재원이 도움으로 업체 선정도 다 끝났어. 이제 샘플 나오기만 하면 된다.”
“일단 중국이랑 일본에 수출부터 시작해요. 국내 시장은 이미 다른 제품들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요.”
“그래야지.”
동양 무역은 해외에 막강한 파트너들이 있었다. 국내 시장보다는 수출에 비중을 두는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
“한동안 제가 바빠서 회사 일 거들지 못할 거 같아요.”
“괜찮아. 어차피 아빠 중국 가면 다 네 몫이다.”
아버지의 농담에 강우가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마주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두 부자는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업 이야기는 물론이고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 등등이었다. 강우는 미래와는 달라진 아버지와의 이런 관계에 너무나 행복했다.